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6화 (83/229)

86화.

“달리아라……."

레녹스 칼라일은 가만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줄리엣이 달리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전하,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피를 토하며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줄리엣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단지 패닉 상태에서 아무 말이나 했다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많았다.

"레녹스, 내가 미안해요.”

눈앞에서 그 여자가 죽어 가는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장면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레녹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하딘.”

“예.”

"루체른에 사람을 보내. 알아볼게 있다.”

줄리엣은 마차를 타고 빠르게 칼라일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사실 그녀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누구는 기껏 걱정돼서 찾아갔더니 무슨…….’

게다가 루체른에서 자신이 했다는 말이나 나비들이 사라진 것까지 할 이야기도 꽤 있었는데.

잔뜩 화가 나 있던 줄리엣은 백작저의 응접실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공작저에 뭔가를 놓고 왔다.

는 것을 눈치챘다.

“.……내 머리핀.”

필시 나갈 때만 해도 머리를 꼼꼼히 틀어 올렸었는데 머리핀은 온데간데없고 긴 머리카락이 등뒤로 늘어져 있었다.

'아끼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침대 위로 넘어졌을 때 침실 어딘가에 빠뜨린 것 같았다.

진주가 알알이 달린 나뭇잎 모양 머리핀은 줄리엣이 아끼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쉰 줄리엣은 커다란 통유리 앞에 놓인 책상에 앉았다. 그 너머로 정원을 내다 보던 줄리엣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정원이 전문 관리를 받은 것처럼 깔끔해져 있었다. 지저분하게 방치되던 원형 분수도 깔끔히 청소되어 있었고 미로 정원도 새장미 덩굴이 들어서 있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손을 써 주신 걸까?'

하지만 이내 줄리엣은 자신이 백작저로 돌아온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일주일 안에 저 보수 공사를 끝내기는 어려웠을 텐데...….’

게다가 리오넬은 어제 훌쩍 제도를 떠나기도 했다.

“아가씨.”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유모인 이베트가 다기 세트를 든 채 응접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걸 왜 혼자 들고 와요. 위험해요.”

줄리엣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베트로부터 찻잔을 넘겨받았다.

“아가씨, 이 저택의 구조는 아직 제 머릿속에 훤하답니다."

이베트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아도 이쯤은 문제없어요.”

줄리엣은 이베트의 은백색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차를 마시면서 집 안을 둘러보다 보니, 정원뿐만이 아니라 저택 곳곳이 깔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 정원사를 고용할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줄리엣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에 드세요?"

줄리엣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묻기도 전에 이베트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집에 안 계시는 동안 어떤 신사분이 저택을 찾아 오셨답니다.”

".…네? 누가요?"

"아가씨가 매년 말씀하던 그분이시죠.”

덜커덕.

줄리엣은 하마터면 찻잔의 뚜껑을 놓칠 뻔했다.

"칼라일 공작님이요?"

“네.”

예상치 못한 이름에 줄리엣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칼라일 공작을 따라 북부로 떠난 다음부터, 줄리엣이 백작저로 돌아오는 것은 1년에 한 번, 매해 신년 무도회가 열리는 즈음이었다.

모나드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가족처럼 좋은 사람들이고 줄리엣은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그래서 최소한 사실은 아니더라도, 제가 북부에서 잘 지낸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어차피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레녹스 칼라일은 줄리엣이 뭘 하든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시작된 거짓말이었는데…….

“아가씨 말씀대로 다정한 분이 시던걸요.”

그럴 리가요.

줄리엣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만 깜빡였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만 듣고도 알겠더군요. 그리고 저택이 매우 낡았다고 하니 정원사와 수리공을 빌려주셨어요.”

줄리엣은 손안에서 텅 빈 찻잔을 굴렸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정말 다정하신 분이죠.”

찻잔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았지만 어딘지 공허했다.

"다정하고…… 언제나 저를 배려해 주시는 분이세요.”

그랬구나.

줄리엣은 이미 그녀의 보잘것없는 거짓말이 이베트에게 탄로 났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저택의 모두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줄리엣 모나드가 공작의 시한부정부고, 언제든 내쳐질 수 있다.

는 것은 제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왠지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자신을 영영 사랑하지 않을 남자의 곁에 머물기를 선택한 순간 자존심 같은 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저, 아가씨. 잠시 드릴 말이 있습니다.”

그때 응접실로 들어온 나이든 집사가 그녀를 불렀다.

“네.”

줄리엣이 나가 보니 현관 쪽에 하녀 하나와 하인들 둘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실은 오늘 식료품 수레가 오지 않았습니다, 아가씨."

그것 때문에 오늘 밤 저녁 식사준비가 어렵겠다는 이야기였다.

“수레가 왜 오지 않았지?"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녁 식사 준비야 눈치 없는 식객들에게 감자만 먹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게"

하인들의 설명을 들은 줄리엣은 기가 막혔다.

요컨대, 얼마 전부터 다른 가문의 하인들이 크고 작게 방해를 를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크게는 마차나 마구를 수리하는 일에서부터, 정말 사소하게는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구입하는 일까지. 어떤 특정 가문 하인이 훼방을 놓는 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건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훼방을 놓는 이유가 기막힌 것이…….

"내가 초대를 거절해서?”

"네…….”

줄리엣의 표정이 냉담해졌다.

유치한 협박이었다.

줄리엣은 이제야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닫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였다.

“비참하게 버림받은 몰골을 구 구경하고 싶으니 제 발로 와서 구경거리나 좀 되어 봐라. 이런 거네.”

“..…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 제가 다른 루트의 식료품시장과 상인을 알아보지요.”

나이든 집사가 그렇게 만류했 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귀족가 하인들은 그들만의 견고한 관계망이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건 그들이 여태까지 쌓아올린 다른 관계망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금이야 식료품 정도지만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이 닥칠지 몰랐다.

'산속에 들어가서 살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계속되겠지.'

“제가 해결할게요.”

당연히 줄리엣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가문과 저택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줄리엣은 현관 한쪽에서 그동안의 우편물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거실 한가운데에 쏟아 놓았다.

와르르.

"와, 이게 다 뭡니까?”

편지 봉투 비슷한 것이 바닥에 쏟아졌다. 지나가던 에셀리드와 테오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너 인기 좋은가 보다?”

테오가 놀란 듯 태평하게 앉아 초대장의 숫자를 보고 감탄했다.

“친구 없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가 보지?”

줄리엣은 대답 대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아니야.”

그건 모두 티파티나 살롱 모임같은 것의 초대장이었다.

줄리엣은 심드렁히 초대장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랄까,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관례 같은 거였다.

레녹스 칼라일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지대한 사교계 사람들은 그에게서 버림받은 이후 그의 과거 연인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꼭 알고 싶어 했다.

"누구는 주제넘게 씀씀이만 커지더니! 파산했답니다."

"어느 극장의 프리마 돈나는 콧대가 너무 높아져서 한미한 단역에서도 잘렸다지요?”

"세상에, 주제도 모르고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굴더니…….”

등등.

그런 사람들이 오랜 유희 거리를 포기할 리 없겠지. 이번에는 줄리엣을 갖고 실컷 놀아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내가 망가진 꼴이 보고 싶은가 봐."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남의 불행을 떠들며 안줏거리 삼아 즐기기 좋아하는 자들은.

줄리엣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원하는 게 그거라면 뜻대로 해줘야겠네.”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버림받은 정부가 어떤 건지 보여줘야지.”

줄리엣은 싸늘하게 이를 사리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착하게 살걸 그랬나."

중얼거렸다.

말과는 달리 줄리엣은 그다지 후회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순순히 망가져 줄 생각도, 또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줄 생각도 없었다.

“이걸로 하자."

고심 끝에 줄리엣은 초대장 하나를 뽑아 들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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