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성가져 죽겠다는 표정이군”
레녹스는 줄리엣이 신경질적으로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을 구경하며 느긋이 입을 열었다.
“......"
줄리엣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녹스는 전혀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되레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줄리엣은 이제 와서 그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귀찮게 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데.
'분명,나를 성가셔했었잖아…….'
그러다 문득 그가 아직도 오해 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 알겠다.”
줄리엣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제가 전하가 미워서 아기를 가졌다고 거짓말 했어요.”
“됐죠? 아기는 없어요."
그러자 그는 답이 없었다.
대신 반쯤 누워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며, 줄리엣을 뒤에서 반쯤 끌어 안 듯 붙잡아 돌려세웠다.
“줄리엣.”
"....…왜요.”
줄리엣은 속으로는 살짝 겁이 났다. 홧김이긴 했지만, 그를 거짓으로 속이고 달아난 것은 맞았으니까.
그리고 그는 그 거짓말에 분개해 대륙을 건너온 셈이었으니까.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의외로 조용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허리를 조금 굽혀 줄리엣과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물었다.
“하나 묻겠는데, 내가 아이를 갖지 말라고 얘기한 적 있었나?"
"......."
순간, 줄리엣은 말문이 막혔다.
"만약은 없어.”
"생겨도 낳게 하지 않아.”
“줄리엣?”
정확히는, 아직 그가 말하지는 않은 말이다.
줄리엣은 회귀 전에 들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드레스 자락을 손안에 말아쥐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선명히 기억했다.
특히나, 그녀가 죽던 그 해의 일들은 모두 다.
잠시 뿐이지만, 아이를 가졌다.
는 희망에 줄리엣이 잔뜩 부풀어 있을 때 그가 내뱉었던 말과 행동들을 모두 기억했다.
"내게 숨기면 다 될 줄 알았어?"
"줄리엣 모나드, 착각하면 곤란하지.”
“줄리엣!”
퍼뜩 정신을 차리니, 레녹스가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저…….”
줄리엣은 조금 허둥거리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구겨진 치맛자락을 감싸쥐고 뛰쳐나오다시피 장미 미로 정원을 벗어났다.
"하나 묻겠는데, 내가 아이를 를갖지 말라고 얘기한 적 있었나?”
'그런 질문은 왜 하는데?' 어차피 당신은 원하지 않을 거잖아.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지못해 아이를 낳아도 된다는 '허락'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았다.
모든 아이들은 사랑받아 마땅하다. 줄리엣은 아직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삶은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건 나 하나로 충분해.'
문득 알제의 호수가에서, 무릎을 꿇던 남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했던 말이 얼마쯤 진실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결혼해주겠다던 진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지만 이제와 그런 걸 믿고 희망을 품기엔 줄리엣은 너무 지쳤다.
어차피 달리아가 나타나면 또 내쳐질 텐데.
줄리엣은 이제 달리아가 왜 아직까지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그런 이유 따위는 이제 관심도 없었다.
줄리엣은 자신이 이렇게나 이기적이고 못됐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줄리엣은 그저, 세상 어딘가에, 그녀 자신보다 그가 더 많이 사랑했던.
혹은 사랑할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했다.
달음박질 친 것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
신성한 여신의 도시, 루체른에서 벌어지는 사육제는 모두가 흥청망청 즐겁게 노는 축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검술대회부터 시작하여 투우와 사냥, 심지어 도박까지 허락된다.
이 때문에 사육제를 구경하기 위해 전 대륙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올 정도였다.
사육제가 끝나면 몸과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길고 긴 단식 수행의 주간이라 단식 주간 전에 신나게 즐기는 것이라고 테오가 설명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사육제보다는 어젯 밤에 만난 레녹스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몰라.'
줄리엣은 48석의 귀빈들이 앉은 관람석 맞은편을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그들은 검술대회가 열리는 토너먼트 경기장에 앉아있었다.
칼라일 공작가의 지정석은 르바탄 가의 것과는 정 반대편이었다. 덕분에 줄리엣은 그의 얼굴을 대놓고 훔쳐 볼 수 있었다.
레녹스는 사육제가 시작된 이래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딱히 줄리엣에게 말을 건다거나 아는척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와 멀리 떨어진 좌석에서 부단장과 함께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래쪽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검술대회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토너먼트를 시작합니다!”
“참가자들은 호명하는 순으로 나오시오!”
그 사이 검술 대회가 시작했다.
'저럴 거면 경기장에는 왜 나왔담?’
줄리엣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만 레녹스에게 신경 끄고 구경에 집중하기로 했다.
*
사육제 때 열리는 검술대회는 동부 지역의 유서 깊은 행사였다.
"승리자에게는 황금 월계관이 돌아갑니다!"
테오와 줄리엣은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대회를 구경했다.
검술 대회를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줄리엣은 신기한 마음에 참가자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줄리엣을 보고 테오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뭐야. 너 저거 먹고 싶어?"
“뭐? 아니.”
줄리엣이 관중석에서 누군가 먹고 있는 간식을 보고 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럼 왜 저쪽을 계속 쳐다보는데?”
레녹스가 '내 방식대로 하겠다'라고 말하자마자 줄리엣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가족들의 안위였다.
'별로, 소중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줄리엣은 레녹스 칼라일이라는 남자를 잘 알았다. 그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얻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상대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걸 이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직은 자신의 새로운 가족에 대해 알지 못하겠지만, 머지않아 알아차릴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테오.”
“뭐. 왜. 뭐.”
테오는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했다.
“오래 살아.”
그러다 줄리엣의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포도주를 쏟았다.
주르륵.
“아아악! 더럽게 뭐하는 짓입니까!”
옆자리에서 에셀리드가 난리가 났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줄리엣은 옆에 있던 에셀에게도 말했다.
“에셀도요.”
“저는 오래 살겁니다. 걱정 마세요.”
에셀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 * *
검술 대회는 각 가문의 기수들이 나와 검술을 겨루는 토너먼트형식이었다.
복잡한 기술도, 참가 제한도 없다. 규칙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든 이기면 된다.
승부보다는 대련에 더 의의를 두는 수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 때문에 주최 측은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을 대거 투입했는데, 아무리 다쳐도 치유해 줄 사제가 뒤에 항시 대기하고 있으니 믿고 싸우라는 식이었다.
팔다리 한둘쯤 날아가도 멀끔히 낫게 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줄리엣은 기수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쟤는…….’
다른 참가자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은 소년이었다. 키가 작아서인지 오히려 눈에 더 띄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가난한 몰락 무가의 소년 검사가 우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파비안 보르도!”
때마침 참가자 이름 목록을 읊던 기수가 소년의 이름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래, 저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최연소 우승자라 했지.'
얼핏 듣기로는 축제 기간 동안에만 도박이 허락되어 참가율이 어마무시하다고 했다. 바꿔말하면 배당률도 엄청나다.
누가 저 작은 소년이 우승하리라고 생각할까.
'변수가 있긴 하겠지만 인과율이란 것도 있으니까. 나도 한 번 걸어 볼까.’
줄리엣은 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어?'
그때 줄리엣은 낯익은 머리통을 발견했다.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확 띄는 주황색 머리칼. 호리호리한 키와 화려한 마스크는…….
'주드?’
줄리엣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라일 공작가의 기사인 주드헤이온이 분명했다.
'그렇구나.'
칼라일 공작이 행차했으니 출전 권은 당연히 저쪽에도 있는 거였다.
주드는 공작가 기사단의 막내라 꼭 이런 귀찮은 행사는 매번 그의 차지가 되곤 했다.
때마침 주드가 그들이 앉은 쪽으로 돌아서서, 줄리엣은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반가움에 줄리엣은 활짝 웃었다.
'어……?’
그러나 그녀가 손을 흔들기도 도전에 주드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팩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건 못 보고 지나쳤다기 보다는…….’
보고도 일부러 시선을 피한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 친하게 지냈었는데 아무런 기약 없이 그 곳을 떠나 왔으니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겠지.
줄리엣은 손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