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72화 (69/229)

72화.

**

검술 대회는 가장 인기가 높은 행사답게 하루에 다섯 경기씩, 7일에 걸쳐 진행된다.

벌써 경기장은 구경꾼들로 만석이었다.

“승자! 로미오 바스칼!"

다섯째 날의 마지막 경기 승자는 로이였다.

그러나 로이는 패배를 시인한 상대방이 경기장을 나가고 나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상대방이 놓쳐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경기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관객석 첫 줄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턱을 괴어 웃으며 줄리엣에게 말을 걸었다.

“나한테 해 줄 말 없어요?”

로이가 와서 말을 걸기 전까지 줄리엣은 멍하니 경기장을 떠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네? 뭘요?"

로이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러운 듯 치켜 올라갔다.

“이겼으니 칭찬해 줘야죠!”

로이의 등 뒤로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풋.”

줄리엣은 대진표를 힐끔 보다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아, 모르겠다. 이쯤 되니 이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방금 전 검을 놓치고 패배를 시인한 로이의 상대는 전생에 이 토너먼트의 승자였던 파비안이었다.

줄리엣은 그가 요구하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해 줬다.

“그래요. 참 잘했어요.”

원래대로라면 주드도 로이도 이 검술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 때문인지, 파비안은 우승하지 못했다.

줄리엣은 그에게 돈을 걸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줄리엣은 웃다가 말고 어떤 시선을 느꼈다.

최근 그녀는 이런 정체불명의 시선을 느끼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두리번거려 봤지만 딱히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는데 ……

대신 줄리엣은 막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잠시만요.”

줄리엣은 다급히 앞서 가는 어느 남자를 불렀다.

“주드!”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기는커녕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잠깐만요! 주드!”

줄리엣은 포기하지 않고 뒤쫓아갔다.

다행히 인파에 가로막힌 덕에, 주드는 그녀에게 손이 잡혔다.

“주드!”

걸음을 멈춘 주드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예.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주드는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고도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표정 역시 반가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줄리엣은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주드, 나한테 화났어요?”

“화났……!”

주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다른 곳을 보며 심호흡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다시 줄리엣을 똑바로 보았다.

"아가씨는 저희를 다 버리고 가셨잖습니까! 스승님도 속이고!

저희가 얼마나……!"

"…."

“……정말 미안해요, 주드."

“저는 아가씨와 제가 친남매 같은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줄리엣은 그제야 주드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많이 상처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훌쩍이는 것을 토닥여 주었다.

“케인 경은 괜찮나요?”

줄리엣은 계속해서 케인 경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공작저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소드마스터인 그를 따돌릴 필요가 있었다지만, 어쨌든 저를 믿어 주던 그를 속이고 몰래 약을 먹였던 거니까…….

"예, 스승님은 잘 계십니다.”

주드는 슬쩍 곁눈질하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아가씨 걱정을 많이 하세요. 잘 지내신다고 전해 드리면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게 한동안 미주알고주알 떠들던 주드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입을 비죽거리며 팩 돌아섰다.

“얼굴 봤으니 됐습니다.”

“이대로 가는 거예요?"

“예, 건강히 지내십쇼.”

주드는 잠시 망설이더니 무뚝뚝하게 휘적거리며 떠나 버렸다.

그런 주드를 먼발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 기사 밀란은 어이 없단 얼굴로 주드와 줄리엣을 번갈아 보다가,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눈인사를 했다.

밀란은 주드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실실거리며 그를 툭 쳤다.

"야, 우냐?”

"울긴 누가 운다고 그럽니까!”

*

사육제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데, 실상은 제도사교계와 다른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줄리엣은 묘하게 실망하는 한편 익숙해서 안도했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연회는 수도 사교계의 그것과 다른 게 없었다.

칼라일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의 눈이 있을 때는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줄리엣은 묘하게 실망하는 자신을 느꼈다.

'정말, 변하지를 않는구나. 나도.’

그날의 저녁 연회도 평화롭게 마무리되는구나 할 때 즈음 뜻밖의 불씨가 생겼다.

'로이?’

줄리엣은 갑자기 로이가 누군가에게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공작께서는 검술에 일가견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로이의 돌발행동에 연회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쥐죽은 듯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결투제의야, 뭐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 연회의 여흥이었다.

다만…….

“그래서?”

문제가 있다면, 로이가 말을 건 상대가 칼라일 공작이었다는 것이다. 최연소 소드마스터로 이름을 날렸던, 그 북부의 젊은 공작말이다.

로이는 싱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어떠십니까, 한 수 가르침 받을 기회를 주시는 것이?”

“뭘 한다고?”

“누가?”

“결투야? 대련이야?”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점점 퍼져나갔다.

'거짓말.'

줄리엣은 로이를 경악한 눈으로 보았다.

참가자들이 전문 검투사가 아니라 귀족가의 기사들이므로, 검술대회용 검은 실전용 검보다 날이 살짝 무뎠다.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지만 다시 말하면 팔다리는 날릴 수 있다는 뜻이다.

“로이!”

줄리엣은 미쳤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로이는 줄리엣이 뭐라 붙잡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거절하진 않으시겠죠, 공작 전하?"

아무리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라이칸슬로프라고 한들 검술로 레녹스 칼라일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은 날이 무딘 검이 아니라 목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좋은 제안입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실없는 구경꾼들이 부추기기 시작했다.

“좋은 여흥이 되겠군요.”

“그거 재밌겠네요.”

'수락할 리 없어.' 줄리엣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샌가 레녹스를 향해 있었다. 레녹스의 시선 역시 로이의 어깨너머로, 줄리엣을 향해 있었다.

연무장도 아닌데 구경거리 삼아 연회장의 매끄러운 바닥에서 검을 드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였다. 줄리엣은 저도 모르는 사이 무심코 간절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레녹스가 저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리가…….’

그러나 다음 순간, 레녹스는 싱긋 웃으며 줄리엣의 기대를 박살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검을 집어 들었다.

“검 잡는 법은 아시나, 왕자님?”

**

“그, 그럼 규칙은 관례대로 하겠습니다.”

졸지에 즉석 결투의 심판관이 된 귀족 하나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관례대로'라는 것은 어느 한 쪽이 패배를 시인하거나 전투 불능의 상황이 될 때까지만 경기를 진행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뭔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그는 굳이 검을 들고 선 두 사람에게 한 번 더 말했다.

“치명적인 부상은 안 됩니다!

두 분 모두 아시겠지요?"

그러나 둘 모두 그런 규칙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캉!

검이 몇 번 가볍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챙강!

의외로 둘 다 그리 진심이 아닌 듯 가볍게 검격을 주고받는 것뿐이라 줄리엣은 제가 과민했나 싶었다.

사람들은 그저 이 상황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유명인사들이 검을 부딪치는 광경을 보게 되다니. 운이 좋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챙!

"!"

서걱.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 장면을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저 로이의 검이 공작의 왼쪽을 향에 날아든 순간, 반사적으로 목을 찌르려던 공작의 검이 다급히 궤도를 틀었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로이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꺄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들 중 대부분은 검술과는 거리가 먼, 독실하고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로이!”

줄리엣은 벌떡 일어나 로이에게로 달려갔다.

로이의 얼굴 상태를 확인한 줄리엣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피가 나잖아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다!

로이의 오른쪽 눈가에서 출혈이 멎지 않았다.

급한 대로 줄리엣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지혈하는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치, 치료사!”

“사제! 치유사제를 불러와!"

치유사제를 부르고, 홀 바닥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보고 졸도하듯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뜻밖의 여흥거리에 신나 하며 은근히 부추기던 구경꾼들은 피를 보고 나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니면 다친 상대가 카티아의 왕족이라 겁먹었는지.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결투에서 벌어진 일은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오랜 불문율이지만,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만약 시력을 잃은 거라면 대형사고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귀찮은 일에 엮일까 다급히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다.

하얗던 줄리엣의 손수건이 피로 물들었지만 도통 지혈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줄리엣은 점점 창백한 로이의 안색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로이는 손수건을 을누르고 있던 줄리엣의 손을 느긋하게 겹쳐 잡았다.

"다치니까 좋은 점도 있군요."

그러면서 슬쩍 중얼거렸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줄리엣이 기막혀서 화를 내는데 로이가 넉살좋게 싱긋 웃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걸요.”

줄리엣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수준인데 말은 잘했다. 마력이 아니라 치유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달리아였다면 -'

이 정도 부상 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치료했겠지.

“상처 부위 먼저 보겠습니다!"

그사이 허겁지겁 달려온 치유사제들이 로이를 넘겨받았다.

지혈하고 있던 손수건을 떼자 상처 부위가 드러났다.

길게 베였을 뿐 검상이 깊지는 않았지만 피가 멎지 않아서 로이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눈꺼풀 위가 찢어진 것 같았다.

눈을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놀랐던 줄리엣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만 빗나갔다면 시력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치료를 위해 사제들에게 자리를 비켜주려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

상처를 내맡기고 눈을 감은 자세 그대로 로이가 줄리엣의 손목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로이, 이것 좀…”

“그냥 있어요.”

로이가 낮은 목소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왜?'

의아함을 느끼던 줄리엣은 그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시선을 눈치챘다. 무심코 고개를 든 줄리 엣은 레녹스 칼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는 아수라장과는 철저히 무관한 듯 그냥 거기에 고고히 서 있었다.

혼비백산하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여전히 그가 들고 있는 검 끝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레녹..”

무결한 붉은 눈으로 그녀 쪽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남자는, 말한마디 없이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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