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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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는 뭐지?”
"죽은 기네스 후작의 후처입니다. 여덟 번째 아내라고 하더군요."
말이 아내였지, 그녀는 노예나다름없었다.
전생에서 가스팔 남작은 수없이 그녀를 팔아먹었고 그녀의 다섯번째 결혼은 살아 있는 지옥과다를 바 없었다.
다섯 번째 남편이었던 기네스후작은 그녀를 몸도 누이기 힘든 작은 방에 감금했다.
쇠사슬에 묶여서, 하루하루 빨리 죽여 달라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지옥.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옥이 끝났다.
기네스 후작이 북부 공작과의 정쟁 끝에 패배하고 살해당한 것이다.
성이 함락되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을 줄리엣은 결코 잊지 못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빛나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섬뜩하다 말하는 칼라일 공작가 특유의 붉은 눈조차도 그녀에게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전하, 불길한 여자입니다.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의 측근들은 그녀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럴 만도 했다. 감금당해 오랜 학대를 당한 끝에 그녀의 몰골은 아름답기는커녕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던 공작은 명령했다.
"성으로 데려간다.”
그 말 한마디로 그녀는 북부의 공작 성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공작의 손님 신분으 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공작성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매질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니까 그를 좋아하게 된 건 각인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마치 알에서 깨어난 새끼 용이 태어나 처음으로 본 줄리엣을 무조건 좋아하고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
두 번째 삶에서조차 이 얼굴에 반한 것은 그때의 각인이 기억에 남아서일까, 아니면 영혼에 새겨져서 일까.
첫 번째 삶에서도 그렇고 두 번째 삶에서도 줄리엣은 잠든 이 남자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입을 열면 찬바람이 쌩쌩 불만큼 냉랭하지만, 적어도 잠든 남자는 날카로운 말을 내뱉거나 모질게 굴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은 줄리엣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남자는 온전히 그녀 하나만의 것이었다.
짧은 새벽 동안 줄리엣은 잠들지 않고서도 꿈을 꿨다.
눈을 감지 않고도 꿀 수 있는 꿈이었다.
'그래도 나를 아직은 내치지 않았으니까, 조금쯤은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머리를 빗어 주던 하녀들이 그랬어.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공작님께서 계속해서 곁에 두는 것은 아가씨가 처음이시라고.'
그런 말들이 줄리엣을 들뜨게 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그 역시 자신에게 한 조각 진심을 보여 주는 날이 올 거라고, 그렇게 믿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제게 웃어 주지 않아도 좋고 제게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는 태생이 냉정해 해서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새벽은 짧았고, 줄리엣의 꿈도 짧았다. 머지않아 줄리 엣은 알게 되었다.
사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애정과 관심은 오직 특별한 한 사람을 위해서만 쓰였다.
더부살이나 다를 바 없던 자신과 달리아를 향한 눈빛은 너무나도 달랐다.
*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줄리엣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반듯한 이마와 오만하다 싶은 콧대를 가진 남자는 여전히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벌어진 가운 앞섶 때문에 보이는 탄탄한 가슴팍과 배, 얼핏 보이는 부분들도 장인이 조각한 조각품 같다.
눈을 감고 있을 때의 레녹스는 제 나이처럼 보였다.
줄리엣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직 서른도 채 안 된 주제에.
맨날 미간에 인상이나 쓰고 있고 말이야…….’
손끝으로라도 그의 미간을 꾹꾹눌러 보고 싶었다.
"......!"
그러나 제대로 손을 뻗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눈을 뜨지도 않은 남자에게 손목이 덥석 잡힌 것이다.
그는 잠들어 있던 사람 같지 않게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느긋하게 물었다.
“구경은 잘 했나?"
“.…… 레녹스."
남자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줄리엣을 맞은편 침대로 끌어다 앉혔다.
줄리엣은 침대로 이끌려 가는 짧은 순간에도 남자의 거동에 불편한 기색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러나 소문과는 달리 그의 걸음걸이는 날렵한 육식 맹수의 그것처럼 매끄러웠다.
그녀는 살짝 의구심을 느끼며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아주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요.”
"왜? 고작 그 정도로 앓아눕기라도 했을까 봐?”
맞은편 안락의자에 걸터앉은 레녹스가 팔짱을 끼고 심드렁히 비웃었다.
눈을 다 뜨기에는 너무 귀찮다는 듯, 잠이 덜 깬 듯 조금 내리 깐 눈매가 느른했다.
평소의 말투와 태도 그대로였다.
줄리엣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지만 평소의 그와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 왜…."
문밖에서 경비를 서는 하딘이며 잔뜩 신경이 곤두선 공작가 사용 인들. 또한 그가 다 죽어 간다는 소문은 뭐란 말인가?
그가 싱긋 웃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뭐가요?”
“누가 아프면 득달같이 달려와주기에.”
"......?"
순간, 몸을 일으킨 레녹스가 불쑥 다가왔다.
그는 줄리엣의 어깨를 잡아 순식간에 푹신한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머리핀으로 고정시켜 틀어 올렸던 머리칼이 밀쳐진 충격으로 풀어졌다. 진주 장식 머리핀은 침대 어딘가로 떨어졌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는 넘어진 줄리엣의 위로 올라타 속삭였다.
“늑대 새끼하고는 잘만 했잖아, 병원 놀이.”
반쯤 뜨인 붉은 눈을 마주 보던 줄리엣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병원 놀이?
황당해하는 줄리엣을 앞에 두고, 레녹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끝에 입 맞추며 말했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아, 일단 내가 눈을 다쳐야 하나?"
줄리엣은 그제야 그가 '시험해 봤다'라는 게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루체른의 연회장에서 로이가 다쳤던 일을 말하는 거다.
“전하."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를 밀쳐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괜찮으신 걸 확인했으니 저는 돌아갈래요."
“내가 아파서 돌봐 주러 온 거 아니었나? 환자가 아프다는데 이래도 돼?”
“그건 진짜로나 아팠을 때 얘기겠죠.”
줄리엣은 냉담하게 그를 지나쳤다.
쾅.
이어서 줄리엣이 침실을 나서고 복도를 걸어 나가는 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이내 창밖에서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하.”
“예.”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충실한 수하가 대답했다.
“들여보내지 말라 했을 텐데.”
“.....… 죄송합니다. ”
레녹스는 그제야 조금 긴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짧은 사이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줄리엣이 눈치챈 것 같나?”
“아닙니다.”
대답을 들은 레녹스는 그제야 안락의자에 주저앉아 깊게 몸을 묻었다.
“...…젠장.”
하딘은 협탁의 유리잔을 집어든 공작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두 번 할 짓은 못 되는군, 그래.”
레녹스가 짓씹듯 내뱉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그의 장기들은 멀쩡한 게 드문 상태였다.
루체른의 다리에서 줄리엣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것처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결계는 결계를 강제로 깨뜨리면 반사 저주가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하물며 그는 나머지 아흔일곱개의 결계를 모두 깨뜨렸다. 다시 말해, 그에게 돌아온 반사 저주의 수는 아흔일곱 개란 뜻이다.
신성 마법은 몸 안쪽의 장기들에 치명타를 입혔다. 눈으로는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악질적이었다.
그나마 고통은 다 견딜 만했다.
‘이 정도쯤이야.'
전쟁터에서 구르던 열 몇 살 즈음에는 그는 배에 구멍이 뚫리고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다만 멀쩡했던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된 것만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흔일곱 가지 저주는 기간도 종류도 각기 달라서 시력을 잃은 상황이 어느 정도나 지속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그의 턱을 타고 뚝뚝 흘렀다.
줄리엣처럼 차라리 일주일간 까무러쳤다가 깨어나는 저주는 운이 좋은 지경이었다.
“줄리엣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지?”
“예.”
그녀는 필시 자책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귀에 들어가는 일 없게 해.”
“……존명.”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