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칼라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준비한 재회는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이 아니었다.
붙잡으면, 다시 찾아내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배 속의 애는 어떤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남편이란 인간은 대체 어떤 새끼인지.
대답을 들어야 할 질문이 끝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깍지껴 잡은 채 한참을 그대로 침묵하고 있었다.
앞뒤도 맞지 않는 다짐을 수백번 되뇌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채로운 방식으로 어떻게 죽여야 할까 고민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정작 줄리엣에게는, 그를 속이고 달아난 여자에게는.
상상 속에서조차 그녀에게는 끝내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는 것 역시.
“.....… 그 꼴은 또 뭐야.”
“아.”
물이라도 흠뻑 뒤집어쓴 것처럼 치맛단은 젖어 있고, 구두는 보이지도 않았다.
“좀…… 엉망이죠.”
줄리엣이 민망한 듯 어색하게 뺨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빡!”
웬 소리가 들려 내려다보니 족제비인지 이상하게 생긴 고양이인지 모를 검은 짐승이 긴 꼬리로 그녀의 발목을 감고는 그를 경계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맥이 풀렸다.
멀쩡해 보여서 화가 났고 다친 데가 없어 안도했다.
배 속의 아이가 무사하냐고 물어야 하는지,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조차 모호했다.
방계에서 양자를 들이면 들였지 적어도 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줄리엣에게 제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제게서 그렇게 유유히 도망칠거면 보란 듯 잘살기라도 할 것이지.
저 꼴은 또 뭐란 말인가.
머릿속에는 생각이 가득한데 차마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들 뿐이었다.
그는 제 감정을 뭐라고 토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에게는 유치한 과시밖에는 남지 않았다.
여자 하나 붙잡겠답시고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가장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결혼식을 준비해 뒀노라고?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 결혼하신다고 들었어요.”
"......"
“축하드려요. 직접 참석하진 못하겠지만…….”
“뭐?”
“제가 가면 그분도 좋아하지 않으실 거예요.”
“…… 진짜 그렇게 생각하나?"
“네.”
돌겠군.
“줄리엣 모나드.”
“네.”
“내가 빌면 되나?”
“.....… 전하?”
“네가 없으면.”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신부가 없이 무슨 결혼식을해?”
"....… 네?”
줄리엣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그 결혼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것 없는 것처럼.
멍하니 그를 보던 줄리엣이 갑자기 불쑥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요?”
“뭐?”
“저 이제 그런 거 안 할래요, 전하.”
'그런 거'라니.
그러나 줄리엣의 말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항상 그러셨잖아요. 사람 적선 하듯이.”
말하는 줄리엣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레녹스는 그녀가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줄리엣도 알았다. 선심 쓰듯 이따금 던져주곤 하는 호의.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그 호의와 한 조각 애정에 목말라하면서도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비참해야 했는지.
“제게 사과할 필요도, 저를 책임질 필요도 없으세요."
뭐라고 해야 할까, 줄리엣은 말을 골랐다.
그는 선천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딱히 악의가 있지도 않았다. 한 때는 그래서 더 미웠다.
“전하도 아시겠지만, 우리한테는 미래가 없었잖아요."
줄리엣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생겨도 낳게 하지 않아.”
“제게 아이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젠장, 그러니까 결혼해주겠다고 했잖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레녹스는 후회했다. 이런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전하.”
그러나 정작 줄리엣은 담담히 말했다.
“저는 아이를 낳으면, 저처럼 살게 하지 않을 거예요.”
줄리엣이 달리아와 프리실라 공녀, 혹은 다른 아가씨들을 볼 때 항상 부러워한 것이 있었다.
사랑받고 있는 아이는,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언제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건 제가 지금 전하와 함께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또다시 똑같은 일의 반복이겠지.
“저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감내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네가 바랐던 거잖아? 괜찮아, 하고 넘기기에는 그녀는 너무 지쳤다. 줄리엣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저한테 찾아 오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더 이상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지막 말에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음…… 그리고요.”
줄리엣은 정말로,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듯 태연하게 말했다.
"죄송한데, 해안가까지만 태워주시겠어요?”
“구두가…… 망가져서요.”
그녀를 억지로라도 끌고 갈 기세였던 남자는 줄리엣을 말없이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줄리엣이 말했던 대로 해안가에 그녀를 내려주고 떠났다.
**
다음 날 새벽, 줄리엣은 새끼 용을 데리고 바닷가 뒤쪽 숲으로 갔다.
'이 숲에는 토끼나 사슴도 있고 얘는 전설 속의 마수니까, 알아서 사냥해서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줄리엣은 계속해서 새끼 용의 거처를 두고 고민했다.
새끼 용은 난생처음 보는 숲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줄리엣이 시험 삼아 돌아서서 조금씩 멀어지자,
"삐약!“깜짝 놀라며 새끼 용이 달려왔다.
아직 날개를 쓸 줄은 모르는지다급히 오다가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서 도도도 쫓아왔다.
"……계속 따라오면 어떡해?"
줄리엣은 그런 새끼 용을 보다가 백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널 돌봐줄 수 없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끼 용은 줄리엣에게 달라붙어 딱 막 애교를 떨었다. 절대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하긴, 태어난 지 사흘 된 네가 뭘 알겠니.’
문득 왈칵 울음이 터졌다.
"삐.”
“…....."
새끼 용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줄리엣의 곁에서 같이 구슬프게 울었다.
"내 한 몸 챙기는 것도 빠듯하다고, 알겠니?"
“.....…삐약?”
새끼용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지만이야.”
줄리엣은 그런 새끼용을 안아들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것인지 이 용은 알까.
"삐!”
줄리엣이 안아 들면서 갑자기 높아지자 새끼 용은 신난 듯 꼬리를 탁탁 털었다.
* * *
쾅!
알제의 해변에서 돌아온 직후, 레녹스는 옷을 벗지도 않은 채 그대로 커다란 욕조로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욕실 안에는 금방 자욱한 수증기가 가득 찼다. 현기증이 오를 정도로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천천히 익사하는 것처럼…….
그는 가라앉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었다.
'어떻게 가만두지 않을 건데?'
머리카락 한 올마저 무사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만나기만 한다면.
만나면? 만나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게 아니다.
그는 오만했던 거다.
아직도 그녀가 제게 마음이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줄리엣 모나드의 순진한 애정은 간파하기 쉬웠다. 그에게 실망하고 떠나겠다 말하는 순간마저도 그녀는 제 감정에 솔직했었다.
"그동안 착하게 굴었잖아요, 저.”
오직 제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 했다는 걸 모두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줄리엣다웠다.
"그러니까 떠나게해주세요, 네?”
떠난다고? 나를?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는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그가 줄리엣 모나드를 놓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줄리엣 모나드는 편리한 연인이었다. 과거의 인연으로 그가 손을 내밀 때마다 유순하게 안겨왔다.
다른 여자들처럼 성가시게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지도 않았고,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는 편리한 여자의 존재가 거꾸로 결코 떠나보낼 수 없는 역린이 된 것은.
"떠나게 해주세요.”
"그동안 저, 꽤 잘하지 않았나요?”
언제나 나붓이 눈매를 내리까는 것밖에 모르던 여자가 먼저 이별을 입에 올린 순간부터.
바람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