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73화 (70/229)

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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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 공작은 그 모든 소란을 뒤로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의 왼손등을 타고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시종들이 수건이며, 붕대를 들고 달려 나왔다.

"아니…… 전하! 피가!"

"나가.”

낮게 억누른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노련한 사용인들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재빨리 물러갔다.

레녹스는 신경질적으로 타이 체인을 잡아 뜯다시피 던지고는 그대로 더운물로 가득 찬 욕조로 로향했다.

쨍그랑!

욕조 근처에 놓여 있던 호박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탈 병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검은 셔츠 때문에 표가 나지 않았지만 그의 왼팔은 생각보다 깊이 베였다. 한동안은 불편할 정도로.

“그 늑대 새끼가 -"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검날이 부딪히는 순간, 로이의 검이 그의 빈 왼쪽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는 몸에 익은 대로 목을 노렸는데 로이는 그걸 알고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확히 레녹스의 검 궤적 안으로 뛰어들었다.

반사적으로 각도를 틀지 않았다.

면 눈가를 스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늑대 놈의 목을 베었을 을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처음부터 놈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라이칸슬로프의 가공할 재생력을 믿고, 제 앞에서 과시하듯 줄리엣을 무대 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제까짓 게, 감히 -"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그 늑대 새끼의 목적은 제가 아니라 줄리엣이었다. 처음부터.

유치한 연극으로 줄리엣이 놀라 제게 달려오게 하기 위해서.

눈이 아니라 목을 날려 버렸더라도 괴물 같은 재생력으로 멀쩡했을 거라고 레녹스는 확신했다.

**

“아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임시 치료실은 조용했다. 엄살을 떠는 로이를 제외하고는.

"지금 웃음이 나와요?"

줄리엣은 화난 표정으로 그를 다그쳤다.

신관들이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고 나서야 로이가 제 손등의 상처를 보여줬던 것이다. 얕게 베인 것뿐이었지만 줄리엣은 잔뜩 화가 났다.

아니, 아까 치유 사제들이 잔뜩 있을 때는 뭐하고!

줄리엣은 대놓고 화를 내며 마구 소독약을 치덕거리며 들이부었다. 얄밉게도 로이는 따가워하지도 않았다.

“한번만 더 이런 짓을 벌이면, 그때는 ”

“그때는?”

“절교예요.”

“...…네?”

“절교 몰라요? 더는 친구 안 한다고요.”

"네에….”

로이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줄리엣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줄리엣을 보며 로이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나도 몰랐으니까요.”

로이는 나직하게 웃었다.

줄리엣은 그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손이나 줘요.”

“네.”

로이는 순순히 손등을 내맡긴 채, 줄리엣이 상처를 들여다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반나절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흉터였다.

줄리엣은 종종 그들 일족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로이는 일부러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줄리엣이 심각한 얼굴로 로제 상처를 살피는 동안 그녀를 를마음껏 바라보았다.

심각해져서 살짝 찡그린 미간과 집중할 때면 콧잔등을 찡긋거리는 버릇까지.

'이렇게까지 좋아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의 황금색 눈이 조금 짙게 가라앉았다.

라이칸슬로프는 인간과는 달리 흔히 각인을 통해 일평생 한 명의 반려에게 충실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각인이란 것은 생각보다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의 일족은 몇 년에 한 번오는 발정기에 상대를 찾아 그 시기를 보낼 뿐, 가정을 이룬다.

는 개념은 다소 희박했다. 각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역시 그러했다.

분명 그러했을 텐데…….

“줄리엣.”

“네?”

로이는 줄리엣의 손목을 가볍게 당기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인간의 육체는 부드럽고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그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간 가볍게 망가져 버릴 터였다.

본래 로이는 약한 것을 경멸했다. 다른 일족들과 마찬가지로, 약해빠진 데다 비열하고 약삭빠르기까지 한 인간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경멸스럽게 느껴지던 그 연약함까지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 연약한 육체로도 팔딱거리는 맥박과 생기 있는 표정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이 마냥 놀랍고 신비로웠다. 힘 조절을 조금만 잘못해도 죽어버릴 만큼 연약하면서.

그러나 로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줄리엣은 마냥 연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거니와, 그녀가 나이를 먹고 인간이라서 더 빨리 늙고 점차 약해진다면 그가 그만큼 강해지면 그만이다.

줄리엣은 제 손등에 입 맞추는 로이를 보며 잡힌 손을 슬쩍 뺐다.

“로이, 내가 좋아요?"

"…내가 그렇다고 하면 도망칠 건가요?”

줄리엣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로이는 생각보다 그녀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면 잘 해주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설령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줄리엣은 그 다정한 말에도 하나도 설레지 않았다.

'어딘가 고장 나 버린 걸지도.'

줄리엣은 그렇게 생각했다.

레녹스 칼라일의 애정은 비틀린 구석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칼라일의 방식에 길들여져 왔다.

“로이, 나는…….”

로이는 상냥한 사람이라 그처럼 똑같이 잔인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내가 전처럼……

누군가를 좋아한다든지 하는 건 무리예요.”

비단 로이에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구든, 심지어 그녀가 다시 레녹스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예전만큼은 아닐 거라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그녀는 가망 없는 짝사랑에 지쳐버렸다. 너무 오래.

“괜찮아요.”

"로이.”

“당장 나를 좋아해달라고 바라지 않아요. 부담스럽게 하지 않을게요.”

로이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줄리엣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기댔다.

"내가 싫은 건 아니죠?"

아무래도 얼굴에 약한 걸 간파 당했나 봐.

줄리엣은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럼, 그걸로 충분해요.”

로이는 환하게 웃었다.

라이칸슬로프는 인간 수명의 세배를 산다. 그리고 특히나, 로미오 바스칼은 아주 참을성 많은 포식자였다.

줄리엣은 녹초가 다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시달렸다.

너무 긴 하루였다. 팔다리가 절로 축축 쳐지는 기분이었다. 줄리엣은 빨리 방에 가서 눕고 싶었다. 하지만 손과 치마가 온통 피로 엉망이었다.

“저, 아가씨.”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런 줄리엣을 조심스레 뒤에서 불러세운 사제가 있었다.

“네?”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몇 시간 전에 로이의 상처를 봐주었던 치유 사제 중 하나였다.

그녀는 줄리엣에게 다가와 귀가 번쩍 뜨일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관 지하에 특별 욕실이 있답니다.”

특별 욕실?

줄리엣은 솔깃했다.

“본래는 여사제들만 이용하는 거지만…… 지금 시간에는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빌려주겠다고까지 했다.

줄리엣은 감격한 나머지 그녀를 끌어안고 입 맞출 뻔했다. 그녀는 감독 사제에게 들키지만 말라고 충고까지 해줬다.

줄리엣은 그 치유 사제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밋밋한 여사제용 원피스를 들려주고는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가버렸네.”

어쨌거나 줄리엣은 그 여사제가 알려준 대로 동관의 특별 욕실을 찾아냈다.

방에 딸린 작은 욕실과는 규모부터가 다른 대형 욕실이었다.

뜨거운 목욕을 좋아하는 줄리엣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제법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넓고 쾌적한 욕실인데도 텅 비어 있었다.

줄리엣은 피를 씻어 낸 다음 피로 엉망이 된 옷까지 깔끔하게 갈아입고 욕실을 나왔다.

그러다 다시 제 방으로 가던 도중 공교롭게도 식재료를 나르던 사제들과 마주쳤다.

'아 맞다, 닉스.'

그녀는 문득 저를 기다리고 있을 새끼용을 떠올렸다.

새끼용의 이름은 오닉스 - 줄리엣은 주로 닉스라고 불렀다.

였는데, 줄리엣은 이 녀석을 먹이고 키우느라 계획에 없는 지출을 꽤 많이 했다.

덕분에 비상금으로 챙겨두었던 보석 몇 개를 팔아야 했다.

그중에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새카만 오닉스 브로치는 줄리엣의 어머니, 죽은 모나드 백작부인의 유품이었다.

그래서 까만 새끼 용의 이름은 오닉스(닉스)가 되었다.

이름을 짓는 재주는 없는 줄리 엣이었지만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줄리엣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못먹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불쌍히 여긴 착하고 마음 약한 수련 사제들로부터 사과 두 알을 얻었다.

빨간 사과는 닉스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여사제들이 입는 원피스형 제복에는 에이프런 비슷한 게 달려있었다. 줄리엣은 양쪽의 주머니에 사과를 하나씩 흡족하게 넣고는 막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거기 자매님?”

'아차.’ 등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리자 줄리엣은 지레 뜨끔했다.

그러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네, 사제님?”

낯선 얼굴의 사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꽤 높은 직위의 사제인 듯, 줄리엣이 이제껏 봤던 다른 사제들과는 의복이 조금 달랐다.

줄리엣은 살짝 긴장했다.

'설마 사과 때문에? 아니면 내가 특별 욕실에서 나오는 걸 봤을까?'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지금요?”

“잠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지?

줄리엣을 불러 세웠던 여사제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빙글 돌아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듯이.

'올 게 왔구나.'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줄리엣은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가는 낯선 여사제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을 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끼릭. 끼릭. 끼릭.

줄리엣은 그녀를 따라 낡은 계단을 오르며 불안해했다.

늦은 시간이라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닉스를 본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본래 데려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닉스는 몰래 줄리엣의 짐가방에 숨어서 그녀를 따라왔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멸종한 걸로 알려진 용의 존재를 들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욕실은 그냥 우연히 발견해서 썼다고 해야지. 그리고 사과는…….

그냥 무조건 잘못해야겠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닉스의 존재를 들킨 거라면 문제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닉스 얘기면 사육제고 뭐고 이대로 야반도주야.’

줄리엣이 그렇게 다짐했는데, 앞서가던 여사제가 어느 응접실 앞에 멈춰섰다.

덜컹.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여사제는 줄리엣을 안으로 밀어 넣나 싶더니 문을 닫았다.

"네? 사제님?”

줄리엣이 문가로 다가서려던 바로 그 순간.

파앗!

바닥에 숨겨져 있던 기하학적인 원형의 소환진이 빛을 발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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