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4화 (81/229)

84화.

줄리엣은 크게 당황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요?”

“네.”

로이는 차분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달리아라는 여자가 루체른의 성녀로 등장했어야 했는데 왜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줄리엣은 혀를 깨물었다. 숨을 멈춘 것도 같다.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그러나 로이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남자한테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줄리 엣.”

로이가 싱긋 웃었다.

“당신 손에 다시 죽고 싶지 않다고,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더군요.”

순간 줄리엣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눈앞이 깜깜해졌다. 당장 레녹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걱정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다.

'설마, 나비가 사라진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줄리엣은 어느새 자신이 로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냉랭하다고 생각하니 좀 서운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그 이후 나비들을 잃기까지 했다.

“킥.”

"......?"

별안간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에 줄리엣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줄리엣.”

덜컹거리는 마차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로이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는 줄리엣이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손을 짚었다.

모나드 백작가의 마차는 그리 크지 않아서 로이가 그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이 꽉 찼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이 누구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어요.”

“로이. 나는……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묻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네.”

줄리엣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못 들은 거로 할 게요. 내가 잠시 미쳤다고 해 두죠.”

로이는 싱긋 웃었다.

**

차르륵.

마차 바퀴가 자갈 위를 구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도의 칼라일 공작저는 유독쥐죽은 듯 고요했다. 저택의 주인이 건강상의 이유로 외부 손님의 방문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등장한 마차를 향하는 시선들은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웬 방문객?”

“경우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안 그래도 지난 한 달여간 레녹스 칼라일의 컨디션 저조로 인해 실컷 구르던 공작가의 비서진들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가 보지.”

거세게 항의할 요량으로 한껏 눈에 힘을 준 엘리엇은 마차 가까이에 다가갔다.

눈힘은 가

'…… 그런데 저게 어느 가문 마차였더라?'

낯이 익은 문장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엘리엇은 어쩐지 금방 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 문이 달칵 열리고 안에 탔던 사람이 폴짝 뛰어내렸다.

시중인 없이, 발판도 밟지 않은 채 뛰어내리는 폼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우아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거지가 어쩐지 익숙한 분위기인데.….

뒷머리를 긁적이던 엘리엇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녕하세요, 엘리엇, 잘 지냈어요?”

목 끝까지 올라오는 진주 단추가 달린 드레스, 검정색 레이스장갑과 낯익은

구두의 주인

은…….

“모나드 양?”

엘리엇은 눈을 의심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줄리엣 모나드가 이 저택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실로 몇 년만의 일인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줄리엣은 곧장 저택 내로 가는 대신 엘리엇의 앞에 와서 섰다.

"저…….”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줄리 엣을 보고 엘리엇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녀의 신분은 방문객이었다.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라.

“아! 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경우 없는 방문객을 쫓아내겠다.

고 잔뜩 벼르고 나갔던 수석 비서가 되레 손님을 모시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현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데리고 들어와?”

“쫓아낸다며?”

미어캣 무리처럼 기웃거리던 그들의 표정은 방문객의 얼굴을 을확인하고 구세주를 발견한 양 환해졌다.

“모나드 영애!”

한 달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춤으로써 그들에게 지옥을 선사했던 장본인이었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여, 여기! 이쪽입니다.”

어째 줄리엣이 현관과 계단 그리고 안채의 복도를 지날 때마다 안내를 핑계로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꼬리의 숫자가 하나둘씩 늘었다.

줄리엣이 공작저의 구조에 누구보다 익숙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줄리엣이 레녹스의 침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커다란 남자가 줄리엣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공작의 심복인 하이었다.

“잠깐이면 돼요.”

"안 됩니다.”

줄리엣이 간청했지만 하딘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그냥 얼굴만 볼게요. 전하 괜찮은지, 상태만이라도…….”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외부인이라니!

줄리엣의 뒤편에 서 있던 엘리 엇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 경악한 얼굴로 펄펄 뛰었다.

줄리엣이 부재했던 지난 한 달간 온갖 험한 꼴은 다 당해야 했던 공작가의 비서진은 하딘을 향해 '너 지금 제정신이냐.'는 온갖 협박을 다채로운 손짓발짓으로 그것도 다소 위협적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문 앞을 가로막고 선 하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하딘은 거기에 처음부터 세워져 있던 석상처럼 굴었다.

그 앞에서 한껏 긴장해서 굳었던 줄리엣의 어깨가 풀이 죽었다.

고개를 푹 숙인 줄리엣의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절로 애처로워지게 했다.

하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줄리엣이 그냥 돌아간다고 할까 봐조마조마했다.

'저놈이 진짜 미쳤나!'

줄리엣은 조금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차분히 물었다.

“많이 .… 안 좋은가요?”

그러자 하딘의 눈썹이 꿈틀했다. 돌덩이 같은 얼굴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림자 같은 호위 기사는 그녀의 어깨너머에서 눈을 부라려 대는 한 무리의 가신을 힐끔 보고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 주었다.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 *

달칵.

두꺼운 커튼을 내려 뒀는지 침실 안은 꽤 어두웠다.

줄리엣은 조심스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질리도록 익숙한 침실의 구조라 어둠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줄리엣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루체른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와 레녹스가 그 얘기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긴 카우치에 길게 누워 있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큰 안도감이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대체 이 남자에게 있어 침대의 사용법이란 뭘까?

레녹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조용히 잠든 채였다. 겉보기에는 큰 부상이 없어 보여서 줄리엣은 조금 안도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위로 젖히고 있었기 때문에 어둑한 실내에서도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림자가 드리우다 보니 음영이 더욱 깊어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줄리엣은 카우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만한 턱 끝, 도드라진 목선, 벌어진 가운 덕분에 훤히 드러난 가슴팍까지. 그의 몸 선은 결코 가늘지 않은데도 묘하게 유혹적이었다.

줄리엣은 잠시 망설였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몸 어딘가에 상처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몸을 건드리면 그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다.

고민하던 줄리엣의 눈에 그새 조금 길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새카만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이렇게 조용히 잠들어 있을 때면 남자는 오직 흑과 백으로만 그려낸 그림 같다.

줄리엣이 그의 얼굴을 좋아했다는 말은 적어도 빈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전생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이 얼굴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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