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1화 (78/229)

81화.

*

키아아아아!

상공에 나타난 새하얀 여신체는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댔다.

“으윽!”

"끄으흑!”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귀만 간신히 막고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지옥의 소리가 이럴까 싶을 정도로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괴성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제단 근처에 서 있던 사제들뿐이었다.

그리고 동그란 원형 제단의 계단에 힘없이 기대어 있던 줄리엣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속이 메스껍고 어질어질하긴 했지만 그 소리를 듣고 쓰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줄리엣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쩡히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제인 걸 보아하니,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괜찮은 것 같았다.

'소울스톤 때문인가?'

줄리엣은 힐끔 손바닥 안에 움켜쥔 소울스톤을 곁눈질했다.

제노비아의 보랏빛 소울스톤.

이걸 지니고 있는 이상, 그녀에게도 지금은 신성력이 있는 셈이니 저 여신체의 등장에도 멀쩡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게

정말 신이라고......?

저건 신이라기보다는…….

뭔가, 마수에 가까운 생명체가 아닌가.

줄리엣은 소울스톤을 움켜쥐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아아아아!

루체른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울만큼 거대한 신체는 아름다웠지만 쇠사슬에 칭칭 묶여 있었다.

“서, 성하를 안으로 모셔라!"

당황한 솔론 추기경이 외쳤다.

사제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제바스티안의 몸뚱이를 마구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자, 잠깐! 솔론 추기경!”

그때 길리엄 추기경이 솔론 추기경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걸 좀 보십시오!”

길리엄 추기경은 조금 전 줄리 엣이 제바스티안을 끌고 나타났던 정확히 그 위치, 제단 한가운데를 보라고 가리켰다.

“저분은…….”

“힐데 님?”

“힐데가르트 성하?”

“힐데가르트 성하!"

“그런 말도 안 되는!"

한 장소에 두 명의 법황이라니.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그럴 리가 있나! 힐데 가르트 님은 돌아가셨어! 3년 전에!”

솔론 추기경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틀림없이 힐데가르트님이오!"

길리엄 추기경은 판단을 내리곤 제단 한복판으로 뛰어 내려갔다.

“힐데가르트 성하!”

솔론 추기경은 그 모습을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보았다.

그는 연신 중얼중얼했다.

“히…… 힐데가르트가 살아 있었다고? 제바스티안이 처치한 것 아니었나?”

'성공했구나.' 줄리엣이 멍하니 생각했다.

줄리엣은 만에 하나 그녀가 실패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했다.

미리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힐데가르트를 풀어 주고 당부했었다. 그녀가 실패하더라도 탈출 하라고.

힐데가르트가 말하길, 일단 줄리엣이 탈출에 성공하면 좌표의 기록이 남기 때문에 힐데가르트역시 뒤따라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했다.

신성력을 써 본 적 없는 줄리엣으로서는 자세한 원리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힐데가르트는 전대 법황이었고, 그럴 만한 신성력의 소유자였으니까.

* * *

“추기경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솔론 추기경을 따르는 사제들이 외쳤다.

"이, 이런 빌어먹을 …….”

졸지에 책임자가 되어 버린 솔론 추기경은 제단 위에서 연신 두리번거렸다.

길리엄 추기경과 그의 사제들이 전대 법황인 힐데가르트를 구출해 급히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면 구경하러 모여든 시민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일단, 저 여신체를 돌려보내려면 법황의 힘이 필요할 텐데'지금 법황이었던 제바스티안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솔론은 눈치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자답게 재빨리 눈을 굴렸다.

상황이 영 좋지 못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살아 돌아온 이상,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제바스티안의 악행이 죄다 밝혀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솔론은 꼼짝없이 한패로 몰려서 처형당하게 될지 모른다.

그걸 무마하려면 대신 얻어맞을 희생양이 필요했다.

제바스티안의 죄를 최대한 가리고 우매한 군중의 시선을 분산시킬 만한, 딱 쓰기 좋은 마녀.

솔론 추기경의 바로 앞에 마침 그런 여자가 있었다.

“여, 여신께서 분노하셨다!"

뭐?

바닥에 쓰러졌던 줄리엣은 겨우 고개를 치켜들었다.

“법황 시해자다!”

“이 계집 때문에 여신께서 분노하셨다!”

솔론 추기경은 손가락질하는 걸로도 모자라, 직접 계단을 뛰어올라와 줄리엣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렸다.

“법황 시해! 법황 시해에 여신께서 분노하셨다!”

아, 젠장.

저항할 기운도 없어 줄리엣은 솔론 추기경이 흔드는 대로 이리 저리 흔들렸다.

그때였다.

“법황 시해! 이 계집이 성하를……!”

쾅!

“뭐, 뭐야?”

한 번 더.

쾅! 쾅!

솔론 추기경은 테라리움 전체가 울리는 진동 때문에 줄리엣을 놓치고 비틀거렸다.

사제들은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도, 도망쳐!”

“피해!"

끼이이이. 쿵!

제단의 반대편, 건물을 지지하의 하고 있던 기둥 하나가 제단 위로 쓰러졌다.

마치 가교처럼.

자욱한 흙먼지가 가시고 부연안개 너머에서 기둥 위에 오만하게 올라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손 치워.”

칼라일 공작이었다.

**

“이, 무….… 무슨…..…!”

저런 괴물이! 기둥을 쓰러뜨리다니.

솔론 추기경은 하얗게 질렸다.

그리곤 제 앞에 쓰러진 여자와 무너진 기둥을 가교 삼아 점점 다가오는 칼라일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솔론은 번개같이 직감했다.

'난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왕 죽을 목숨, 발악이라도 해보자는 게 솔론의 심산이었다.

솔론 추기경은 재빨리 쓰러진 줄리엣을 인질 삼아 끌고 뒤로 빠지며 사제들에게 명령했다.

"바, 방어진!”

“방어진 갖춘다!”

“충격에 대비해라!”

루체른의 사제들은 재빨리 각자 위치에서 방어 결계를 펼쳤다.

신관들 특유의 희푸른 진들이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그러자 천천히 걸어 내려오던 레녹스 칼라일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

뭘 하는 거지? 사제들이 의아하게 그를 보던 그 순간.

펑!

“아, 아니!”

“어, 어떻게……!"

"커헉!"

별안간 서 있던 고위 사제 몇 사람이 피를 토하며 연달아 쓰러졌다.

줄리엣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술식이 깨지자 저주를 건 사제들에게 그 여파가 역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신성력으로는 손꼽히는 정예의 의신관들이었는데도.

펑! 펑! 펑!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결계가 터져 나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결계가 하나씩 깨져 나갈 때마다 그 충격파로 인해 제단의 돌바닥이 깊이 됐다.

사제 몇몇이 재빨리 공격 계열의 신성 마법을 준비했으나 그에게 닿지도 못했다.

쾅!

펑펑펑!

루체른의 자랑인 아흔여덟 개의 결계들이 차례로 하나씩 깨져 나가는 가운데, 그가 입은 유일한 상처는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튀어 오르면서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간 것뿐이었다.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사방의 모든 것이 폭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상처 하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제외하곤 지나치게 멀쩡했다.

“줄리엣.”

아수라장이 된 주변 상황과는 정반대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평온했다.

“이리 와.”

자연스레 내밀어진 손을 보고 줄리엣은 잠시 갈등했다.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이 손을 잡으면, 나는, 레녹스는…….’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

그의 손을 잡고 가교 위로 올라 선 줄리엣은 중심을 잡느라 조금 비틀거리긴 했다. 그러나 크고 단단한 손이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잡았다.

"고, 공작!”

뒤에서 벌벌 떠는 사제들이 뻔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무사하지 못할 거요!"

외치는 소리와는 달리, 칼라일공작의 무심한 시선이 닿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 것은 물론이다.

그 광경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레녹스가 말했다.

“내려가지.”

줄리엣은 비척비척 중심을 잡고 조금씩 가교를 건너갔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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