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8화 (85/229)

88화.

"그……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 었습니다, 대부인."

“그래?”

조금 전의 남자가 주눅 들어 사과하자 일레나 대부인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자네는 오스틴 남작의 아들 아닌가?"

"마, 맞습니다.”

“얼마 전에 오스틴 남작도 바람 피우는 것을 현장에서 걸렸다던데? 자네 모친께서는 가정의 평화에 대해 아무 말씀 안 하시던가?"

“…… 저,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졸지에 가문의 치부를 공개적으로 지적당한 남자는 허둥지둥 일어나 살롱을 나가 버렸다.

겨울은 길고 조용한 계절이었다.

젊은 귀족들은 수도 이곳저곳에서 소규모 살롱을 연다지만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에게는 신년 무도회가 끝난 이후로 이렇다 한 큰 행사도 없었을 터.

“이런 살롱이 있다니 몰랐지 뭐예요.”

“하여간 젊은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재밌는 걸 생각해 낸다니까!”

라보네 여백작은 자신의 친구 둘을 더 불러냈고, 그들은 또 각자의 친구들을 불러냈다.

본래 블루밍 살롱의 의의가 이런 방식에 있기는 하지만 정작 줄리엣을 불러다 놓고 실컷 조롱하며 즐길 예정이었던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살롱의 주도권은 자연히 그쪽으로 넘어갔다.

“재산 분할이…….”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살롱이 파할 무렵에는 손님들의 평균 연령대가 대폭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나와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모이는 게 좋겠네요!”

그 이후로 살롱이 파할 때까지 줄리엣이 다시 화제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줄리엣은 쟁쟁한 사교계 명사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모나드 백작가의 인맥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는 한편, 조용히 경고한 것이다.

'당분간은 이만하면 됐겠지.'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모나드 백작가의 하인들을 괴롭히던 것은 오늘 살롱의 주최자들이기도 했다.

당분간 그들은 줄리엣을 다시 불러내거나 모나드 백작가의 하인들을 괴롭힐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번 ‘버림받은 여자' 운운하면 이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의 성화를 맞게 될 테니까.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다 문줄리엣은 자리가 정리되기 전에 앞에서 서 있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너…….”

파티마가 줄리엣을 원망스러운 듯 노려보며 서 있었다.

“줄리엣 모나드.”

“황자비 전하.”

“네가 무슨 짓을 한 건 줄 알아? 방금 내 첫 공식 살롱을 망쳐 놨잖아!”

“…… 망치다니요?"

줄리엣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줄리엣은 손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커다란 유리창을 가리켰다.

“모두 좋은 분들이세요. 잘 사귀어 두시면 도움이 되지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줄리엣이 초대한 세 명의 귀부 인들은 누구든 샤프롱(후원자)으로 삼고 싶어 목을 매는 상대였다.

그들 또래의 아가씨들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 얘기였다.

그러나 파티마는 통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네가 나를 방해한 거잖아!"

“.… 제가 비 전하라면 좀 더 신중하게 친구를 고를 거예요.”

줄리엣이 차분하게 말했다.

파티마가 정말로 황자비답게 인맥을 쌓고 싶었다면 그녀는 뒷담화를 목적으로 살롱을 열자고 부추기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했다.

그 대신 일레나 대부인처럼 영향력이 센 귀부인들을 초대했어야지.

줄리엣은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은 게 파티마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친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좀 다르긴 하겠네요."

줄리엣은 예쁘게 싱긋 웃으며 파티마에게 인사한 다음 그녀를 지나쳤다.

“그럼.”

살롱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며 줄리엣은 담담히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는 데 익숙했다. 북부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그랬다.

줄리엣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궁의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 했다.

그때 잘 손질된 황궁의 정원수들 사이를 천천히 걷던 줄리엣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

“이제 돌아가십니까,모나드양?”

줄리엣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조금 경계하면서 자신을 불러 세운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2황자 클로프로 황제의 둘째 아들이자, 파티마의 약혼자였다.

줄리엣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무슨 용건이지?' 자기 약혼녀가 계획한 대로 고분고분 망신당해 주지 않았다고 앙갚음이라도 하러 온 걸까?

줄리엣은 다소 냉랭한 미소를 띤 채 빠르게 생각했다.

야심이 넘치는 그는 칼라일 공작의 명성을 견제했다. 대놓고 적대시하는 통에 줄리엣은 그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공작이 무서워 직접 건드리지는 못하면서, 애꿎은 줄리엣에게 굴절된 분노를 투영하는 소인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클로프는 좀 이상했다.

그는 퍽 기분이 좋은 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거 없습니다, 모나드 영애.”

“....… 모나드 백작이에요, 황자님.”

줄리엣이 차갑게 웃는 낯으로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모나드 영애가 아니라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줄리엣은 모나드 백작 영애로 불렸지만 실상은 그녀가 엄연한 모나드 백작이었다.

정식으로 계승식을 치른 적은 없어도 가문의 후계자는 그녀였으니 말이다.

“아아, 그래요. 그렇죠.”

클로프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가족이 될 텐데.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 가족이라뇨?”

“나를 친 오라비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줄리엣.”

이건 또 무슨 소름 돋는 이야기야?

줄리엣의 표정이 냉랭해지자 2황자가 말했다.

“이런, 칼라일 공작이 말하지 않던가요?”

북부에서부터 불려 온 공작가의 주치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용한 지경이었다. 단 며칠 만공작의 몸 상태는 살아 있는 것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괴물 같은 회복력은 경이로웠지만…….

“아직도 눈앞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며칠이 지나도록 칼라일 공작의 시력에는 차도가 없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죄, 죄송합니다.”

공작가의 주치의는 다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게 다 정상입니다.”

각막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어 그들은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만약 이 상태가 지속 된다면 영영 시력의 잃을 수도 있습니다.”

눈은 내부 장기와는 달리 한 번 다치면 영구적으로 손상이 갈 수 있는 부위였다.

“실명이라뇨!”

잠자코 듣고 있던 엘리엇은 기절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시더라니. 왜 눈이 보이지 않는 걸 말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아니, 뭔가 방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는 주인의 앞인 것도 잊고 목소리를 높였다.

칼라일 공작가는 적이 많았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사방에서 물어뜯으려 달려들 터였다.

'이러다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기 기라도 하면…….'

엘리엇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현재 공작의 몸 상태는 철저히 극비로 부쳐졌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문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하딘을 포함해, 공작 본인과 주치의, 비서인 엘리엇까지 단 네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루체른의 신성 결계라고 하셨잖습니까.”

마법과 신성 저주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주치의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건 대신관들이라도 쉽게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일단 정확히 그 반사 저주가 어떤 종류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낙담한 엘리엇과는 달리, 레녹스 칼라일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물었다.

“저주의 종류가 뭔지 정확히 알아내면 풀 수 있다는 얘긴가?”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혹은…… 결계를 깨뜨리신 것처럼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신성 결계를 깨뜨린 것처럼 저주도 깨뜨리자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마법이든 저주는 더 큰 힘을 가하면 깨지는 것이니.

레녹스의 손가락이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하지만 무리하게 저주를 깨려고 들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젠장……. 그쯤은 알아서 해.”

시야가 제한되자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레녹스가 한숨과 함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쨌든…… 입단속을 해 주십시오. 이 일은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그런데 공작가의 주치의는 엘리 엇의 말을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

주치의는 침실 한쪽에 선 공작가의 주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펄럭.

진찰이 끝나자 칼라일 공작이 맨몸에 흰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것처럼 잘 조각된 몸에 주치 의는 감탄 반 심란함 반의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라일 공작은 유달리 누가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해 몸시중조차 받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심심찮게 검상을 달고 돌아오는, 꽤 다루기 까다로운 환자여서 주치의조차 그의 몸을 본 적이 많지 않았다.

엘리엇은 좀 어이가 없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긴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아, 아가씨!”

아래층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무슨 소리지?”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엘리엇이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치 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군가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줄리엣 아가씨?"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주치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빌어먹을.”

그와 동시에 레녹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벗은 상체에 셔츠 하나만 걸친 칼라일 공작은 욕설과 함께 다소 불안한 걸음으로 침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작은 응접실로 통하는 문이 있을 법한 방향으로 고갯짓하며 윽박질렀다.

“나가.”

숨으라는

…… 나가라는 건지, 건지.

"아, 예!”

의도를 알아들은 주치의는 재빨리 응접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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