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3화 (80/229)

83화.

*

"아가씨의 마력의 양에 변화는 없습니다.”

에셀리드는 엄지와 검지 사이를 살짝 벌렸다.

“예나 지금이나 요만큼 차 있기는 마찬가지군요."

찰랑찰랑.

에셀리드가 손등을 가로로 흔드는 시늉을 했다.

줄리엣은 의사들이 원인을 밝혀 내지 못하자 바로 에셀리드를 찾았다.

하지만 에셀리드의 대답도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 줄리엣 모나드의 마력양자체는 특출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키는 대로 나비를 불러내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줄리엣은 자유자재로 나비들을 부렸었다.

에셀리드가 흥미를 갖고 지금껏 그녀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가 요행이었고, 줄리엣이 나비를 잃은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줄리엣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하 감옥에 있을 때 제바스티안에게서 소울스톤을 빼앗았거든요.”

줄리엣은 간략히 지하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법황 제바스티안이 부리던 인형들과 그의 누이의 유해로 만들어진 소울스톤까지.

"흠, 그게 원인일지도 모르겠군요.”

“제노비아의 소울스톤 때문에요?"

“예, 마력과 신성력은 상극이니까요.”

“내가 신성력을 직접 쓴 게 아닌데도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에셀리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골몰했다.

“그 제노비아라는 소녀와 소울 스톤에 대해 좀 더 찾아보도록 하지요.”

아마 그 정도 천재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분명 기록이 남아 있을 거라고, 에셀리드가 첨언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씩웃었다.

"루체른 한복판에서 정령을 불러낸 건 아가씨가 유일하실 겁니다.”

에셀리드는 계속 이 말을 하면서 히죽거렸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에셀리드는 수천 마리의 나비떼가 루체른 상공으로 치솟아 오르던 그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에셀리드, 방금 굉장히 사악한 마법사 같았어요.

“통쾌한 걸 어쩌겠습니까?”

에셀리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신전과 마탑의 오랜 대립 관계는 유명했다.

“이건 적진 한복판에 깃발을 꽂은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물론 줄리엣은 정령사지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성력의 성지에서 마력을 쓴 건 맞지 않은가.

에셀리드는 루체른 한복판에서 초대형 마법을 시현할 수만 있다면 억만금이라도 지불할 만한 미친 마법사를 많이 알고 있었다.

“아가씨가 마탑을 방문하시면 맨발로 달려 나와 귀빈 대접할 마스터들이 줄을 설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건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의 능력이 있는 정령사가 아닐까요?”

더 이상 나비를 불러낼 수 없는 이름만 정령사가 아니라.

줄리엣이 다소 냉담하게 말하자 에셀리드가 멈칫했다.

"아…….”

“왜요?”

에셀리드는 조금 난처한 듯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 그게 말입니다.....….”

* * *

줄리엣은 에셀리드와 함께 저택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삐악?”

엄연한 손님 자격으로 응접실 안락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벽난로 앞에 몸을 말고 있던 오닉스는 줄리엣을 발견하자마자 쪼르르 달려왔다.

폴짝폴짝 날뛰며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빡!”

일주일 만에 본 오닉스는 확실히 좀 자라 있었다.

이제 한 손으로 안는 것은 조금 버거울 정도였다.

줄리엣은 오닉스를 무릎 위로 올려 주었다. 날개를 파닥거리기는 했지만 아직 날지는 못했다.

"아직 아가라서 그런가? 너무 작아서?”

“줄리엣, 그걸 보통 '내 새끼 작아 병'이라고 합니다.”

“그럼 가르쳐 줄 만한 어른 용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수백 년 만에 처음 나타난 용이라 그런 걸까?

오닉스를 처음 발견한 게 오랫동안 방치된 던전이었단 것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태어난 걸지도 몰라..'

정작 오닉스는 태평하게 줄리엣의 품에 안겨서 좋다고 골골거렸다.

'바보, 남의 속도 모르고.'

에셀리드는 한때 오닉스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만큼 더 빨리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저들도 저게 위대한 용이 아니라 날개 달린 고양이보다 나은 게 없다는 걸 곧 알게 될 테니까요.”

에셀리드가 털어놓은 사정은 그랬다.

공교롭게도 루체른의 테라리움이 박살 나는 현장에서 드래곤을 봤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줄리엣은 조금 발끈했다.

“헛소문일지도 모르잖아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본 바로는 로이가 데리고 있던데요.”

에셀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어떻게 밖으로 나온 걸까요?”

줄리엣은 무릎 위에서 골골대던 오닉스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게요, 정말. 밖으로 어떻게 나왔을까요?"

"삐야……?”

오닉스가 갑자기 발라당 배를 보이며 어린양을 했다.

“아직은 뜬구름 잡는 헛소문 취급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목격담이 퍼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요는, 굳이 나비를 부리지 못해도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단 뜻이었다.

“날개가 장식일 줄이야…….”

에셀리드는 어쩐지 배신감에 찬 눈으로 오닉스를 한참 쳐다보았다.

***

저녁 식사 직전, 줄리엣은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쨍그랑.

은 식기가 그릇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공작님이 수도에 있어요?”

“네. 모르셨습니까?"

그릇을 나르며 식사 준비를 돕던 에셀리드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레녹스 칼라일은 대개 북부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수도에 머무르는 것은 1년 중 며칠 되지도 않았다.

“왜요?”

“저야 잘 모르지만 사람들은 난리이던걸요. 꽤 위독한가 봅니다.

죽느니 마느니 하고……. 줄리엣?”

그러자 줄리엣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걸 보고서야 에셀리드는 아차싶었다. 주인 아가씨와 그 공작이 7년간 연인 사이었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괜찮으세요?”

"네. 잠시 좀.… 실례할게요."

줄리엣은 재빨리 계단참을 뛰어올라가다 잠시 비틀거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멍청이!’

결계 한 장 깨고 까마득히 일주일을 앓아누워 있었는데 그는 어떠했겠는가.

줄리엣은 재빨리 방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단추가 잘 끼워지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대는 통에 머리가 울리고 정신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그가 죽으면 어떡하지.'

설마.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이상 그런 짓을 벌이고 몸이 멀쩡히 남아날 리 없잖아…….’

“줄리엣?”

“로이!”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줄리엣은 로이와 마주쳤다.

“저, 나 지금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로이, 내가….…."

로이는 창백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줄리엣의 팔을 붙잡고 눈을 맞추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줄리엣.”

“네?”

“진정해요.제가 데려다줄까요?”

"...…네."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모나 드 백작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줄리엣을 맞은편 자리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로이가 불쑥 물었다.

“그 얘기 때문에 가는 건가요?"

“네?”

그 얘기? 그게 뭐지?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로이는 눈을 깜빡이다 차분히 말했다.

“기억 안 나요? 그때, 루체른의 제단에서 줄리엣이 했던 이야기요.”

"레녹스, 신전과 반목하면 안돼요.”

맞아. 그 이야기가 있었다.

'아.'

줄리엣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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