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줄리엣은 거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있는 힘껏 화려하게 꾸미는 게 오랜만이라 거울 속의 자신이 영 어색했다.
'불과 엊그제만 해도 흙바닥에서 구르면서 고생했는데 말이야.'
다만 목걸이만은 릴리안의 유품인 진주 목걸이를 그대로 했다.
끝에 달린 작은 은빛 열쇠 장식이 일부러 고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치장하는 것은 오랜만이라, 마지막으로 입술을 붉게 덧칠할 무렵에 줄리 엣은 고개를 직원들의 손에 고개를 내맡긴 채 반쯤 졸고 있었다.
직원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어깨를 흔들어 깨운 다음 줄리엣을 놓아주었다.
“다 됐습니다.”
그리곤 거울을 들고 왔다.
무심코 거울을 돌아본 줄리엣의 눈이 반짝 커졌다.
잠이 확 달아날 만큼 화려한 미인이 놀란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도화지 위에 붓으로 그린 듯한 눈매 하며 화사하게 살아난 혈색까지.
“나쁘지 않죠?"
나쁘지 않다고?
엄청난 겸양의 표현이라고 줄리 엣은 생각했다.
스스로의 얼굴이라고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짓을 매일 하라면 도저히 못 하겠지만.’
줄리엣은 화려한 쪽보다는 단정한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스스로의 이목구비에 화려한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어쩌면 지난 반평생의 판단이 잘못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줄리엣은 여전히 거울 속 여자가 낯설어서 어색하게 귓불을 매만졌다.
티아라와 마찬가지로 역시 커다란 루비와 진주로 장식한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무척 아름다워요."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이!”
헬레네가 말한 '누군가가 누구인가 했더니 로이였다.
무려 2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안녕, 줄리엣. 모시러 왔어요, 아가씨.”
로이가 온화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을 봤다고 그새 반가워졌다.
***
그 시각. 테오는 루체른의 중앙연회장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줄리엣의 안전이 걱정스럽다는 이유로 헬레네가 지시한 거였다.
“얘는 어딜 갔어?"
테오가 투덜거리던 무렵, 그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응?”
낯익은 인간이, 아니 라이칸슬로프가 웬 여자와 함께 중앙 연회 홀로 향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뭐하는 놈이야, 저 자식?”
테오는 구시렁거리며 화를 냈다.
'이래서 늑대들이 안 되는 거야.’
하여간 저들은 도저히 신용이 가질 않는다.
'줄리엣을 에스코트해 오기는커녕 엉뚱한 상대를 끼고 나타나?'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테오는 멈칫했다.
그가 에스코트하는 파트너가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미인이었던 것이다.
꼭 붉은 꽃송이를 사람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인상이 강렬했다.
그 외모에 약간 경도되어 굳어 있는 사이, 그들은 쌩하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저 여자는 또 누구야?"
줄리엣이 워낙 맹랑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한테 구애하던 남자가 다른 파트너를 대동하고 간걸 알면, 심지어 기가 막힌 미인인 것을 알게 되면 그래도 기분이 상할텐데.
'……이걸 어쩌지?'
테오는 혼자 안절부절못했다.
"테오? 여기서 혼자서 뭐합니까?”
그때 이미 연회장에 도착해 있던 에셀리드가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아니, 야, 에셀. 좀 들어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로이 그 자식이 "
“줄리엣이요?”
“뭐?”
테오는 생각지 못한 에셀리드의 말에 당황해 물었다.
“그래요. 로이가 에스코트 했잖습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방금 그 늑대 새끼가 웬 여자랑 방금 들어가는 걸 내가 똑똑히-"
……어? 그럼 방금 그 여자가?
“말도 안 돼.”
테오는 경악한 표정으로 연회장으로 뛰어들어갔다.
* * *
상단 일이 바빠 급히 돌아가야 하는 헬레네를 대신해 에셀리드는 졸지에 줄리엣과 테오의 보호자 역을 맡게 되었다.
“테라리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솔론 추기경이라는 사제가 엄청나게 거들먹거리며 그들 일행을 맞이했다.
테라리움은 아름다운 신전 건물이었다.
온통 은은한 아이보리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형 건물은 규모도 규모지만 방문객들의 숙소도 겸하고 있었다.
줄리엣은 테라리움의 생김새가 얼핏 콜로세움 같다고 생각했다.
“올해도 귀한 손님들을 맞게 되어 기쁩니다.”
솔론 추기경이 흡족한 듯 두 손을 비볐다.
테오가 줄리엣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저 인간은 매해 레퍼토리가 똑같더라. 매년 보는데 매번 반가울까?”
줄리엣은 그를 힐끔 보았다. 솔론 추기경이라는 그자는 법황 제 바스티안의 제1 보좌라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으스대기로는 법황인 제바스티안보다 더욱 거들먹거리는 듯한 이미지였다.
그는 품에 보라색 작은 책 비슷한 걸 꼭 안고 다녔다.
경전인가 했더니 48석 가문들을 비롯하여 헌금을 많이 내는 충실한 신도들의 특별 목록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했다.
테오의 표현을 빌자면 신앙심깊고 할 일 없는 부자 리스트라던가.
“특히 올해는 또 한 분의 길 잃은 아기 양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누군진 몰라도 새 물주를 영입했나 보네.”
테오가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길 잃은 아기양'은 새로운 신도를 뜻하는 말이다.
르바탄 가처럼 매년 참석하는 가문도 있지만, 48개의 가문 목록은 매해 바뀌기도 한다고 했다.
“아, 여러분도 와서 인사하시지요!"
잔뜩 흥분한 솔론 추기경이 그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전면이 유리창인 호화로운 연회장 가운데에 어떤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솔론 추기경이 말한 새로운 신도가 누구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그 유난을 떨어가며 장황하게 그를 소개했는지도.
훤칠한 체격과 검은 머리칼, 붉은 눈을 한 남자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비딱하게 서서 나른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칼라일 공작이십니다!"
* * *
이어서 흰 옷을 입고 진홍색 영대를 걸친, 법황이라는 남자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법황이 연설을 시작했지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줄리엣의 귀에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거짓말.’
줄리엣이 계속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여지없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칼라일공작이라면, 북부의......?"
당황한 것은 줄리엣뿐만이 아니었다.
법황의 연설 중임에도 여기저기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들 초유의 사태에 술렁거렸다.
물론 사육제에는 초대받기만 하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그게 규칙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었으면서.'
겨우 용기 낸 줄리엣은 고개를 조금 치켜든 다음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 줄리엣의 옆에 서 있던 로이를 힐끔 보고는 싱긋 웃었다.
"루체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든 귀빈 여러분께 이프리 트의 빛과 가호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법황의 말이 끝나자 우레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줄리엣 역시 박수를 보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뭐지……?'
기분 탓인가?
잠깐이지만 법황이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법황 제바스티안은 겉보기와는 달리 꽤나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소문의 질도 별로 안 좋습니다.”
에셀리드가 귀띔해주었다.
“저 법황 대에 들어 유난히 사망자와 실종자가 많이 나온다더군요.”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법황이 가진 상징성 때문인지 신도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은 것 같았다.
“성하!”
"행운을 기원해주세요!"
“축성을 베풀어 주세요!”
확실히 세간의 기준으로는 멀끔하게 생긴 게 미남이라고 불릴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그에게서 이유 모를 꺼림칙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적어도 쉰 살은 넘었을 텐데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얼굴이라든지 혹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