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어릴 때 인형을 가지고 놀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였다.
미묘하게 실제와는 비율이 맞지 않는 가구들. 지나치게 화려하지만 입고 움직이기에는 불편한 의상.
줄리엣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 중에도 이런 게 있었다.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부터 버석거리는 감촉의 슈미즈는 아무리 봐도 사람이 입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용한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가짜 찻잔들.
줄리엣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찻주전자를 뒤집어 보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 모형을 을힐끔 보았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분명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은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장식에 불과했고 계우 발견한 창문 역시 열리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법황청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
는 것도 그렇지만 그녀를 여기에 가둔 것이 다름 아닌 법황이란 사실 역시.
나비들도 소환되지 않았다.
열쇠가 없어서?
제바스티안, 그 이상한 놈은 줄리엣의 옷과 소지품은 물론이고 열쇠가 달린 목걸이 역시 가져갔다.
아니다.
나비들은 열쇠가 있건 없건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나타났었다.
'그보다는 신성력 결계 때문이겠지.’
줄리엣은 그렇게 짐작했다.
아흔여덟 겹의 신성력 결계 어쩌고 하며 자랑하던 고위 사제의 말이 생각났다.
“그럼 여긴 루체른이 맞겠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 먼 곳으로 옮겨진 건 아니라서.
저택을 샅샅이 돌아본 다음 줄리엣은 기운이 다 빠져서 1층의 복도 구석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들어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엣이 두 번 졸도했다가 깨어날 동안 그녀가 먹은 음식이라곤 조금 전의 사과 한 알이 전부였다.
힘이 남아 있는 게 이상했다.
"틀렸어.”
줄리엣은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가짜 문과 창문들은 그야말로 장식이다.
이곳은 자력으로는 나갈 수 없는 형태일 것이다.
제바스티안은 갑자기 침실 공중에서 나선형 계단 같은 걸 타고 내려왔다. 그게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 확률이 이 높았다.
“그렇다면 여기는 법황청 내부에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인 건데..….”
일종의 결계인 셈이었다.
줄리엣이 사라진 걸 알면 일행들이 그녀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 찾아 주려나?" ”
생각보다 자신이 없었다. 힘이 빠져서인지 막막해서인지 모르겠다.
'레녹스는…….’ 어제 일로 단단히 화가 났으니까 그대로 북부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로이는…… 그 일족들은 솔직히 속을 잘 모르겠다. 훌쩍 나타났다가 훌쩍 사라지니 말이다.
남은 건 테오랑 에셀리드인데.
영 미덥지가 않았다.
제바스티안 법황, 아니 그 미친놈은 무슨 생각인 걸까? 뭐가 목적이라 그녀를 납치한 걸까?
끼릭. 끼릭. 끼릭.
또다.
줄리엣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또 뭔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줄리엣은 저 소름끼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예를 찾자면 마치 기름칠 덜 된 기계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인데.
'저 소리를 언제 처음으로 들었더라?’
하지만 본능이 경고하기를 왠지 저것과 마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엣은 재빨리 발소리를 죽이고 가장 근처에 있던 벽 구석의 작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줄리엣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지하실?'
위층과는 달리 깜깜한 계단은 은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계단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내려가다가 바닥이 갑자기 푹 꺼지진 않겠지?
줄리엣은 문손잡이를 잡고 조금 머뭇거렸다.
끼릭. 끼릭. 끼릭.
예의 그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까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줄리엣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끼릭끼릭끼릭.
'갔나?’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가져다댄 채, 정체불명의 소리가 지나 가길 기다리던 줄리엣은 잠시 후 문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일단 위층에서 자꾸 들리는 저 소리와 마주칠까 무서웠고, 둘째로 이 지하실이 괜히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벽을 짚고 조심조심계단을 따라 내려와야 했지만 한번 눈에 어둠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리고 밖에서 봤던 것만큼 어둡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하 밑 어디엔가 광원이 있는 듯 했다.
'아래에서 빛이 새어 들어온다고?’
그럴 리가.
반신반의하며 계단의 끝까지 내려간 줄리엣은 계단의 끝, 그러니까 지하실의 입구에 크고 낡은 램프를 발견했다.
광원의 정체였던 것이다.
램프 불빛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줄리엣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기저기에 사람의 팔다리처럼 보이는 살색 물체들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인형?’
마네킹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저기 널브러진 것은 다행히 사람의 신체는 아니었다.
줄리엣은 문득 떠올렸다.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저자.
소문이 영 안 좋아요.”
에셀리드가 그렇게 말했지.
신임 교황을 둘러싼 꺼림칙한 소문들. 쥐도 새도 모르게 정적들이 사라졌다거나, 최근 루체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실종 사건들.
그럼 여긴 지하 감옥일까?
줄리엣은 이 지하 감옥이 얼마나 길게 뻗어 있는지 궁금했다.
여기가 루체른이 맞고, 대충 테라리움 지하 어디쯤에 실재하는 지하 감옥이라면.
잘만 하면 이 지하 감옥을 따라 탈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줄리엣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램프를 높이 들고 살펴보았다.
대체 얼마나 넓은 건지, 램프를 높이 치켜들어도 어디쯤이 끝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소용없다오, 아가씨.”
"......!"
소스라치게 놀란 줄리엣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누구세요……?”
빛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 깡마른 백발의 노파가 철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여기는 예전 이단 심문관들이 직접 설계한 특수 감옥이라오.
애초에 탈출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소.”
어딘지 괴상한 말투와 장소에 걸맞지 않는 화려한 의복.
"당신은….”
줄리엣은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구겨지고 지저분해졌어도 백의 위에 진홍색 영대를 착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세대에 한 사람뿐이니까.
“힐데가르트 8세겠군요.”
묘하게 차분한 기분으로 줄리엣이 중얼거렸다.
3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 선대 법황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희미.
한 불빛 속에서 웃었다.
“그렇소.”
기분 나쁜 소리가 사라진 걸 확인한 줄리엣은 인형의 집을 한 바퀴 돌아다닌 끝에 물병과 물잔을 발견했다.
여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지만.
힐데가르트는 물이면 충분하다.
고 말했다.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고맙소.”
감옥 안의 힐데가르트는 점잖게 감사를 표했다.
“당신을 여기 가둔 게 제바스티안 짓인가요?”
줄리엣은 그녀의 손에서 물 잔을 건네받자마자 물었다.
“그렇소.”
"3년 동안요?"
“...…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소?”
힐데가르트는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시간 감각이 흐려지지. 적어도 10년은 지났을 거라 생각했다오.”
맞는 말이다. 줄리엣은 자신이 이 인형의 집에 갇힌 지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계도 없고 창문도 없으니.
혹은 한 달쯤 지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줄리엣은 힐데가르트에게 이것 저것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제바스티안은 왜 이런 공간을 가지고 있느냐, 탈출할 수 있는 방도는 없느냐 등등.
힐데가르트는 그녀가 아는 한도 내에서 모두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줄리엣 역시 어느 정도 속으로 짐작하고 있던 사실들이기에 특별한 정보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문답을 이어 나가던 줄리엣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힐데가르트는 줄리엣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줄리엣에게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그녀 역시 이곳에 영영 갇히게 될 거란 걸 암시하듯 말이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