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0화 (77/229)

80화.

*

"르, 르바탄 씨. 아니, 어르신 일단 진정하시고…….”

“지금 진정이라고 했나?"

리오넬 르바탄은 지극히 차분한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생각해 보게. 자네들이라면 말이야.”

추기경들은 두려움에 벌벌 떠는 한편 리오넬 르바탄의 등 뒤를 힐끔거렸다.

끼이이.

“수십 년 만에 겨우 만난 내 금쪽같은 손녀딸을 잃어버렸다는데.”

리오넬 르바탄의 뒤를 따라 들어온 그의 수하들이 천천히 문을 닫고 있던 것이다.

“내가 이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서서히 닫히는 문과 품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눈앞의 리오넬 르바탄, 둘 중 뭐가 더 두려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리오넬 르바탄이 담담한 어조로 읊조렸다.

“내 고향에서 진정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겠군.”

그때였다.

투쾅!

온 법황청의 유리창에 시야가 명멸할 정도로 눈부신 빛기둥이 비쳤다.

**

'제발, 제발.’

줄리엣은 아흔여덟 개의 방어 결계를 모두 뚫을 생각은 없었다.

그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사육제 기간 중 심심했던 에셀리드는 몇 가지 실험을 한 끝에 아흔여덟 개의 결계가 겹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보를 만들 듯 누덕누덕 기워져 있는 형태라는 것을 줄리엣에게 알려 줬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그저 딱 한군데, 제바스티안이 인형의 집의 입구와 연결해 둔 결계만을 깨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직관적인 선택이었고, 옳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간단명료한 계획이었다.

하나, 소울스톤을 강탈한 다음.

둘, 그걸로 신성력 결계를 깨뜨리고 나비들을 불러낸다.

셋, 가짜 법황을 정신 조작해서 여기서 나간다.

그러나 줄리엣이 간과한 것은 마지막 대목이었다.

하필이면 제바스티안이 설정해둔 좌표가, 인형의 집으로 가는 통로의 출입구가 의식 준비가 한 창인 제단 한복판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긴, 법황쯤 되면 제단 한복판에 아무 때나 들락거려도 의심을 사지 않았겠지만.

“저게 뭐야…?"

신관들뿐 아니라 건물 안에서 줄리엣을 찾아다니던 레녹스와 로이, 감옥에 갇혀 있던 테오와 에셀리드 역시 똑똑히 보았다.

투쾅!

눈부신 빛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루체른의 정중앙, 제단 한복판을 꿰뚫는 것을.

*

투쾅!

마치 그 부분에만 거대한 빛기 둥이 떨어진 것처럼 착각할 뻔했다.

“저, 저게 무슨……!"

테라리움의 관리자인 사제들마저도 난생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아앗!”

이게 무슨 현상인가 가장 먼저 이해하고 벌떡 일어난 것은 테오를 감옥에서 빼내 보려 고군분투하던 에셀리드였다.

“결계가 뚫렸다!”

루체른의 아흔여덟 장의 결계 중 하나가 뚫린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그보다 더욱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파라라락!

정확히 조금 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빛기둥이 내려왔던 그 동그란 영역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푸른 나비 떼가 일제히 솟구쳤다.

"마, 맙소사!”

그런 장면은 에셀리드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장관이었다.

마치 하늘과 땅을 잇는 듯, 수천 마리의 푸른 나비 떼들이 거세게 날아올랐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푸른 빛줄기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비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진 다음 순간, 제단 정가운데 숨을 몰아쉬는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줄……!”

“줄리엣!”

그리고 여자의 옆에는 아무래도 기절한 듯 보이는 남자의 몸뚱어리 하나도 널려 있었다.

'성공…… 했나?

줄리엣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필 제례 준비가 한창인 제단한가운데라 주변이 거의 새하얘다.

머리가 핑핑 돌고 시야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저게……!”

“법황 성하!”

“제바스티안 성하!”

쓰러진 남자의 정체를 알아챈사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제단으로 내려갔다.

"이, 이럴 수가!”

“법황 성하께서 서거하셨다!”

“위급하시다!"

“치료 사제! 빨리!"

아주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십수 명의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가 기절한 제바스티안을 계단 위로 끌어올렸다.

덩달아 그와 함께 쓰러져 있던 줄리엣 역시 계단 위로 끌어올려졌다.

“법황 성하께서는 서거하셨나?”

아냐.

'죽이진 않았다고.'

줄리엣은 대답해 줄 기운도 없었다.

“뭐, 뭣?! 법황께서 돌아가셔?"

“그렇다면 법황 시해!"

'아, 안 죽었다고!’ 제단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제바스티안의 몰골이 꽤 시체 같긴 하지만, 저거야 정신 조작 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하!”

“무사하십니까!”

물론 의식은 없을 테지만.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솔론 추기경과 길리엄 추기경등, 여러 명의 사제들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솔론 님! 저, 저것 좀 보십쇼!"

“수반이……!”

찰랑찰랑.

제사에 쓰이는 물이 가득 담긴 수반이 신비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 아니 왜………?”

솔론 추기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바스티안이 쓰러져 이 쓰러져 있는데, 법황이 정신을 못 차리는데 어떻게 제사가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구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눈부시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루체른 상공에 나타났다.

“저, 저런……!”

“젠장, 저건 또 뭐야!"

“방어진!”

“충격에 대비해라!”

“충격에 대비해라!”

루체른의 사제들은 재빨리 각자 위치에서 방어 결계를 펼쳤다.

신관들 특유의 희푸른 진들이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 오오!”

“서, 성체가……!”

구우우우웅-

장엄한 진동이 테라리움 전체를 뒤흔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허공의 눈부신 빛 무리에서 뭔가 하얗고 거대한 물체가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새하얀 대리석 흉상 비슷한 것이었다.

긴 머리칼이 나부끼고 하늘을 을온통 뒤덮을 정도로 웅대하며 거대한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쇠사슬…?'

줄리엣은 왠지 이유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사제들과 사람들은 기뻐외치는 중이었다.

“성체가 나타났다!”

“여신께서 우리를 굽어 살피려 오셨다!”

그러자 법황청 밖에 모여 있던 인파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여신이시다!"

"이프리트 여신이셔!"

“와! 법황 성하께서 여신을 소환하셨다!”

“여신께서 루체른을 굽어 살피신다!”

군중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

감겨 있던 여신체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것은 고개를 치켜 들더니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키아아아아!

줄리엣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 큰일 났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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