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65화 (62/229)

65화.

***

홀로 남겨진 줄리엣은 멀어지는 두 남자의 인영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삐악!”

지치지도 않고 졸졸 따라오는 혹을 달고서.

축제 분위기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줄리엣은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서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다.

"아얏.”

숲을 건너가려고 언덕에 발을 디디자마자 구두가 진창에 빠진 것이다.

"으"

어쩐지, 구두가 마음에 걸리더라니.

줄리엣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가서 구두를 갈아 신고 올까 싶었지만 이제와 돌아가기에는 거리도 시간도 애매했다.

줄리엣은 잠시 고민하다가 구두를 벗어 들고 걷기 시작했다.

해안가 뒤에는 야트막하게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고 그곳을 넘어가면 그녀만 아는 호수가 나왔다.

호수에 도착한 줄리엣은 엉망이 된 구두를 벗었다.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한담?'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될 대로 되라지.’

줄리엣은 구두를 멀리 던져 버린 다음 호수 끄트머리에 앉아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그녀는 작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비가 왔지.'

줄리엣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정말로 탐스러웠다.

그리고 레녹스는 오지 않았어, 결국..

어차피 알고는 있었다.

"저랑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작년 이맘때쯤에도 줄리엣은 알제에 있었다. 다만 그때는 축제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 레녹스는 알제 지역에 새로 발굴된 광산을 매입하느라 바빴다.

그를 따라 동부까지 오기는 했지만 줄리엣은 하루 종일 낯선 사람들 가운데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나 바빴던지 여태껏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줄리엣의 생일조차 그냥 넘길 정도였다.

그런 것쯤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선물로 꼭 받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날 아침, 줄리엣은 칼라일에게 간청했다.

"오늘 밤에 보름달이 뜬대요.”

"그래서?”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뒤에 호수가 있는데 그곳의 풍경이 근사하다더라고. 생일 선물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평소에는 한 번도 조른 일이 없었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하려 했었다.

"그러지.”

그래서 지나가듯 승낙이 떨어졌을 때 줄리엣은 그날 이른 저녁부터 전에 없이 들떴다.

하지만 그날 자정이 지나고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줄리엣은 은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물은 적 없었다. 바빴다거나, 잊었다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

시시한 이야기다.

“생일 축하해, 줄리엣.”

줄리엣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듣고 싶었지만 끝내 듣지 못했던 한 마디였다.

“빡?”

호수의 표면을 보며 신기해하던 새끼 용이 대꾸했다.

줄리엣은 말없이 손을 뻗어 어린 용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이렇게 지나가 는구나.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데크 위로 다리를 끌어 올렸다.

얼추 엉망이 된 발을 씻어 내긴했다. 동부의 겨울은 초봄처럼 다사롭긴 했지만 그래도 밤에는 꽤 추우니 슬슬 돌아가야 했다.

그때였다.

히히힝!

멀리서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엣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먼발치에서부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온 말이 멈춰 섰다.

“로이? 벌써 왔어요?”

말에서 내려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다가오는 키 큰 남자의 실루엣을 향해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온다더니 정말로 빨리리…….”

그러나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남자의 얼굴이 달빛 아래 온전히 드러났을 때, 줄리엣은 은할 말을 잃었다.

“..……줄리엣.”

꼬박 1년을 늦은 남자였다.

**

"늦으셨네요, 전하.”

줄리엣은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줄리엣은 제가 미쳐서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와 능숙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숨이 턱에 닿도록 말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가 숨을 고르는 사이 그녀가 도망가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처럼 줄리엣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았다.

그러나 줄리엣 역시 뭐라 할 말을 고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너.”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에 늘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줄리엣은 어쩐지 레녹스가 애달프고 당황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름달이 비치는 호숫가와 풀벌레 우는 고즈넉한 소리.

그 외에도 지금의 풍경을 설명하는 무수히 많은 단어들과 세상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생긴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줄리엣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 아무렇게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을 뱉었다.

"안녕, 레녹스, 잘 지냈어요?”

그러나 남자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줄리엣은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덜 비참하게 보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오랜 습관처럼.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지도 몰랐다. 몇 번인가, 그와 재회하는 것을 상상해 보긴 했지만 최소한 이런 식은 아니었다.

줄리엣은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어쩌지 못하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제 아랫배를 향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차.'

그제야 큰일이 났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를 떠나기 직전, 그녀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줄리엣 모나드.”

눈빛만으로 거뜬히 사람을 죽일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짓씹듯 내뱉었다.

“그 새끼가 좋아?”

* * *

“....… 안녕, 레녹스."

그는 안녕하지 못했다.

"잘 지냈어요?”

그는 잘 지내지 못했다.

평범한 마을 아가씨처럼 발그레상기된 뺨과 반짝이는 눈.

단정하게 땋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옷차림새를 한 줄리엣이 활짝 웃었다.

지난 몇 주간 그를 돌아 버리도록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악몽이었다는 양.

그는 그 풍경을 어지럽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알제, 그리고 청금석 광산. 달축제.

희미한 단어들이 뒤섞이니 어렴풋이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1년 전, 그들은 이곳에 있었다.

"달구경을 하고 싶어요."

말수가 적은 여자는 소리 내어 뭔가를 요구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웬 달구경인가 싶었다.

그들이 머무는 저택에서도 질리도록 보이는 풍경인데 대체 뭐가 특별하다고.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지.”

별생각 없이 승낙하자 드물게도 환히 웃던 게 기억났다.

"고맙습니다.”

달구경에 동행하는 게 고마울 법한 일인가. 시답잖은 일에 일일이 고개를 조아릴 일인가?

그러마고 대답해 뒀지만 그 일이 다시 생각난 것은 이미 야심한 시각이었다.

쿠르릉.

'이런.’

창밖을 내다보니 달구경은커녕 먹구름에 장대비가 쏟아져 보이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달구경은 물 건너갔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고 난 다음 날에야 알았다.

달구경이라는 것이 이 지역의 새해 첫날 열리는 달 축제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걸. 동시에 1년 중 유일하게 기억했던 그녀의 생일이 지나가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뭐예요?”

그는 급한 대로 청금석 광산의 권리증을 줄리엣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쯤이면 평소 하던 것의 몇 배 값어치니 늦은 값은 충분하겠지 싶어서.

그러나 서명만 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음에도 그녀는 빈칸을 몇 날 며칠이고 방치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안으로 틀어박혔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의 여자가 이불 속에서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펄펄 끓는 열 감기 때문에 꼬박 닷새를 앓아누웠다가 깨어났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그 기억이 왜 하필 지금에야 떠올랐을까.

“음……."

잡힌 손이 불편한 듯, 혹은 그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거북한 것인지. 줄리엣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달려오는 내내 수십, 수백 번을 곱씹었다. 줄리엣과 그 자신의 결론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가 해야 할 말 역시 하나뿐이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줄리엣을 찾아내서 그녀가 안전한지 상태를 확인한 다음 설득하는 것.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그 애를 제자식으로 키우는 것을 포함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겠노라고.

그러나 그는 줄리엣을 눈에 담는 순간 깨달았다.

“줄리엣 모나드.”

레녹스 칼라일이란 인간의 밑바닥이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말이다.

“그 새끼가 좋아?”

정작 입 밖으로 낸 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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