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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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야, 줄리엣!”
노크도 없이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텅 빈 응접실로 성큼성큼 들어온 것은 방문객 중 하나인 테오르바탄이었다.
테오는 조금 전 우연히 줄리엣을 먼발치에서부터 발견하고 뒤를 쫓아왔다.
왜 사제들이 입는 옷을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는 줄리 엣이었는데, 수상하게 생각하고 뒤따라왔던 붉은 머리의 테오 르바탄은 응접실 안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얘 어디 갔어?"
어딜 간 거지?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형제님!”
허겁지겁 입구를 지키던 수호사제가 우는소리를 하며 쫓아왔다.
“그,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 윽!"
유명한 망나니답게 르바탄 가의 막내아들은 뒤쫓아온 사제의 역살을 잡고 윽박질렀다.
“그럼 내가 눈이 삐어서 헛걸 봤단 말이야?”
“그, 그게 아니라…… 성하께서 여긴 아무도 얼씬 말라고 하셨습니다....”
멱살을 잡힌 사제는 진땀을 흘렸다.
테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빈 방을 보았다. 그러나 달리 다른 곳으로 나가는 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여동생분은 다른 곳에 계실-”
“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예?"
"걔가 내 여동생인지 누나인지 어떻게 아냐고.”
"그……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아서…….”
궁색한 변명과 함께 사제는 눈을 피했다.
흠. 뭔가 미심쩍었지만 테오는 결국 응접실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
꿈에 닉스가 나왔다.
“빡!"
닉스는 배고프다는 듯 줄리엣을 바라보며 울었다.
‘밥 줘야 하는데.’
맞아. 닉스!
놀랍게도 그 순간 줄리엣의 눈이 반짝 떠졌다.
'음……?'
눈을 뜬 줄리엣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아직 꿈을 꾸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하늘하늘한 캐노피가 달린 침대 천장이었다.
'…공주님 방?'
줄리엣이 지금보다 열 살, 아니 열 다섯 살쯤 더 어렸다면 신이 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릴 때도 이렇게 유치한 꽃분홍색 레이스는 취향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줄리엣은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어쩐지 온몸이 뻐근했다. 평생 안 쓰던 근육을 혹사해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난 다음 날처럼.
줄리엣은 끙끙거리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주변 풍경을 둘러보니 그녀의 첫인상이 맞았다.
꿈도 아니었다. 그녀가 누워있던 침대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인형이며 가구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침실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정도면 누구나 공들여 꾸민듯한 공간이었다.
“이게 뭐야…….”
줄리엣은 당황했다.
분명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줄리엣은 비틀거리다가 바닥으 으로 내려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었다.
절그럭.
"......!"
'이건 또 뭐야?' 제 발목에 묶인 금속만 아니었다면, 발목에 걸려있는 것은 쇠사슬이었다.
온통 소녀 취향의 물건들로 가득 찬 침실 분위기와는 퍽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침대 시트를 걷자 그녀의 왼 발목과 침대의 한 기둥을 연결한 쇠사슬이 보였다.
장난이라면 악질적이다.
'납치 당한 건가?'
몸값을 받아내려는 속셈일까.
아니면……. 어떤 앙갚음일지도 모른다.
지난번 경매장에서의 일도 있으니 기네스 후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 하지만 나는 분명 루체른에 있었는데?'
루체른 신성 법국은 작은 도시국가지만 각국의 군주들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중립지대였다.
설령 한 나라의 황제나 왕일지라도 루체른에서는 여신의 종으로서 법황청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누가 법황청에서 사람을 납치한단 말인가?
줄리엣의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순간, 위에서 내려왔다.
끼이익.
뚜벅. 뚜벅. 뚜벅.
줄리엣은 발소리를 듣고 소스라 치게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게 뭐야?’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천장벽 쪽에 나선형 계단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비아?"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줄리엣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예상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드물게도, 줄리엣은 상황을 금방 이해하지 못하고 당혹감에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었다.
"......?"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구나, 비아.”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법황, 제바스티안이었다.
철컥.
제바스티안은 가타부타 아무런 설명 없이 줄리엣의 발목에 묶여있던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줄리엣은 묶여 있던 발목을 슬쩍 문질렀다.
어쩔 수 없이 나란히 앉아 있긴 했지만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식기 전에 들어.”
제바스티안은 웃으며 식탁 위의 음식을 가리켰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뭘 탔는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기는 조금 꺼림칙했다.
“....…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줄리엣은 목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말했다. 음식에 무엇을 탔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비독 같았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나는 네가 말하는 '비아'가 아니 란다. 그게 누군진 모르겠지만.
줄리엣은 납치당했을 때의 매뉴얼대로 침착하게 행동했다. 납치 범을 자극할만한 단어는 최대한 삼가고 차분하게.
“왜 그런 말을 해?"
그러나 제바스티안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비아. 내가 널 잘못 봤을 리가 없잖아.”
“...…그게 누군데요?"
제바스티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줄리엣은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왠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이 이상한 방 하며…
‘하지만 왜?'
왜?
“입에 안 맞아? 다른 걸 가져다 줄까?”
제바스티안이 김이 오르는 수프를 재차 내밀었다.
줄리엣은 일단 음식이라도 먹어두는 게 좋겠다는 우울한 생각을 했다. 왠지 빨리 정리될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체력이라도 회복시켜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반사적으로 그릇을 받아드는 순간.
푹.
그녀의 팔목에 주사기가 꽂혔다.
주사기 안에는 자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열차에서 거대한 늑대의 목덜미에 꽂혀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인 듯했다.
“걱정할 것 없어. 지금부터는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제바스티안은 가증스러운 얼굴로 줄리엣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줄리엣은 직감했다.
즉효성의 마비 독에 당한 게 분명했다.
줄리엣은 속으로 알고 있는 온갖 험한 욕을 다 퍼부었지만 소용없었다.
목소리가 나오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데루룩눈을 굴리는 것뿐이었다.
줄리엣은 옆으로 풀썩 쓰러지면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아래쯤을 꽉 조이는 코르셋과 버석거리는 원단.
수십 년쯤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디자인과 치렁한 레이스를 소매에 덧댄 것 하며, 까만 메리제인 구두는 잘 보관된 듯 반질반질했지만 누가 실제로 신었던 것처럼 앞코가 살짝 닳아있었다.
“약이 과했나?”
제바스티안은 줄리엣을 가차 없이 찌른 주제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로 눕혀 주었다.
“잘 자, 비아.”
그리곤 가볍게 이마에 입맞춤했다.
'좋아, 이제 훨씬 더 소름끼치네.’
줄리엣은 속으로 되뇌면서 까무러쳤다.
**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다행히 그 미친 놈은 옆에 없었다.
그 놈은 옆
팔다리가 더 이상 묶여 있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배고파……….”
미친 놈이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사실 그녀가 처한 상황은 전혀 다행이지 않았다.
그녀가 갇힌 이 공간이 탈출구라고 부를 만한 게 전혀 없는 밀실이었던 것이다.
줄리엣이 이 집을 이 잡듯 뒤졌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테이블 위의 사과 하나 뿐이었다.
아삭.
사과를 크게 베어 물며 줄리엣은 문득 떠올렸다.
“.…… 맞아, 닉스."
내가 여기 있으면 오닉스는 어떡하지? 아직 아기라서 문 여는 법도 모를텐데.
심지어 닉스가 짐에 숨어서 따라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줄리엣과 같은 마차를 타고 왔던 헬레네와 에셀리드 뿐이었다.
그리고 헬레네는 어제 저녁 그 참사가 나기 직전, 카르카손으로 돌아갔고 말이다.
에셀리드가 머무는 곳은 그녀의 방과는 아예 건물이 달랐다.
헬레네가 가기 전에 그레이나 테오에게 귀띔을 해줬을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빨리 나가야겠다.'
사과로 허기를 달랜 줄리엣은 다시 한번 탈출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줄리엣은 잠정결론을 내렸다.
“여긴……. 인형의 집이야.”
줄리엣은 중얼거렸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