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63화 (60/229)

63화.

*

“그래, 오늘 떠나겠다고?”

“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리오넬 르바탄의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로 가려고?”

“알제로 갈 거예요."

알제는 카르카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 도시였다.

애초에 줄리엣이 정했던 목적지였기도 했다. 그 사이 다사다난해서 여러 곳을 거치기는 했지만,

“알제라, 그 다음엔?"

"글쎄요. 모르겠어요.”

줄리엣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이후에는 수도의 백작저로 돌아가야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싫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까 무서웠다.

리오넬은 외손녀를 힐끔 보다 물었다.

“혼자서 위험하지 않겠느냐?”

"괜찮아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또 놀러 올게요. 건강하세요, 할아버지. 그리고….. 걔도 잘부탁드려요.”

새끼 용은 두고 가기로 했다.

주인이 리오넬 르바탄이라면 굶을 걱정도, 나쁜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염려도 없을 테니까.

짐마차에 짐이 실리기를 기다리면서 줄리엣은 날씨를 확인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 올해 는’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작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왔고, 또 너무 추웠다.

줄리엣은 습관적으로 손안의 거울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레녹스가 아직도 아르고 스의 눈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다면 정말 이 거울 조각 때문에 그녀의 위치가 탄로 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냥 좋게 생각하자.'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얄팍한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줄리엣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디 가시는 모양이죠?”

불쑥, 뒤에서 다가온 손이 줄리 엣의 손에서 짐 가방을 받아 들었다.

“로이!”

줄리엣은 반갑게 그를 맞았다.

며칠 전, 카티아에 다녀온다고 했던가.

줄리엣으로서는 미스터리였다.

지도상으로 보면 카티아는 동부의 중앙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숲이다. 그런데도 로이는 매번 홀연히 양쪽을 왔다 갔다 하곤 했다.

“언제 왔어요?”

“방금이요. 어디로 가나요, 줄리 엣?”

로이가 짐 가방을 받아 들며 물었다.

“아……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만나러 가요.”

그러자 짐마차에 가방을 실어 주던 로이가 멈칫하더니 짐 가방위로 건너다보며 물었다.

“누구요?”

줄리엣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요.”

**

카르카손의 제국군 요새는 비상이 걸렸다. 좀처럼 보기 드문 방문객을 맞은 것이다.

“빈센테 보우만이라고 하셨습니까?”

빈센테의 상관이라는 남자는 조금 놀랐다.

빈센테는 말끝마다 자신이 후작가의 차남이며 제국의 수도에서 지낼 때는 높은 신분의 대귀족들과 어울렸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물론 그는 번지르르한 외관에 비해 허세가 심한 도박꾼이었기 때문에 제국군 내부에서는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옛 약혼녀가 유명한 공작의 애인이라고도 떠벌리고 다녔는데…….

설마, 그게 사실이었나?

“지금 바로 보우만 교위를 불러 오겠습니다. 근무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교는 당번병에게 빨리 빈센테보우만을 우물에 처넣어서라도 맨정신으로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보나마나 약에 취해 실내 휴게 실에 뻗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카르카손을 찾은 귀한 방문객은 이미 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빈센테 보우만을 그의 눈으로 보기 전,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줄리엣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다.

레녹스 칼라일의 심기는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상태였다. 그는 지금이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하.”

"알아.”

그는 이제 줄리엣의 옛 약혼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레녹스의 시선은 벽면에 그려진 거대한 지도를 향해 있었다. 동부 해안 도시들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제작된 정교한 지도였다.

해안선을 따라서 차례로, 발타자르, 카르카손 그리고.

알제.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작년 제 생일 선물로 뭘 주셨는지 기억하세요?”

분명 줄리엣이 떠나기 직전에 에그렇게 물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는 알제의 청금석 광산이라고 대답했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하지만 왠지 줄리엣이 원한 답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알제의 바닷가. 청금석 광산을 왜 하필 생일 선물로 주었더라?

줄리엣이 먼저 그런 것을 요구했을 리도 없는데.

가만히 곱씹던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 오늘이 며칠이지?"

“예?”

부관은 달력을 뒤져 날짜를 말해 주었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이었다.

“오늘이 달 축제로군요."

“여기서 알제의 해안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아마 최대한 빨라도 네 시간은 걸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 축제가 열려서……."

“주군!”

“공작님?”

그는 전부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확신이 있었다.

* * *

동부 해안 도시들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시기상 계절은 분명 겨울인데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바람만 조금 차가울 뿐 기온은 봄이나다름없었다.

해안선 백사장을 따라 지어진 집들은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했다. 짐마차 뒷좌석에 앉아 그런 풍경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줄리엣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힐끔거렸다.

“저, 그런데 로이한테는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줄리엣은 세 번째로 경고했다.

“괜찮아요.”

로이는 싱긋 웃었다.

“재미없을 리가 없죠. 줄리엣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데.”

그리고 로이의 대답 역시 세 번째에도 똑같았다.

줄리엣은 좀 후회하는 중이었다. 왜 같이 가도 되냐는 로이의 물음에 흔쾌히 승낙했을까?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것 때문에 지나치게 들뜬 게 틀림없었다. 고작 반나절의 여행일 뿐인데.

줄리엣의 손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줄리엣은 그 편지의 겉봉에 쓰인 주소로 가고 있었다.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던 줄리 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있잖아요, 로이.”

“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뭐든지요.”

“그, 카나벨 마을에서 내가 거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줄리엣의 오랜 궁금증이었다.

그들은 고작 열차에서 스치듯 한 번 만났을 뿐인데 그 깊은 산골 마을을 '우연히 지나치다 구해 줬다는 건 이상하잖은가.

그리고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로이는 줄리엣이 어디에 있든 다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로이의 일행들도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곤 했지만 그는 특히나 신출귀몰하게 아무 때나 불쑥 찾아왔다.

“냄새요.”

담백한 대답이었지만 줄리엣은 은기겁할 뻔했다.

'그러고 보니 읽은 적 있어.'

라이칸슬로프는 인간에게서 악취를 느끼고, 그 때문에 인간을 몹시 싫어한다고.

줄리엣이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자 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해요?”

“전에 어디서 들었는데요…….”

줄리엣이 조심스레 그걸 좀 순화해서 말하자 로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줄리엣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거든요."

“.… 그래요?" ”

“네, 무척.”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의 표정이 꽤 진지해서 줄리엣은 하마터면 좀 설득될 뻔했다.

그래서 줄리엣은 숄을 고쳐 걸 치는 척하며 제 어깻죽지에 잠깐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깨끗한 숄에서는 약간의 풀꽃냄새만 났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로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흠흠.”

줄리엣은 괜히 멋쩍어져서 헛기 침하는 척했다.

"단지 체취가 아니라……. 뭐랄까, 설명하기 어렵네요.”

로이는 진심으로 안타까워 보였다.

“내가 느끼는 걸 당신도 어서 빨리 느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냥 가볍게 한 이야기인데.”

멋쩍어진 그녀가 대꾸하자 로이가 진지한 어투로 덧붙였다.

“그냥, 줄리엣은 어디 있든지 항상 찾을 수 있어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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