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색하게 대화가 끊기자 줄리엣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면 제 일행들이 구하러 올…….”
줄리엣의 말에 힘이 없어졌다.
조금 전과 같은 불안함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과연 자신을 찾으러 올까?
한 사람이라도 그녀가 없어진걸 알아채고, 찾으러 와 줄까?
그런 줄리엣의 생각을 읽기라도한 듯 힐데가르트가 불쑥 말했다.
“소용없소.”
“왜요?”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줄리 엣이 조금 발끈해서 물었다.
“왜냐면 아가씨 친구나 가족들은 아가씨가 없어진 걸 눈치 못챌 테니까 말이오."
줄리엣은 힐데가르트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눈치챘다.
단순히 구하러 오지 않는 게 아니라, 눈치를 못 챌 거라고?
“....…그건 무슨 뜻이에요?"
* * *
“얘는 대체 어딜 간 거야………."
테오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테라리움을 뒤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그가 봤던 것이 줄리엣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야, 너!”
그러나 테오는 때마침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어제부터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알아?”
테오는 대뜸 화부터 냈다.
마음이 놓이는 것도 당연했다.
테오는 어제 저녁 그 난리통이 일어났던 연회장에 없었다.
늑대 놈은 다쳤다지, 줄리엣은 피를 뒤집어썼다지.
걱정스러워서라도 찾아봐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뒤쫓아 가던 도중 줄리엣이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어쨌든 일단 얼굴을 보았으니 안심이었다.
왜 줄리엣이 귀빈들용 숙소가 있는 테라리움의 동관이 아닌, 사제들의 생활공간인 서관에서 나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테오는 방금 전 줄리엣이 나온 방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제례 준비실인데………?
“테오하리스 르바탄.”
“뭐?”
너 지금 내 풀네임 불렀냐?
테오는 조금 당황했다.
자세히 보니 오늘의 줄리엣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안색도 유난히 창백한 것 같다.
목소리도 좀 이상하고,
"테오하리스.”
“어?”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혼자 있게 해줘.”
"아…… 응.”
테오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쾅.
얼결에 그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줄리엣은 조금 전 나왔던 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테오는 황망히 문패를 다시 쳐다보았다.
제례 준비실?
“뭐야, 사람이 걱정을 하는데 , 태도가 왜 저래?"
태오는 투덜거리며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얼굴 봤으니 마음이 좀 놓였다.
끼릭끼릭끼릭.
“응?”
테오는 문 너머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흠칫했다.
어쩐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
“인형…… 이라고요?"
“그렇다오.”
힐데가르트가 들려 준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 였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 겉으로는 사람과 구분하기 어렵지.”
줄리엣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7년간 북부에 머물면서 온갖 기괴한 마물들을 다 본 줄리엣도 그런 인형에 대해서는 들어 본적 없었다.
'차라리 죽은 시체가 살아나 움직이는 건 본 적 있지만…..….'
그것들은 적어도 말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세상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겠소?”
힐데가르트가 처음으로 답답하 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그렇다.
강직한 법황으로 유명했던 힐데 가르트 8세의 대외적인 사인은 은병사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요?”
줄리엣은 조심스레 물었지만 힐데가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아직껏 그놈이 나를 살려 둔 이유가 궁금한 게로군?"
“네.”
“내가 전승을 거부해서 그렇소.”
“전승?”
힐데가르트는 전승이 뭔지 설명해 주었다.
대충 선대 법황이 타계할 때 후 계자를 위해 남기는 기억 마법같은 거라고 했다.
하지만 당연히 눈속임으로 법황지위를 강탈한 제바스티안은 힐데가르트로부터 필요한 기억을 넘겨받지 못했고, 그녀를 여기에 산 채로 감금한 다음 필요한 기억을 그때그때 빼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 였다.
"나를 이곳에 가두고, 바깥에서는 내 인형으로 내 유언을 조작한 거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제바스티안이 밖에서 벌인 자신의 악행을 고해다 바치진 않았을 텐데.
힐데가르트가 어떻게 자신의 인형으로 유언을 조작했다. 확신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떻게 알 것 같소?"
힐데가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아.
줄리엣은 어쩐지 그 미소가 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그 이후에도, 있었던 거군요."
힐데가르트 8세의 죽음이 조작된 다음, 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와 그녀와 똑같은 신세가 된 다른 사람들이.
“그렇소. 아가씨의 짐작대로요.”
힐데가르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왔었소. 특히나 제바스티안이 밖에서 거짓으로 법황직을 승계한 직후에는."
콜록콜록.
어두운 등 뒤에서 갑자기 희미한 밭은 기침 소리가 들려와 줄리엣은 기겁했다.
“지금 여기 갇힌 사람이 또 있어요?"
“아마도, 가끔 저렇게 기척이 들려오면 서로 짐작만 하는 거요.”
힐데가르트는 익숙한 일인 듯 듯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줄리엣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힐데가르트의 주변 지하 감옥들은 모두 텅 비어있었지만 인기척비슷한 게 들리는 걸 보니 이 지하 감옥은 얼마나 넓은 걸까?
대체 몇 명이나 갇혀 있는 걸까?
문득 떠올랐다.
신임 교황을 둘러싼 꺼림칙한 소문들.
쥐도 새도 모르게 정적들이 사라졌다거나, 최근 루체른에서 일어나고 있다.
는 정체불명의 실종 사건들.
'이제야 아귀가 맞네.'
줄리엣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아무것도안 물어보세요?”
힐데가르트는 줄리엣에게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런데 줄리엣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힐데가르트의 답변은 의외였다.
"아가씨가 비아를 닮았거든.”
“그게 누군데요?”
물으면서도 대충 감이 왔다.
아까 그 미친놈이 자신을 '비아’라고 불렀으니까.
연인이거나 아내거나. 뭐 그런 비슷한 거겠지.
평생 종단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동정서원을 하는 사제한테 연인이라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미친 놈 머릿속을 누가 알겠는가?
줄리엣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가씨 입은 옷에 로켓 목걸이가 있을 거요.”
“목걸이요?”
앞섶을 내려다본 줄리엣은 과연 목걸이를 발견했다.
줄리엣은 있는지도 몰랐던 금장목걸이를 옷깃 틈에서 끄집어냈다.
안에 초상화나 머리카락을 넣을 수 있는 로켓이 있었다.
이것 역시 수십 년 전에나 유행하던 디자인이었지만 이건 집의 다른 소품들과는 달리 진짜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로켓이 열렸다.
“.…이 여자가 비아인가요?”
로켓 안을 들여다본 줄리엣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안에 든 것은 어떤 여자를 그린 정교한 초상화였다.
“그렇소. 제노비아. 참 어여쁜아이였지.”
제노비아.
그런 이름이었구나.
힐데가르트의 말대로였다.
수줍게 웃고 있는 제노비아 쪽이 조금 더 유순한 인상이고, 보랏빛 눈을 하고 있단 것을 빼면 줄리엣의 잃어버린 쌍둥이 자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내 평생 그렇게 풍부한 신성력을 타고난 아이는 처음 봤다오.
아마 살아 있었더라면 못해도 추기경이 되었을 거야.”
힐데가르트는 먹먹한 목소리로 로말했지만 줄리엣은 어쩐지 오싹했다.
‘진짜 닮았잖아?'
“내가 하급 사제가 되고 처음 맡은 자리가 보육원의 총관리직이었다오.”
힐데가르트가 젊었던 시절, 수십 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줄리엣은 루체른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폐건물의 흔적을 떠올렸다.
"큰 화재가 났던 자리입니다.
구건물이라 쓰지 않지요.”
그게 보육원 자리였구나.
제바스티안과 제노비아는 둘 다 그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흔히 있는 일이다.
먹고 살기 어렵고 가난한 부모들이 신전의 시설에 아이들을 맡기는 일쯤은.
운이 좋아 신성력이 있는 아이라면 평민이라도 고위 사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제노비아는 특히나 신성력에서 아주 타고난 아이였다오. 재능이 아주 많았는데 …….”
그러다 어느 날, 원인 불명의 화재가 났다.
많은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고운 나쁘게도 제노비아는 그중 하나였었다.
"아, 네.”
줄리엣은 다소 흘려들으며 램프로 지하 감옥의 벽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가능성은 낮아 보였지만 혹시 빠져나갈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사연 있는 미친놈이라고 범죄가 범죄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한숨과 함께 이어 말한 말에는 줄리엣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사이좋은 남매였는데 말이 오.”
순간 줄리엣은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내가 말 안했소? 제노비아는 제바스티안의 누이였소."
“쉿.”
끼릭끼릭끼릭.
놀람도 잠시.
갑자기 힐데가르트가 검지를 입에 댔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