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77화 (74/229)

77화.

두 사람은 위에서 들려오는 그 기이한 소리가 지나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줄리엣은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소리의 정체를 물었다.

“저 소리는 뭐죠?”

“제바스티안의 감시 인형들이지."

“감시 인형이요?”

“운이 좋네, 아가씨. 아직 그 인형들과 마주치지 않은 모양이지?"

힐데가르트가 즐거운 듯 껄껄웃었다.

줄리엣은 의아했다.

제바스티안의 인형들은 진짜 인물을 대신해 유언도 하고 죽음을 가장할 만큼 정교한데, 왜 여태까지 제바스티안의 인형들과 마주치지 않아 운이 좋다'고 하는 걸까?

“그건 보면 알게 될 거요. 악몽꾸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아가씨 아니에요. 제 이름은 줄리엣이에요.”

“줄리엣. 알겠소.”

다소 불퉁하게 자기소개를 한 줄리엣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종류의 신성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사람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 낸다니…."

그런 게 가능한 얘기인가?

“법황 성하, 여쭤볼 게 있어요.”

“으음? 뭐든 물어보시오."

“어린 시절의 제노비아 남매를 알았다고 하셨죠?”

“그랬지.”

“제노비아의 신성력은 어떤 수준이었는데요?"

“그 애는 타고난 천재였지. 그 외엔 설명이 불가하오."

힐데가르트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제바스티안 못지않게 힐데가르트 역시 제노비아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다소 장난스레 싱긋 웃었다.

“법황 성하의 신성력보다도요?”

“암. 어린애들은 불안정해도 타고난 재능이 흐려지는 법이 없다 오.”

“그럼 제바스티안도 제노비아처럼 신성력을 타고난 아이였나요?"

그 질문에 힐데가르트는 다소 애매하게 웃었다. 그녀는 줄리엣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미 짐작하는 눈치였다.

“글쎄. 하지만 아가씨…… 줄리 엣도 알다시피, 신성력이란 뒤늦게 개화하는 경우도 많소. 마력과는 또 다른 특징이지.”

“화재 사고로 죽었다면, 제노비아의 시신도 남지 않았겠네요?"

“그렇소.”

“그렇군요. 알겠어요."

줄리엣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리를 쭉 폈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필요한 것은 다 물어보았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 만요.”

줄리엣은 다리를 두드리며 여상히 물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으세요?"

*

“무슨 일입니까?"

제바스티안은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왔다.

“아, 법황 성하.”

절절매고 있던 사제들이 그를 보고 반색했다.

“아니! 이 미친 놈들아! 사람이 없어졌다니까?”

제바스티안은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말투가 거칠고 다혈질인 이 빨간 머리는 유명한 망나니였다.

그 유명한 리오넬 르바탄의 손자라는 놈이었는데, 매 해 르바탄의 막대한 후원금을 가져오는 귀빈이기도 했다.

'성가신 놈.’

제바스티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놈은 비아와 함께 왔다. 남매라고 들었지만, 가당치도 않다.

이렇게 천박한 놈이 고결하고 아름다운 제노비아의 핏줄일 리가.

“무슨 일인지 찬찬히 자초지종을 말씀해 보세요."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이 쪽지한 장 달랑 남기고 사라졌다고!

어? 이게 말이 돼?"

제바스티안은 쪽지를 받아 들었다.

정갈한 필체로 적힌 쪽지는 간략했다.

잠시 머리가 아파서 떠나겠다, 나중에 연락하겠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래에는 줄리엣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제바스티안은 그 쪽지를 처음보는 것처럼 말했다.

“글쎄요. 누이께서 떠나신 것 같은데요. 문제가 있나요?”

“뭐? 당연히 문제가 있지!”

테오가 버럭 화를 냈다.

“이 쪽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사라졌는데 얘 짐 가방만 없어지고! 얘를 태웠다는 짐마차도 목격자도 없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제바스티안은 빙긋 웃었다.

“진정하세요, 형제님. 모두 여신의 안배로 일어난 일입니다. 누나분은 자유를 찾아 떠나신 겁니다.”

“야!”

테오가 뒤에서 바락 소리 질렀지만 제바스티안은 더 이상 들어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빙글 돌아가 떠나 버렸다.

“형제님! 아무리 형제님이라도 성하께 그런 무례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사제들 여럿이 테오 르바탄에게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열 열 받아 죽겠는 데…!”

씨근거리던 테오는 멈칫했다.

근데 저 새끼 방금 줄리엣이 '누나'라고 말했나? 줄리엣 걔가 왜 내 누나야?

***

제바스티안은 결계를 열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짜증스러웠던 기분은 침실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줄리엣을 발견한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약을 다소 많이 투약했는지 그녀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한눈에 알아봤지."

길리엄이 가져온 조각상을 마주한 순간부터.

이것이 여신의 안배라고 제바스티안은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각상의 모델이 되었다는 여자는 제바스티안의 누이, 제노비아와 완벽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제바스티안의 누이, 제노비아는 연갈색 머리칼과 상냥한 보랏빛 눈을 가진 소녀였다.

눈 색을 제외하면 죽은 제노비아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다정하게 머리를 빗어 내리던 제바스티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 마, 비아. 곧 완벽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는 줄리엣의 눈꺼풀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안구만 바꾸면…….”

제바스티안은 흡족한 얼굴로 가져온 상자를 향해 돌아섰다.

안에는 그가 다년간 수집해 보관해 온 귀한 눈이 들어 있었다.

생전의 제노비아와 꼭 같은 색의 눈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다시 완벽한 제 노비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쁜 마음에 서둘러 상자를 여는 순간.

푹.

"......?"

제바스티안은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주춤주춤 뒤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뒤를 돌아본 그는 한 손에 주사기를 들고 선 여자를 발견했다.

"어휴.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제노비아가, 아니 줄리엣이 투덜거렸다.

**

"삐약?”

가장 먼저 이상한 기류를 알아챈 것은 새끼 용이었다.

오닉스는 텅 빈방 안에서 반짝 눈을 떴다. 새끼 용은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팠으므로, 그건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닉스는 푹 자고 일어나 팔팔했다.

이리저리 뒹굴고, 가지고 놀라고 넣어 준 솜 인형을 앙앙 물어 뜯기도 하고, 그러나 새끼 용은 금방 심심해졌다.

언제쯤 올까?

침실 안을 빙글빙글 돌다가 아기 용은 문 바로 앞에 찰파닥 배를 깔고 드러누웠다.

기 용문 찰

“착하지, 닉스,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돼.”

오닉스를 상자에 밀어 넣으면서 줄리엣이 그렇게 말했었다.

눈치 빠른 새끼 용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버리고 갈까 봐 몰래 짐에 숨어서 따라온 건데!

방 안에만 숨어 있는 건 생각보다 지루한 일이었다.

뚜벅뚜벅.

“?”

문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리자 놀란 아기 용은 얼른 상자 안으로 쏙 몸을 숨겼다.

오닉스가 후다닥 상자로 들어가기 무섭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재잘재잘 말소리가 들렸다.

오닉스는 상자 안에 들어가 눈만 빼꼼 보일 만큼만 고개를 내밀고 밖을 구경했다.

세탁물을 가지러 온 하급 사제수련생들이었다.

침대의 시트를 새 걸로 교체하면서 어린 소녀들은 저희들끼리 재잘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 화관 따위가 그렇게 비싸게 팔린단 말이야?"

"응. 법황 성하의 축성을 받았다고만 하면 얼마든지 팔린대.”

“화관이라면 아래층 제단 입구에 얼마든지 널려 있잖아?"

“그래. 그러니까 그거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부르는 게 값이야.”

“어휴. 하지만 무슨 수로 안 들키고 나가?"

오닉스는 ‘축성.'같이 어려운 단어는 못 알아들었지만 '화관'은 뭔지 알았다.

전에 줄리엣이 가지고 왔던 물건이었다.

노란 꽃들을 동그란 모양으로 엮은 것. 새끼 용은 자신의 영리 함에 조금 우쭐해졌다.

줄리엣이 알았다면 칭찬해 줬을 텐데!

화관의 꽃. 노랗고 하얀 꽃송이는 참 맛이 없었다.

달콤한 향에 홀려서 뜯어먹었다가 뱉으니 주인의 부하3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맛없는 걸 머리에 얹기를 좋아하더라?

오닉스의 작은 머리가 갸웃 기울어졌다.

수련생들이 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도 새끼 용은 상자 안에서 데구루루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주인도 맛없는 꽃을 좋아했지?

그리고 그 '화관'이란 것도.

오닉스는 화관을 보고 활짝 웃으며 칭찬해 줄 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쁘다, 예쁘다 해 주고 운 좋으면 맛있는 걸 줄지도 몰라. ‘사과’라든지.

“!”

새끼 용은 숨어 있던 상자를 박차고 기운차게 튀어나왔다.

대화에 정신이 팔린 수련생들은 이미 청소를 마친 방의 문단속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오닉스는 손잡이를 머리로 톡미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넓은 복도로 빠져나왔지만 오닉스의 우선순위는 분명했다.

잊혀진 줄리엣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