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짐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몇 시간이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줄리엣은 마차에서 내려서 편지봉투에 쓰인 주소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눈앞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 모래에 파도가 부서지는 백사장을 따라서, 울타리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모형처럼 잘 지어서 있었다.
어진 작고 아기자기한 집들이 늘 그중에서도 해안가 끝 야트막한 절벽 위에 지어진 아담한 파란 지붕 집이 보였다.
“저 집이에요!”
잔뜩 들뜬 줄리엣이 가리킨 집을 본 로이는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줄리엣이 좋아하는 사람?'
로이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가는 동안 어느새 현관 앞에 도착한 줄리엣은 문을 두드렸다.
흰 문이 달칵 열리면서 밖으로 나온 사람은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부인이었다.
“어머, 아가씨!"
"안녕, 아네스!”
줄리엣이 활짝 웃었다.
*
“이렇게 빨리 오실 줄 몰랐어요!”
아네스는 그들을 반갑게 안으로 들였다. 밖에서 봤던 것만큼 아기자기한 저택이었다.
현관 입구에서 로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줄리엣의 좋아하는 사람이 저 분이었군요.”
"아네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예요.”
줄리엣이 칼라일 공작을 따라 북부로 떠났을 때 아네스가 그녀와 함께 갔었다.
아네스가 결혼해서 떠나기 전까지 그녀는 줄리엣에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부에서 큰 의지가 되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친구를 만들기 어려워하는 줄리 엣에게는 특히 자매 같은 존재였다.
“왜 그렇게 봐요?"
“나도 줄리엣한테는 그저 좋아하는 친구인가 해서요.”
줄리엣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묻기도 전에 로이는 싱긋 웃더니 앞장서서 가 버렸다.
그러는 동안 아네스는 줄리엣에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안고 와 소개시켜 주었다.
“안아 보실래요?”
“.....… 그래도 돼?"
줄리엣은 잔뜩 긴장해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어설프게 받아 들었다.
태어난 지 한 달 됐다는 아네스의 아기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꽤 묵직했다.
“따끈따끈해.”
처음 마주하는 아기의 촉감에 에눈을 동그랗게 뜬 줄리엣이 속삭이자 아네스가 후후하고 웃었다.
"아기들은 원래 그래요. 체온이 높답니다.”
줄리엣은 낯선 사람에게 안겼는데도 울지도 않고 말똥말똥한 아기가 신기하고 귀여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떨어뜨릴까 봐 무서웠기 때문에 얼른 아네스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신기해하는 눈으로 아네 스가 아기를 어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줄리엣은 문득 얼마 전의 일이 떠올라 생긋 웃었다.
실피움과 겨우살이. 그녀를 돕기 위해 했던 일들이 칼라일로 로네스는 짐작이나 할까?
하여금 어떤 오해를 낳았는지 아
“모리스 씨는?”
“어휴,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답니다. 그래도 밤늦게는 돌아올 거예요!”
아네스의 남편은 배를 타고 대륙 이곳저곳을 다니는 상인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먼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곧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줄리엣은 로이에게 부탁해 가지고 온 바구니를 내렸다. 바구니 안에는 본래 으깬 달걀을 듬뿍 넣은 특제 샌드위치가 들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안에서 머리를 내민 것은 샌드위치가 아니라 새끼 용이었다.
“어머나!"
“빠악!"
경악한 아네스가 물었다.
“이게 무슨 동물이에요, 아가씨?”
"너.”
새끼 용은 후다닥 눈치를 살피며 바구니 뒤로 숨었다.
심지어 이 천덕꾸러기 용은 차가운 우유 두 병을 제외하고는 바구니 안의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운 상태였다.
***
아네스는 동부식 정찬으로 그들을 배불리 대접했다.
생후 1개월 아기와 생후 3일 새끼 용은 그럭저럭 정신연령이 비슷한 모양이었다. 아네스가 아기다루듯 대해 주자 새끼 용은 유순하게 굴었다.
점심 식사 후, 아네스는 아기를 유모에게 맡기고 줄리엣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잔뜩 별렀다.
“오늘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게 만들어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그게 제 특기였잖아요!”
아네스는 손재주가 좋아서 가늘고 숱이 많아 잘 엉키는 줄리엣의 머리도 비단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휴, 가만히 좀 계세요.”
아네스는 줄리엣의 머리를 땋았다가 푸는 것을 반복했다.
“머릿결이 이게 뭐예요!"
"미안…….”
그러는 동안 아네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결혼 뒤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정착하면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면서도 갑자기 찾아온 줄리 엣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공작가는 왜 떠났으며, 왜 이런 행색으로 갑자기 찾아온 건지.
그리고 동행하는 낯선 남자는 누구인지도.
고마운 일이었다. 줄리엣도 굴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단장이 끝나자 아네 스는 옷장에서 나풀거리는 옷을 꺼내 왔다.
"머리는 이만하면 됐고…… 이 이걸 입어 보세요. 얼른요!"
디른들(Dirndl)이라고 불리는 그 옷은 동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통 의상이었다.
디른들은 부드럽고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안에 받쳐 입고 그 위에 코르셋을 변형한 어두운 색 보디스와 풀 스커트를 얹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아네스가 가져다준 것은 줄리엣이 알고 있는 전통 의상의 모양과 다소 거리가 있었다.
짧은 치마와 목선을 강조하는 블라우스, 손목을 덮는 치렁한 퍼프소매와 붉은 치마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본래 풀 스커트여야 할 어두운 톤의 붉은 치마는 발목이 훤히 보일 정도로 짧았다.
“이게 유행인걸요!"
아직 줄리엣이 옷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네스는 거 듭 강조했다.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줄리엣은 어쨌든 아네스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입었다.
수도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제외하면 이런 길이의 치마는 입지 않는다.
줄리엣은 익숙지 않은 차림에 불안해져 괜히 구두 신은 발목을 까딱거리다가 아네스에게 눈총을 받았다.
"아네스는 안 가?"
“안 돼요. 저 오늘은 아가씨랑 못 놀아 드린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네스는 의미심장하게 로이를 곁눈질했다.
“흠흠! 두 분만 다녀오세요! 이 마을의 달 축제는 꽤 유명하답니다.”
동부는 태양력이 아닌 월력(月歷)을 쓰는 전통이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동부의 진짜 새해는 이 축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 식으로 날짜를 계산하면 오늘이 새해인 거예요.”
첫 번째 달의 축제.
이름은 거창하지만 간단하다.
말 그대로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첫 번째로 보름달이 뜨는 날부터 시작되는 마을 축제였다.
작은 마을의 축제가 흔히 그러하듯 뭔가 특별한 점들보다는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에 의의가 있는 축제이기도 했다.
“재밌게 놀다 오세요!"
아네스에게 등을 떠밀린 줄리엣과 로이는 얼결에 초저녁부터 축제가 한창인 마을로 내몰렸다.
“그럼 가실까요?"
로이가 씩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간만의 들뜬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사위가 캄캄해졌다.
달 축제의 이름값을 하는지 새카만 하늘에 뜬 달이 평소의 세배는 되어 보였다.
"저쪽으로 갈까요?"
“아뇨.”
줄리엣이 로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저쪽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거기가 달을 보기에는 더 좋아요.”
로이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보다가 말했다.
"전에도 와 본 적 있군요?”
“네.”
줄리엣은 짧게 말하고 공연히 생글거렸다. 그가 더 캐묻지 않기를 바랐다.
“좋아요. 거기로 가죠.”
그때였다.
“로이 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목소리의 주인은 줄리엣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나단이라고 했던가.'
나단은 황급히 달려와 로이를 붙잡았다. 곁에 있던 줄리엣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줄리엣은 그와 늘 붙어 다니던 엘자가 보이지 않는 게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로드께서 …….”
“...… 키탄을 -."
줄리엣은 한 발 물러나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아 보였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로이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졌다.
이윽고 대화를 마친 그는 줄리 엣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줄리엣, 나는.”
“가요!”
상황이 다급해 보이기에 줄리엣은 얼른 외쳤다. 로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괜찮아요. 혼자서도 갈 수 있는 걸요.”
“.....… 정말로, 빨리 올게요."
“네.”
이윽고 두 사람이 떠났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