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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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 추기경이라는 자는 연회장을 돌아다니면서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카티아의 왕족 여러분들께서 특별히! 이 자리를 빛내주시다니요!”
일일이 귀한 신분의 손님들을 을찾아다니며 친한 척을 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족과 라이칸슬로프의 왕족은 개념이 다르다.
로이는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로이, 왕자님이었어요?”
“예?”
줄리엣이 묻자 로이는 되레 당황한 눈치였다.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로이가 언젠가 그 라이 칸슬로프 로드가 되는 걸까?
아니지, 형이 있다고 했으니 그건 아니겠구나.
로이의 뒤쪽으로, 이름을 알고 있는 나단과 엘자, 그리고 이름모를 일족 셋이 함께 서 있었다.
라이칸슬로프는 모두 저렇게 키가 시원시원하게 크고 미남미녀들인 걸까.
어두운 숲에서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짝반짝한 조명아래에서 보니 놀라울 정도였다.
특히나, 구불구불한 금갈색 머리칼을 갈기처럼 늘어뜨리고 홀터넥 드레스를 입은 엘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안녕, 줄리엣!”
"안녕, 엘자.”
엘자가 명랑하게 인사해서 줄리 엣도 마주 인사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2주 전, 알제의 달축제 날 밤 급한 일이 있어 돌아가지 않았던가.
줄리엣은 힐끗 곁에 서 있던 로이를 곁눈질했다.
'그 일은 잘 해결된 걸까?'
늘 나단과 붙어 다니던 엘자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엘자는 건강해 보였다.
"히히.”
"왜 웃어, 엘자?”
“줄리엣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
“....… 나무딸기 냄새?"
"어? 어떻게 알았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으니까 알지.”
“엘자……!”
나단이 이를 악물고 엘자를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엘자는 이미 포도주 한 통을 혼자 비우고 거하게 취한 상태였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설핏 웃던 줄리엣의 표정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잠시 굳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줄리엣은 로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사람을 따라 밖으로 다급히 나왔다.
잘 관리된 미로 정원 곳곳에서는 성질 급한 연인들이 벌써부터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줄리엣이 찾는 사람은 쉽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은 분명히 봤다.
'그 얼굴…….’
흰 사제복을 푹 눌러쓴 자그마한 체격. 주황빛 도는 머리칼.
분명히 달리아였다.
“앗…!”
발밑을 보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걷던 줄리엣은 무언가에 발이 걸려 휘청했다.
눈앞에 장미 덩굴이 펼쳐졌다.
장미 덩굴 위로 넘어진다고 한들 생채기밖에 남지 않겠지만 줄리엣은 다가올 아픔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생각했던 충격은 없었다.
그제야 줄리엣은 제가 누군가의 가슴팍 위로 넘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줄리엣.”
".....… 전하.”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 실례했습니다- 읏.”
줄리엣은 오늘 밤 헬레네의 완벽한 의상선택이 미스였다고 생각했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인 덕에, 식사를 걸렀더니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무언가를 짚고 일어나고 싶은데, 줄리엣이 유일하게 짚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눈앞 남자의 가슴팍 뿐이었다.
줄리엣의 손이 닿을 때마다 번번이 손쉽게 저지하면서 레녹스가 느긋하게 물었다.
“저 늑대 새끼가 '로이' 인가?”
몇 주 전 알제의 호숫가에서 들었던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네. 그래요!”
줄리엣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 새끼가 좋아?”
“레녹스!”
"말해 봐, 줄리엣.”
“그 늑대 새끼가 왕비의 관이라도 약속하던가?”
줄리엣은 멍하니 생각했다.
왕비의 관? 그게 뭐지?
아니 그 전에 이 남자가 이렇게 집요한 성격이었던가?
"대답해봐,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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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줄리엣은 대답하지 않고 레녹스에게 물었다.
“네가 그랬잖아.”
레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차갑게 웃었다.
"네 마음대로 하겠다고."
“그래서 나도 내 식대로 해보려고.”
“....…전하."
줄리엣은 레녹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로이는 그냥……. 친구예요."
그러자 레녹스가 차갑게 비웃었다.
"글쎄. 그 늑대 새끼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의 손끝이 줄리엣의 뺨을 건드렸다.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생각을 해봤거든, 내가. 네가 왜 그러는지.”
“.....…그런데요?”
“줄리엣, 나를 상처입히고 싶었어?”
줄리엣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상처입히고 싶었냐고?
상처입히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를 떠나겠다고 결심할 때도, 그리고 순간에도 그녀는 생각했다.
저를 붙잡는 그를 뿌리치는 그 조금이라도 그의 기억에 남기를. 설사 그 감정이 분노일지라도 좋으니 그 마음 속에 저가 있기를.
“대답해봐. 나를 좋아하긴 했나?"
좋아하긴 했냐고?
뭐 그런 멍청한 질문이 있지.
줄리엣은 쓰게 웃었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7년이나 그의 곁에 남아 있었을 리가. 그것도 전생에서 자신을 죽인 남자의 곁에 말이다.
“얼굴이요.”
“뭐?”
“얼굴을 좋아했어요.”
잘생기셨으니까요.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쏘아붙였다.
“그뿐이었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곁에 남아있었을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칼라일은 어쩐지 상처받은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아직 무르군."
그러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줄리엣은 다시 일어나기 위해 땅에 손을 짚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레녹스는 그런 줄리엣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주저앉혔다.
“뭐 하……!”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렇게 소리치려 했는데 칼라일이 갑자기 자세를 바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깍지를 끼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말했잖아, 줄리엣.”
“......!"
"기회가 있을 때 숨통을 끊는 거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줄리엣이 움찔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손에 단단히 붙잡힌 상태였다.
“찔러.”
레녹스는 한 손으로는 줄리엣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기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바싹 저에게 끌어당겼다.
“지금부터 입을 맞출 거거든."
그러니 싫으면 나를 찔러.
담백하기 그지없는 말에 줄리엣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 틈에, 그가 단단히 틀어쥔줄리엣의 손에 날이 예리한 단도가 억지로 쥐어져 있었다.
"가르쳐줬잖아."
그 말에 문득 기억이 났다.
북부에 머물던 시절, 레녹스는 는줄리엣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주곤 했다.
칼라일 공작가는 적이 많았고, 그녀는 7년이나 그의 곁에 머물고 있는 공식적인 연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노리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기회가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찔러. 그래야 네가 살아.”
개중에는 어느 곳을 찔러야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적을 죽일수 있는지 같은 호신술도 있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자세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렸다가는, 정말로 피가 솟구칠 것이라는 걸 아니까.
"......!"
저도 모르게 레녹스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림없다는 듯 줄리엣의 손에 더 단단히 단도를 쥐여준 다음, 그녀를 바싹 끌어 안을 뿐이었다.
그리곤 그 칼날에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지금 뭐 하는……!"
줄리엣은 기겁했다.
그러지 말라고 손을 뗄 수조차 없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그가 정말 다칠 것 같았다.
웅웅거리며 그의 마검이 경고하는 것조차 위협적이었다.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줄리엣을 향해 그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칼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촉.
가볍게 입술 위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줄리엣은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익숙한 체향에 멈칫했다.
그녀가 거부하지 않자 이내 입맞춤이 깊어졌다.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잠시 후.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줄리엣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멍한 눈으로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레녹스가 씩 웃었다.
"너와 입맞춤 한 번에 목숨이면 남는 장사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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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