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7화 (84/229)

87화.

*

"어서 오세요, 모나드 양!”

줄리엣이 연회장에 도착한 것은 점심나절이 조금 지나서였다.

장소는 어린 아가씨들의 살롱모임치고는 호화스러운 황궁의 의별관이었다.

줄리엣이 도착하자마자 살롱에 있던 모두는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옆 사람을 붙잡고 다급히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 뻔뻔하기도 하지.”

뭐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모나드 양! 다들 소식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정말 힘들었겠어요. 지금은 좀 괜찮으신가요?”

줄리엣은 별로 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제게 우르르 다가오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줄리엣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가식적인 미소로만 일관했다.

그녀는 무시당한 사람들이 불쾌해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살롱 가장 안쪽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정중앙에 앉아 있던 개최자를 향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비 전하.”

"그…!”

줄리엣이 그 많은 초대장 중 선택한 것은 예비 황자비 파티마의 것이었다.

이런 식의 인사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인사를 받은 파티의 주최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 맞다. 아직은 황자비 전하가 아니시던가요?”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 어차피 다음 달이면 황자비가 되실 거예요."

파티마의 주변에 앉아 있던 영애가 톡 쏘듯 대답했다.

“네, 저도 그래서 왔답니다.”

줄리엣은 파티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비 전하의 첫 블루밍살롱을 놓칠 수 있겠어요?"

블루밍 살롱은 특이한 규칙 때문에 최근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규칙은 의외로 간단했다.

살롱의 주최자는 세 명에게 초대장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초대장을 받은 사람 역시 다른 세 명에게 초대장을 나눠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반복해 나가다 보면 살롱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된다. 물론 인맥이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한 사람이 초대장을 여러 장 받기도 하지만,

'대체 몇 명이 보낸 거람.'

줄리엣 역시 그런 식으로 오늘 살롱의 초대장을 몇 장이나 받았다.

단 세 명만 초대할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누가 살롱에 오느냐에 따라 개최자의 인맥이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파티마는 황궁의 별관 사용 허락까지 받아 가며 대규모로 살롱을 개최했다.

'내년 봄이면 황자비가 될 테니 인맥을 다지는 자리가 필요했겠지.’

파티마야 정식으로 개최하는 첫 살롱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겠지만…….

'조금 치사하잖아.'

줄리엣은 사람들이 권하는 중앙자리에 앉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예전이었지만 줄리엣과 파티마는 친구 사이였다.

옛 친구의 불행을 이야깃거리로 삼아 가면서까지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을까?

파티마는 여전히 줄리엣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쨌든 모인 사람들의 숫자를 보아하니 파티마의 의도대로 살롱은 그럭저럭 성공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지 지내셨나요, 모나드 양?”

고개를 든 줄리엣은 저를 향한 무수한 시선들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모두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어요.”

“공작 전하께 이별을 통보받았다지요?”

소문이 그렇게 난 모양이다.

하기야 다음날 신년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부터 입방아에 올랐을 것이다.

“저는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나드 양.”

초면인 남자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공작 부인 같은 허황된 꿈은 깨시라고요.”

불쾌하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문은 사실인가요?”

“공작께 제발 쫓아내지만 말아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이야기요."

이때다 싶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이렇게까지 저열할 수 있을까.

“....… 제가 그랬나요?"

줄리엣은 싸늘하게 웃었다.

사실 그녀가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줄리엣은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그때였다.

“일레나 대부인 드십니다!"

"......?"

누구? 누구라고?

살롱의 손님들은 모두 귀를 의심했다.

일레나 대부인은 사교계에서 유명한 노부인 중 한 명이었다.

황후의 인척이기도 한 그녀는 깐깐하고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사교계의 대모 중 하나였다.

간단히 말해, 이런 어린애들 노는 곳에 친히 행차하실 만한 신분이 아니었다.

“지, 진짜 일레나 대부인이잖아……?"

후닥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은 막 홀로 걸어 들어오는 풍채 당당한 귀부인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대체 누가 초대한 거야?”

“제가 초대 드렸어요!"

줄리엣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와 주셔서 기뻐요, 대부인.”

“.....…그래. 오랜만이구나, 줄리 엣.”

회색 머리칼을 멋스럽게 뒤로 넘긴 귀부인이 줄리엣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조금 무뚝뚝하게 말했다.

“흥, 옷은 예쁘게 입었구나.”

“감사합니다. 대부인의 케이프도 정말 멋져요.”

줄리엣은 생글거렸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얌전한 드레스에 진주 장식은 예상대로 대부인의 취향인 모양이었다.

아들만 셋을 키워 낸 그녀는 드레스를 입은 얌전한 어린이였던 줄리엣을 보면 “넌 참 얌전하구나.” 하며 박하사탕을 쥐여 주곤 했었다.

누군가 대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줄리엣에게 속삭였다.

“아니……, 모나드 양! 지금 대부인을 블루밍 살롱에 초대한 거예요?"

“네. 왜요?"

“하, 하지만 영애는 초대 손님인데…….”

"네. 문제 있나요? 블루밍 살롱이잖아요.”

줄리엣이 짐짓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제게도 빈 초대장이 동봉됐는 걸요. 그게 규칙 아닌가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일레나 대부인이라니..

그녀의 앞에서는 누구든 옷차림을 지적받거나 가문의 치부를 지적당해 움츠러들고는 했다.

사람들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들은 블루밍 살롱이 사람을 많이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줄리엣 모나드가 큰 망신을 당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누군가를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이 누굴 부르는 별로 달라질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와 공작과 헤어졌다는 것은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했고, 깐깐한 일레나 대부인이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은 공작을 따라 북부로 가 버린 줄리엣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흠흠, 모나드 양. 그래서 그 소문이…….”

다시 레녹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였다.

“라보네 여백작 드십니다!"

사람들은 또 다른 사교계 저명인사인 라보네 여백작의 등장에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엣은 웃는 낯으로 달려가 손님을 맞이했다.

'일레나 대부인에 이어서 또?'

라보네 여백작은 붉은 머리칼이 갈기처럼 화려한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유명했는데, 몇 년 전 무능력한 남편과 결별하고 지금껏 승승장구 중이었다.

잠시 후, 파르네제 여후작이 세번째로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어, 어쨌든 모나드 양이 버림받은 것은 확실한 거죠?”

“누가 버림을 받아?”

누군가 속삭이는 말을 들었는지 일레나 대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최근 모나드 영애가 실연을 당해서 저택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빌었다는 소문이…….….”

“그런 몹쓸 놈이 있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일레나 대부인은 크게 분노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찻잔 속을 줄곧 응시하던 줄리엣은 때마침 눈을 깜빡였다.

반짝.

또르르.

새하얀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저런.”

“가엾게도…….”

귀부인들은 잔뜩 안쓰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는 저게 웃긴가?"

“예?”

“하여간 사내란 것들은 말이야!

공감 능력이 없어!”

줄리엣은 자신에게 주어진 초대장 세 장을 최대한 유용하게 사용했다.

일레나 대부인, 라보네 여백작, 파르네제 여후작은 모두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의 오랜 지인이었다.

모나드 백작 부부는 점잖은 사람들이었고 사교계에서도 인망이 좋은 편이었다.

줄리엣은 어릴 때부터 사교계에는 잘 나오지 않는 유명한 귀부 인들과 안면이 있었다.

물론 보수적인 어른들은 미혼의 줄리엣이 덜컥 외간 남자를 따라 떠났다는 것을 고운 눈초리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줄리엣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호감이 아니라 공통된 분노였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오랜 지인. 그리고 그 지인의 단 하나뿐인 여식. 그 아이의 불행에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분노했다.

“하여간 남편이란 작자가……!”

“그 영감쟁이가!”

"어디 채신머리없이!"

그리고 세 사람은 하나같이 남편의 외도로 골머리를 썩었거나 이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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