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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68화 (65/229)

68화.

그리고 그 순간, 언제나 그렇듯가면 같은 미소를 띠고 있던 법황 제바스티안의 완벽한 표정에 금이 갔다.

비탄의 성녀상은 완벽했다.

가시면류관을 쓴 채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었다.

카나벨 마을의 조각가 마그다는 비탄의 성녀상의 완성을 앞두고 오랜 시간 동안 망설였다.

“비탄의 성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여신 이프리트의 마지막 검이라 불리는 비탄의 성녀는 열세 장의 날개를 펼치고 지상에 강림한다.

그녀가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단 한 번뿐이었다.

묵시록에 예언된 종말이 도래하고 심판을 위해 강림할 때.

수백 년간 비탄의 성녀는 예술가들의 승부욕을 자극해 왔다.

예술가들은 그 이름대로 슬픔에 잠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러나 마그다는 과감하게 무표정을 택했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성녀상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조각이 눈길을 끄는 건 비단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비탄에 젖어 있지만 성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단호하고 엄숙했으며 그들이 보아 왔던 그 어느 성녀상보다 압도적이었다.

“이건…."

성녀상이 거기서 거기지 하며 실컷 비웃어 주려 작정했던 솔론추기경마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야말로 심판의 검에 어울리는 위엄이었다.

옆에 있던 솔론 추기경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 것을 확인하고 길리엄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녀상을 흠 하나 없이 운반해야 한다고 멀리 산골 마을에서부터 애쓰던 그간의 노고가 씻은 듯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정신없이 성녀상을 구경하던 솔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길리엄이 가져온 비탄의 성녀상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었다.

솔론 추기경은 괜히 헛기침했다.

“크흠, 뭐……. 이 정도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요. 그럭저럭 봐 줄 만…….”

“성하?”

그러나 길리엄은 솔론 추기경의 구겨진 자존심을 비웃어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길리엄 추기경은 놀란 눈으로 법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법황인 제바스티안은 성녀상의 앞으로 안내된 다음부터 한 마디 감상도 없이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법황을 본 솔론 추기경 역시 깜짝 놀랐다.

“아니, 성하..…!"

"….."

법황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녀상을 우러러보는 자세 그대로, 제바스티안은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서 울고 있었다.

그건 상당히 기묘한 광경이었다.

길리엄이 루체른에서 무려 세명의 법황을 모시는 이래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 길리엄은 제바스티안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이란걸 처음 알았다.

이단 심문관 출신의 피도 눈물도 없고 수상한 추문이 끊이질 않는 작자가 성녀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니?

길리엄은 물론이고 솔론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솔론은 곁눈질로 성녀상을 다시 힐끔 보았다.

무척 훌륭한 조각이긴 하지만 압도되어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성하께서 저 저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던가?

앙숙 관계인 두 추기경이 나란히 입만 딱 벌리고 있는데, 법황이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길리엄 추기경.”

“예?”

"이걸 만든 조각가가 어디의 누구라고 했습니까?”

“아, 동부 카나벨이란 작은 마을의 신앙심 깊은 조각가인데……. 그녀의 이름은 마그다라고 합니다.”

"내 당장 그자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 !"

“예? 성하! 하지만!”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게 빠르겠군요.”

법황 제바스티안은 두 원로 추기경들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남겨진 두 추기경은 서로의 처지도 잊고 한참을 나란히 눈을 끔뻑였다.

5. 비탄의 사육제

줄리엣은 조용히 움직이는 마차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깎아지른 바위처럼 솟아오른 대리석 건물들의 모양이 예쁘다기 보다는 이상했다.

번쩍번쩍한 황금을 씌워 놔서 그런가.

“사육제는 처음이지, 줄리엣?"

헬레네의 물음에 줄리엣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네. 루체른도 처음이에요.”

"어머나.”

예상치 못한 답변에 헬레네는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다행이구나! 그럼 이번 기회에 재밌는 걸 잔뜩 해 볼 수 있겠네.”

줄리엣은 그녀의 너스레에 희미하게 웃었다.

줄리엣은 지금 외숙모인 헬레네를 따라 루체른의 사육제에 참가 하기 위해 방문 중이었다.

루체른은 법황과 법황청이 다스리는 조그마한 도시국가였는데 사육제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48개의 가문뿐이었다.

'루체른의 48석이라고 하던가.'

그건 법황청의 귀빈으로 대접받을 자격을 갖춘 48개 가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기부금을 왕창 냈다는 얘기지.”

뒤에서 테오가 줄리엣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줄리엣은 픽 웃었다.

신앙심 깊은 동부 사람답게 의외였지만 리오넬 르바탄은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다. 그는 꾸준히 기부금을 내 왔고 매년르바탄 가문은 사육제에 초청되었다.

궁금해하는 줄리엣에게 테오는 그동안 질리도록 구경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도 재밌지도 않다며 투덜댔다.

줄리엣은 습관적으로 목에 걸고 있던 열쇠 모양 은세공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돌아가신 줄리엣의 어머니, 릴리안도 신앙심이 깊은 편이었다.

줄리엣이 아주 어릴 때 많이 아팠던 적이 있는데 릴리안이 법황청에 요청해서 대신관급 치유 사제를 보내 준 적도 있다고 했다.

정작 줄리엣은 조금도 기억을 못했지만 말이다.

반면, 레녹스를 따라 북부에 머무는 동안 줄리엣은 한 번도 신전에 가 본 일이 없었다.

북부에는 신전이란 게 아예 없었다.

레녹스를 비롯하여 북부 사람들은 종교에 무관심했고, 줄리엣도 달리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신전에 방문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다행이지, 뭐.'

최소한 이곳에서는 레녹스 칼라일 공작과 우연이라도 마주칠 일 없을 테니까.

죽었다 깨나도 칼라일 공작가가 48석에 드는 일은 없을 터였다.

줄리엣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레녹스 칼라일과 우연히 만났다 헤어진 후로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줄리엣은 알제와 카르카손을 오가며 아무 생각 없이 푹쉬었다.

그 이후로는 레녹스가 찾아오는 일도, 그의 소식이 들려오는 일도 없었다.

몇몇 정상급 상단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오가던 기밀인 '칼라일공작가의 결혼식'에 대한 진행상황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상단과 진행되던 거래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줄리엣은 일부러 관심을 끊었다.

슬슬 줄리엣이 수도의 백작가로 돌아가려고 채비하는 찰나, 헬레네가 루체른에 가서 사육제를 즐기다 오자고 제안했었다.

"루체른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게 뭘까?”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헬레네가 앞서가면서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하나?

줄리엣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정작 헬레네의 아들인 테오와 고용 마법사인 에셀리드의 표정은 ‘또 시작이시네’에 가까웠다.

"음, 신전 의식이요?"

“그래! 쇼핑이야!”

헬레네는 쾌활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헬레네는 그대로 줄리 엣을 이끌고 루체른의 상점가로 향했다.

작은 도시국가인데도 방문객이 많기 때문인지 이곳의 상점가는 제국 수도의 부티크 거리인 '백양나무 길'과 맞먹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헬레네의 소비 역시 대륙의 5대 상단 중 하나인 메리 골드상단의 상단주다운 씀씀이였다.

“저거!”

“이것도!”

“아냐, 아냐, . 색 다른 거!"

헬레네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쓸어 담았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 망설여졌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누군가와 쇼핑을 나오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즐거웠다.

게다가 지난번에 한번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어요, 숙모님…….” 했다가 “일주일간 하루에 삼백 골드씩을 쓰고 와라.”라는 숙제를 받은 이후로는 절대로 줄리엣은 헬레네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얼핏 소년으로 착각할 만큼 짧고 반짝거리는 금발을 가진 헬레네는 센스 또한 뛰어난 편이었다.

헬레네는 줄리엣을 끌고 루체른 시내의 모든 부티크를 한 바퀴 돌았다.

어쩐지.

부티크의 점원들은 헬레네의 말을 신처럼 받아 적곤 했다.

줄리엣은 헬레네가 시키는 대로 모자를 써 보고, 장갑을 껴 보고, 구두를 신어 봤다.

“저녁에는 연회가 있단다!"

그러나 루체른의 모든 상점가를 빙 돈 다음에도 줄리엣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이 첫날이니까 오늘이 가장 중요해! 알지?"

헬레네는 활짝 웃으며 줄리엣을 부티크 점원들의 손에 떠넘겨 버렸다.

“확실하게 해!”

어딘지 박력 있는 말과 함께.

잠시 후 점원이 드레스 하나를 들고 나왔다.

줄리엣은 수백 년 전쯤 유행했을 것 같은 드레스를 받고 조금 당황했다.

어깨선이 직선으로 파이고, 몸의 곡선을 최대한 숨긴,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신전에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북부나 수도에서 입던 의상의 의분위기와는 꽤 달라서 물어봤더니 루체른에는 나름의 드레스 코드가 있다고 했다.

헬레네의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줄리엣은 그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다.

“아가씨, 허리를.”

점원이 구식 코르셋으로 몸을 을조이기 전까지는.

그만두라는 비명이 목 끝까지 튀어나왔다. 하지만 점원은 그런 줄리엣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는 듯 재빨리 선수를 쳤다.

“단주님께서 확실하게 하라고 하셨답니다!”

그들은 코르셋으로 줄리엣의 허리를 마구 조여 댄 다음, 그 위에 흰 네글리제와 붉은 드레스를 입혔다.

그리곤 올이 가늘고 숱이 많은 연갈색 머리칼은 여러 번 빗질하더니, 매끄러운 머리칼을 반만 땋아 위로 올려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루비와 진주로 장식한 티아라를 썼다.

“세상에.”

몇 시간 뒤, 줄리엣을 구경하러 잠시 들른 헬레네가 감탄했다.

“몰라보게 예쁘구나, 줄리엣!”

그리곤 헬레네가 소곤소곤 비밀 얘기를 하듯 말해 주었다.

“이따 누가 에스코트하러 올 거 란다. 기다리렴.”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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