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2화 (79/229)

82화.

*

“줄리엣!”

"야! 너 괜찮아?”

뒤이어 로이와 테오, 에셀리드등이 줄리엣에게 달려왔다. 심지어 어찌된 영문인지 테오는 한 팔에 철창살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몹시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앞뒤로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테라리움 반대편으로 걸었다.

여신체는 레녹스가 아흔여덟 개의 결계를 부수기 시작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지만 줄리엣은 가교 아래의 처참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뭘 엉망으로 만든 걸까.'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아직까지 달리아는 나타나지 않았고, 첫 번째 삶과는 너무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줄리엣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전생의 기억에서 신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예언의 소녀 달리아.

달리아는 최악이었던 북부와 신전의 관계를 화합시켰다. 신전의 보물인 예언의 소녀가 북부의 공작과 사랑에 빠진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북부와 신전은 착실히 악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윽!" ”

갑자기 줄리엣은 온몸의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조심해요!”

견디기 힘든 통증에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자 뒤따라오던 로이가 그녀를 받쳤다.

“줄리엣, 괜찮은 겁니까?"

걱정스러운 듯 로이가 물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대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파..'

자꾸만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줄리엣?”

"커헉.”

왈칵, 속에서 뭔가 뜨거운 덩어리가 흘러나왔다. 입 안에서 쇠비린내가 났다. 손으로 틀어막아봤자 역부족이었다.

“레녹스, 전하."

“줄리엣!”

“신전과 반목하면 안 돼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줄리엣은 연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숨을 헐떡거리다가 레녹스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아파..'

줄리엣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가만있어.”

“그들의 힘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요.”

“말하지 말고.”

“그러니까 드릴 말이 있어요.”

몸에 오한이 들어 덜덜 떨리고 눈앞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들어 주셨으면 해요.”

“젠장, 그 입 다물어!”

“레녹스, 내가”

입을 열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두근두근 맥박이 뛰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미안해요.”

“나 똑바로 봐. 자꾸 눈 감지 말고 정신 좀 차려!”

아.

줄리엣은 처음으로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계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오, 아가씨."

하필 이럴 때 힐데가르트의 말이 떠오를 건 뭐람.

"주제 넘는 짓을 하면 벌을 받게 될 거요."

‘나 벌 받나 봐.' 신성력을 다룰 줄 모르는 인간이 주제넘은 짓을 벌이다간 저주를 받게 될 거라고.

아무래도 그건 비유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줄리엣?”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졌다.

줄리엣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녀를 어떻게든 깨워 보려 소리 지르는 목소리들이었다.

“줄리엣!”

*

간만에 줄리엣은 기분 좋은 꿈을 꿨다. 반복되는 악몽도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도 아니었다.

졸졸졸 흘러가는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줄리엣은 작은 조각배 위에 앉아 있었다.

배를 누가 젓는지,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줄리엣은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뱃머리에 앉아 물속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하얀색 물고기 두 마리를 만져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줄리엣은 손을 조금 더 길게 뻗었다. 물고기에 슬쩍 손끝이 닿은 순간, 줄리엣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낯익은 천장이었다.

“..… 내 방이네.”

줄리엣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있는 곳은 동부의 르바탄 저택도 아니고, 북부의 공작성도 아니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모나드 백작가의 저택이었다.

어릴 때부터 쓰던 침대와 낡은 인형들까지 그대로였다. 열린 창문으로 흰 커튼이 나부꼈다.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몸도 가뿐했다.

'이상하다.'

줄리엣은 자신의 손등과 손바닥을 번갈아 가면서 유심히 살폈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딱히 뭐가 이상한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뭐가 달라졌지?

새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 줄리엣?”

“아, 로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로이가 문을 짚고 서 있었다. 평범한 셔츠와 바지가 무척 잘 어울렸다.

문가 옆 응접실 쪽으로 다가간 줄리엣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응접실 안에서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는 빨간 머리를 발견했다.

“안녕, 테오.”

“뭐? 너 누구……. 너!"

으악!

쿠당탕탕!

습관대로 다리를 테이블에 올린채 의자를 뒤로 기대고 있던 테오가 뒤로 넘어갔다.

테오는 체면도 잊고 넘어진 것도 잊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줄리엣을 향해 마구 삿대질했다.

“야! 너 지금……. 그런 안녕이란 말이 나오냐!"

테오가 온 백작저 사람들의 이른 아침잠을 깨운 것 같았다.

조용했던 저택이 금방 북적북적해졌다.

각자의 방에서 나와 줄리엣의 방문 앞을 한 번씩 보고 갔다.

“줄리엣 양.”

에셀리드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돌아와서 기쁩니다."

“네.”

줄리엣은 아직 잠이 덜 깨서 좀 멍한 상태로 말했다.

“근데 있잖아, 테오."

"뭐.”

"테오, 너 목소리 예쁘네."

놀라서 잠시 굳어 있던 테오가 입을 딱 벌린 채로 외쳤다.

“....…주치의!”

“쟤 머리를 다친 게 확실하다니까?"

테오는 옆에서 종알거리다가 결국 쫓겨났다.

"아니, 쟤가 나보고 뭐랬는지 알아? 내 목소리가! 예쁘……!”

한참을 시끄럽게 굴던 그는 줄리엣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에 조용히 방을 떠났다.

“세상이 이렇게 조용한 줄, 오랜만에 알았네.”

줄리엣은 아무것도 없는 빈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 대는 악의 어린 목소리도, 지끈거리는 두통도 없었다.

그리고…… 나비들도 사라졌다.

잠깐 까무러쳤다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못마땅한 기색의 리오넬 르바탄이 줄리엣에게 면박을 줬다.

“괜찮다는 녀석이 일주일을 내리 자?"

‘하긴, 정말 잠깐 까무러쳤을 뿐이라면 루체른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수도에 와 있을 수도 없겠구나.' 줄리엣이 깨어나자마자 리오넬은 대륙에서 가장 저명하다는 의사 서른 명을 줄지어 대령하게 했다.

“이명이…… 사라졌다굽쇼?"

"네."

“허어 그것참…… 드문 케이스로군요.”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있었지만 의사들은 진땀을 흘리며 등 뒤를 힐끔거렸다.

전설적인 암흑가의 거물, 리오넬 르바탄이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등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녀분…… 아니, 손녀님께선 건강하십니다.”

“건강하단 애가 픽픽 쓰러져? ?

지금 저 얼굴을 보고도 건강하단 말이 나오나?”

“그, 그렇지만……."

“저어, 건강하시긴 한데 심리적인 문제가 ....….”

“심리적? 지금 우리 애가 심리적으로 불안하다는 건가! 아니 그럼 원인을 찾아야지!”

"어, 어르신! 죽여 주십시오!"

“떼잉!”

보통 이런 패턴의 반복이라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명이 사라지다니. 그럼 잘된 거 아니냐?'

줄리엣을 진찰한 의사들은 열이면 열, 모두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지. 보통은 그럴 터였다.

줄리엣은 습관적으로 목에 걸린 열쇠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잃어버렸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미친 가짜 법황은 정리 정돈을 잘하는 나쁜 놈이었다.

놈이 가져갔던 모든 소지품은 무사히 돌려받았다.

겉보기로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이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와 함께 나비들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능력이 사라지기도 하나?'

나비들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줄리엣은 열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성적인 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줄리엣은 침상 옆에 앉은 외할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리오넬 르바탄, 적왕.

암흑가의 수장.

“왜 그렇게 보느냐?"

즉, 제국의 적.

“그런데 할아버지, 괜찮으신 거예요?”

"음?”

리오넬 르바탄은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줄리엣은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가 헷갈렸다.

'곧 잡혀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의 의미인지, 아니면 '그깟 황제 따위는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의 의미인지.

"이왕이면 후자가 좋으련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게냐? 뭐 필요한 거 있어?"

"아, 그냥요. 아무것도……. 에취!”

열린 창문 때문인지 순간 재채기가 나왔다.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웃던 리오넬 르바탄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순식간에 근엄한 얼굴이 된 리오넬 르바탄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주치의!”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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