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저, 이제 그런 거 안 하고 싶어요.”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언제든 놓아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제 쪽이, 실은 결코 놓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쪽이란 것을.
그를 참아주고 있던 것은 줄리 엣이었다.
알제의 청금석 광산만 해도 그랬다.
줄리엣이 속상해할 것을 레녹스칼라일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저, 미련하게 폭우를 다 맞고 홀로 돌아와 앓아누운 여자에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불완전한 감정을 표현하는 말보다는 숫자를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다. 사실은 그게 편리했을 뿐이다. 영리한 줄리엣은 사실은 알면서도, 참아 줬던 것이다.
그의 애정은 비열하고 약삭빨라서, 결코 손해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고,
'젠장.’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냥, 저는 이제 지친 것 같아요.”
줄리엣이 그의 이기적인 면에 지쳐 떠나버리란 것을.
사실은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직시하면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부에서 줄리엣 모나드란 여자가 어느 정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직시해야 했을테니까.
그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해 준대도 안되고, 가족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소용없을 테다. 그럼 대체 뭘 줘야 다시 예전처럼…….
레녹스 칼라일은 제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줄 수 없는 것을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아이는 그 중 후자의 영역이었다.
그는 인정해야 했다.
"레녹스, 우리는 미래가 없었잖아요.”
“.… ”
"젠장.”
미래가 없는 게 아니라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다시 찾아가서 애걸을 해서라도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답을 듣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그는 그 백사장을 다시 찾았다.
"계속 따라오면 어떡해? 난 널 돌봐줄 수 없어.”
하지만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다가도, 결국 그녀는 어린 생명을 품에 안았다.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지만이야.”
정체 모를 짐승 새끼를 끌어안고, 속삭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엿들었을 때.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그는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그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생각했던 계획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이걸 사시겠다고요?"
“그래.”
"경관이 그리 좋진 않습니다. 바다가 탁 트여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아래 빌라들이 답답하게 꽉막아놔서……."
집주인이라던 남자는 아래의 작은 파란 지붕 저택을 눈엣가시보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것 때문에 그가 집을 팔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그런 사정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새벽공기가 서늘한 이른 시각에, 혹은 저녁 시간에.
그는 언제든지 문을 열면 백사장을 산책하는 연갈색 머리칼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특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이른 저녁 무렵이 되면 줄리엣은 검정 개인지, 악마의 하수인인지 모를 볼품없이 생긴 새끼 동물과 함께 맨발로 백사장을 걸었다.
저런 볼품없이 생긴 짐승 새끼조차 안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왜 나는, 너는 왜 나를…….
"대체 저따위가 뭐가 귀엽다는 거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삐약!”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문득 제 처지가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짐승 새끼나 다름없다.
는 걸 깨달았다.
교활하고, 나약해서.
어떻게든 그녀의 관심 한 조각이라도 끌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처지.
그래서, 애초에 저 동정심 많은 그 여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걸까? 그의 내면의 추악함과 어리석음을 알아보고, 그를 동정했기 때문에?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혼도 싫다, 돈도 가족도 싫다.
고 한다면,
역시 아이밖에 없나?
줄리엣은 어리고 약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놓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온전히 그 자신이 아닌, 줄리엣의 동정심에 기대어야 한다는 것이 기막히고 비참하고 한심하지만.
그는 자존심 같은 것은 이미 다 그녀가 제게서 도망치던 날에 버렸다.
그러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저는 이제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적어도, 이런 식으로 절벽 위에 틀어박혀서 몰래 지켜보기나 하는 한심한 짓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 * *
늙고 지친 사제 하나가 온통 대리석으로 지어져 새하얀 법황청홀에 들어섰다.
"이프리트의 가장 비천한 종, 길리엄이 돌아와 첫 번째 종께 인사드립니다.”
그의 이름은 길리엄 추기경으로 법황청의 원로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 드디어!”
젊은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길리엄을 맞이했다.
화사한 미소와 새하얀 예복, 어깨에 걸친 진홍색 영대.
루체른의 젊은 새 법황, 제바스티안이었다.
제바스티안은 얼굴만 봐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제바스티안은 만면에 예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그러자 무릎 꿇은 길리엄 추기 경이 묵묵히 내밀어진 법황의 손등에 입 맞추고 일어났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길리엄 추기 경.”
법황, 제바스티안이 일흔 살 노인인 길리엄을 인자하게 칭찬했 했다.
노인인 길리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긴 기다림에 걸맞은 응답을 주셨던가요?”
얼핏 듣기에는 치하하는 것 같지만 명백히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
사실 길리엄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력한 차기 법황 후보였다.
반면 제바스티안은 이단 심문관출신으로 온갖 수상한 소문이 끊이질 않는 사제였다.
길리엄과 제바스티안이 법황 선출 회의에서 맞붙었을 때, 모두 길리엄이 차기 법황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새파랗게 젊은 제바스티안이 새법황이 되었고, 그는 법황이 되자마자 길리엄을 불러 온갖 자질 구레한 일을 다 시키기 시작했다.
“예, 성하. 카나벨 마을의 마다가 정말로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길리엄의 이번 임무는 올해 사육제에서 공개할 새 조각상 '비탄의 성녀’를 산골 마을에서 직접 운반해 오는 것이었다.
칠순 노인에게는 다소 힘겨운 여정이었다.
“길리엄 추기경에게 딱 맞는 임무였던 것 같습니다, 성하! 역시 탁월하십니다!”
법황의 옆에 서 있던 솔론 추기 경이 비열하게 웃었다.
솔론은 길리엄과 같은 지위의 의추기경이었지만, 제바스티안이 법황이 되자마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경박한 인사였다.
"이크. 하지만 임무도 좋지만 목욕도 좀 하시고, 응?"
솔론 추기경은 킬킬거리며 코를 쥐어 잡는 시늉을 해 보였다.
길리엄은 묵묵히 웃기만 했다.
“그래, 완성된 조각상은 어디 있습니까? 어렵게 완성된 것이니 그 자태를 먼저 확인해 두고 싶군요.”
“암요. 어렵게 가져온 것인데 , 흠이라도 있으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법황의 말에 솔론 추기경이 이 죽거리며 아첨하듯 맞장구쳤다.
길리엄이 물러가 여독을 풀고 쉬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속뜻이었다.
일흔을 넘긴 노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였지만 길리엄은 예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솔론 추기경께서도 함께 오시지요.”
당장이라도 오랜 여독으로 뼈마디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길리엄은 조각상을 임시로 보관하는 밀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 했다.
길리엄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있었다.
카나벨 마을의 마그다는 신앙심깊은 조각가였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완벽한 작품을 완성해 주었다.
비록 그가 이전에 맡았던 일들에 비해서는 하잘것없는 업무였지만, 마그다를 만나기 위해 그 고생을 해 가며 작은 마을까지 직접 찾아갔던 길리엄은 흡족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길리엄은 이프리트 여신의 안배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펄럭.
길리엄이 손수 조각상을 덮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검은 천 아래에서 순백의 대리석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