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그럼, 이 마도구는………!"
메라트는 경매 물품을 소개하다 말고 입구에서 어떤 여자 하나가 들어와 착석하는 모습을 보았다.
'음?’
아까의 그 여자였다. 입장할 때 그에게 은화를 줬던 얼굴만 반반한 호구.
‘좀 전에 나가는 것 같더니, 다시 왔나?'
메라트는 조금 신경 쓰였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경매를 진행했다.
어차피 저 여자는 아까도 아무것도 낙찰받지 않았다. 어리다 보니 그럴 만한 돈도 없을 게 뻔해 보였다. 구경이나 하러 왔겠지.
“그럼, 이 성유물은 70골드부터 시작하겠습…….”
“여기!"
그런데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여자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그거, 제가 살게요!"
……진짜 백치인가?
메라트는 속으로 비웃었다.
“실례지만 레이디, 이건 70골드부터 시작하는 물건……….”
그러나 여자는 정말로 대금을 을지불했다.
촤르륵.
“이 정도면 될까?"
그것도 눈앞에서 바로 자루에 든 금화를 한가득 꺼내 보였다.
“무, 물론입니다, 레이디!”
여자가 낙찰받은 것은 알록달록한 유리 보석이 세공된 유리잔이었다.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실용적인 용도는 그리 없었다.
성유물이 아니라면 절대 저 금액을 주고는 사지 않을 법한 물건이었다.
“와, 예뻐…….”
‘멍청하긴. 가짜인 줄도 모르고..' 물론 그나마도 진짜 성유물이 아닌 복제품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유리잔이 가짜로 뒤바뀐 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감탄했다.
“그럼 이번 물품은 3세기 전 성유물로 "
쨍그랑!
경매를 진행하려는데, 어디선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그러게 조심하셨어야지요.”
“으응….”
조금 전의 여자가 잔을 깨뜨린 것이다.
'설마 깨뜨렸다고 돈을 다시 돌려 달라고 떼를 쓰는 건 아니겠지?’
메라트는 재빨리 가서 달래 주는 척하곤 중얼거렸다.
“흥, 속는 놈이 호구지.”
“응?”
"아, 아닙니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지요?"
“으응.”
다행히 그 정도 백치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돈을 돌려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줄리엣은 몇 가지 성유물을 낙찰받았다. 메라트는 점점 더 저 호구님은 여신께서 점지해 주신 천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쩐지 간밤에 꿈이 좋더라니!’
“이 상아 도자기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것도 살게요!”
“낙찰되었습니다!"
싱글벙글하던 메라트는 잠시 당황했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줄리엣이 자리에 앉아 물건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테이지로 직접 올라온 것이다.
“자, 잠시만요!”
“응?”
쨍그랑!
"......!"
아니나 다를까, 팔랑팔랑 올라와 조심성 없이 도자기를 집어든 그녀의 손에서 도자기가 추락했다. 상아 도자기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메라트는 거품을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이게 얼마짜리인데! 이런 미친 계집이……!"
"왜?"
“뭐?”
“내가 돈을 지불했으니까 내 물건이잖아. 그런데 왜 얼마짜리인 줄 아느냔 소리가 나오지?"
당황한 메라트는 상황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싸늘하게 보며 줄리 엣이 조곤조곤 쏘아붙였다.
“왜? 이건 진짜라서?"
“예…?"
"방금 전에 내가 유리잔 깼을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 왜 태도가 달라?"
조금 전 철없이 들뜨던 어린 계집애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하, 알겠네.”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로 여자가 싱긋 웃었다.
"아까 내게 준 보석잔과 성유물은 가짜 복제품들이고, 이건 바꿔치기 전인 진짜 성유물인가 보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건 좋지 않다.
메라트는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뭐? 복제품이라고?”
“가짜? 물건을 바꿔치기했다는 건가?”
경매장에 빽빽이 들어찬 군중들 틈에서 술렁임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복제품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
급한 대로 메라트는 무작정 우기기로 했다.
“그래?”
줄리엣은 싱긋 웃더니 입구 쪽을 보고 누군가를 불렀다.
“테오!”
건들거리면서 들어온 것은 르바탄가의 망나니 막내 손자였다.
“이, 이것들이 나를 핍박하려고……! 나는 결백하오!"
겁에 질린 메라트가 지레 외쳤으나 테오를 따라 들어온 것은 자그마한 체구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온통 새하얀 로브를 쓴 사제였다.
“사제잖아?”
“사제가 여긴 왜……?"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줄리엣이 싱긋 웃으며 사제에게 말을 건넸다.
“사제님, 여기 무대에 올라와 있는 성유물들과 제가 낙찰받은 성유물들을 감정해 주시겠어요?"
“예, 그러지요.”
낭랑한 목소리로 사제가 답했다.
“자, 잠깐!”
메라트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는 간신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여기서 저 계집의 말을 부정할 할 수는 없었다.
“뭐하는가? 어서 저 아가씨 말대로 성유물을 감정해 보지 않고!”
“아, 아닙니다! 여러분, 뭔가 오해가…….”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레에 실린 무언가가 무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성유물인가?”
“한데 왜 똑같은 모양이 두 개씩이지?”
메라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턱이 덜덜 떨렸다. 저것까지 탄로 나면 끝장이었다.
메라트는 재빨리 줄리엣의 발치로 기다시피 달려가 무릎을 꿇고 속삭였다.
“아,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까지 구매하신 모든 금액을 돌려 드릴 테니…….”
“그 계산이 아니지."
“예?”
줄리엣이 갑자기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까 나한테 입장료 받아 갔잖아? 그것도 줘야지."
무슨 이런…?
메라트는 당황해하면서도 허겁지겁 아까 받은 은화를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예, 예! 다 돌려 드리겠습니다.
다만 저 물건들만은 공개를
“왜?”
“예?”
줄리엣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랬잖아. ‘속는 놈이 호구' 라며?"
메라트는 눈이 뒤집혔다.
"이, 이……!”
이런 악귀 같은 계집애!
**
사실 줄리엣의 계획 자체는 무척 간단했다.
돈을 지불해 가짜를 사는 척하고 저쪽이 손을 쓰기 전에 진짜 물건을 훔쳐 둔다. 그리고 폭로한 뒤, 돈도 돌려받고 진짜 성유물도 챙기면 끝.
"이, 이거 놔라!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 어!”
메라트는 현행범으로 끌려갔다.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일 것이다.
끌려 나가지 않으면 경매장 안의 성난 사람들에게 얻어맞다가 죽었을 테니까.
“이런 무엄한 놈들!”
그런데 끌려가면서 메라트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나는 기네스 후작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신분이란 말이다!
가만두지 않을 테다!”
기네스 후작?
“뭐야, 그게 누군데?”
테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줄리엣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기네스 후작은 남부의 대귀족이었다. 그의 양아들인 카스퍼 백작이 황제의 조카딸인 프리실라 공녀와 약혼하기도 했고 또 칼라일 공작가를 견제하는 구 귀족연합 세력의 리더격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 줄리엣의 다섯번째 남편이기도 했었다.
그녀의 숙부인 가스팔 남작이 이 줄리엣을 그에게 팔아넘겼었기 때문이다.
“뭐야? 너 얼굴이 왜 새하얘?
기네스…… 그게 누군데?”
테오가 옆에서 물었지만 줄리엣은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번 생에서 줄리엣은 그 자와 엮일 일도 없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그녀를 를심하게 학대했던 기네스 후작이 사람들 앞에서 점잖은 척하는 것을 볼 때마다 줄리엣은 종종 진저리쳤다.
하지만 기네스 후작은 남부의 귀족이다. 카르카손은 동부, 아키타스 가문의 영역일 텐데 왜 남부의 귀족이 동부에까지 마수를 뻗쳐 놓은 거지?
줄리엣이 첫 번째 삶에서는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테오가 슬쩍 말했다.
"야, 근데 마지막에 깨뜨린 그 도자기 말이야.”
“상아 도자기?”
“그래. 그건 좀 아깝지 않냐?
성유물 중에서도 꽤 비싼…….”
갑자기 줄리엣이 뒤에 쌓여 있던 상자에서 흰 도자기 하나를 끄집어내더니, 테오에게 턱 안겨주곤 싱긋 웃었다.
“깨진 게 가짜야.”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