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다음날 아침.
줄리엣은 홀로 경매장 입구에 에서 있었다.
에셀리드와 테오가 경매장 입장권을 구해다 주긴 했는데, 두 사람 다 각자의 일로 바빠 구경은 줄리엣 혼자 하기로 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건네고 들어가려는데 보라색 우단 옷을 차려 입은 남자가 줄리엣의 앞을 가로막았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신분 증명?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불법 경매장에서 신분증이라니.
그런 게 왜 필요한가?
더욱이 카르카손에 들어올 때는 메리골드 상단 덕에 신분증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기에 '릴리 안 세네카'의 신분증은 두고 나온 상태였다.
줄리엣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없는데…….”
그러자 보라색 옷의 남자는 그런 줄리엣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그녀의 차림새로 신분을 추정하려는 모양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외모에 혹시나 귀한 신분인가 싶어 물어봤더니만.’
어린 아가씨가 시종 하나 없이 지하 경매장에 오다니. 안 봐도 뻔했다. 한미한 귀족의 애첩이거나 철없고 놀기 좋아하는 시골뜨기 아가씨쯤 되겠지.
경매장의 중간 관리자, 메라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그는 이 바닥에서 꽤 잔뼈가 굵었는데 그의 특기는 잔챙이들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지하 경매 특성상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속은 별로 없는 온갖 잡어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메라트는 자신의 특기를 자랑스러워했다.
눈앞의 이 아가씨만 해도 그렇다.
얼굴은 반반하지만 옷차림은 수수했다. 거기에 호위하니 없는 젊은 여자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돈을 뜯어낼 구석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메라트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줄리엣이 내민 입장권 봉투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열어보지도 않고 심각한 척 손님 명단을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어디 보자……. 이런. 어쩌지요, 레이디? 오늘은 비어 있는 좌석이 별로 없어서 말입죠. 어쩌시렵니까?”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입장권을 가져왔는데요?"
“입장권은 말 그대로 입장권이 죠. 오늘의 경매품들은 워낙 큰게 많기 때문에….…. 어흠!"
그러자 잠시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줄리엣이 알겠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아하, 이거면 되나요?"
줄리엣이 손가락으로 은화 하나를 튕겼다.
핑그르르,
솜씨 좋게 날아간 은화는 손님 명단 위에 안착했다.
"아아니, 뭐 이런 걸 다……. 크흠!”
은화는 메라트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생글생글 웃는 줄리엣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은화에 정신이 팔린 메라트는 눈치채지 못했다.
“1층의 3구역으로 가시면 됩니다, 레이디. 특별히 테이블석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3구역은 경매장에서도 가장 외진 싸구려 좌석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환 소년이 줄리엣을 경매장안으로 안내했다. 그런 줄리엣의 뒷모습을 보며 메라트는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죄책감이라곤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 지하 경매장에 존재하는 규칙은 하나뿐이다.
"속는 놈이 호구지.”
메라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은 개장부터 일진이 좋다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해.”
이것이 최악의 실수인 줄은 까맣게 모른 채로.
**
줄리엣은 좀 신기한 기분으로 구경하며 음료를 홀짝거렸다.
경매장 내부는 고급 오페라 하우스 같았다. 붉은 휘장과 은은 한 조명은 은밀하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휘장이 드리워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2층, 3층의 분리된 좌석들도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박스석이랄까.
박스석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차림이었다. 다만 몇몇은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인지 가면을 쓰고 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줄리엣이 앉아 있는 1층은 동그란 원형 테이블이 여러 개 모여 있는 레스토랑 같았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안내받은 테이블은 구석 자리었으나 줄리엣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테오가 제대로 된 출입 증을 구해다 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고.'
실은 메라트가 제대로 출입증을 확인하지도 않고 멋대로 판단하고 구석 자리를 준 것뿐이었지만.
줄리엣은 테오가 알았더라면 꽤나 억울해할 법한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꼼꼼히 구경했다.
경매 방식은 간단했다. 무대 위에 물건이 올라오면 구경꾼들이 차례로 낙찰 금액을 부르는 식이었다.
마침 사회자가 다음 경매를 부칠 상품을 소개했다.
"다음 물건은…… 소울 스톤입니다!”
뭐?
줄리엣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소울 스톤은 신성력이 없는 사람도 힘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만능 아이템이다. 마력석이 마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유일한 단점은 무척이나 희귀하고 비싸다는 점이었는데 그걸 여기서 발견할 줄이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반짝 들었던 줄리엣은 빠르게 실망했다.
무대 위에 올라온 물건은 그저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반짝반짝한 백색 구슬이었다.
'그럼 그렇지.’
저건 대놓고 사기였다.
소울 스톤을 알아보는 사람이 몇 없다는 것을 노린 것 같았다.
소울 스톤이 무척 희귀하고 비싼 이유는 고매한 인덕을 쌓은 성인이나 신성력이 높은 사제의 유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건 신전에서 칼같이 관리하기 때문에 손에 넣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암시장에 나올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소울 스톤이 진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낙찰하려 드는 사람이 몇 없었다.
차례는 빠르게 돌아갔다. 다음으로 나온 경매품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처음에 나왔던 소울 스톤처럼 대놓고 가짜인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마도구들 중 열에 셋 정도는 가짜거나 하등품이었다.
'다른 성유물들은 어떨까.'
줄리엣은 가지고 있는 유리 조각을 힐끔 보았다.
‘이걸 사용하면 알 수 있을 텐데,'로벨의 신전에서 가져온 이 성유물은 신성력을 감지하면 빛을 반사하는 기능이 있었다.
곧 줄리엣은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물 알도 나오나 해서 기다려 봤는데 마물 알은 다른 경매장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 알려 드려야겠다.'
줄리엣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든 것인지 아까 들어온 출입구가 아닌 뒤쪽의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됐다.
'어?'
조금 헤매던 줄리엣은 그곳에서 수상한 창고를 발견했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아까 그 경매장의 담당자, 메라트의 창고인 게 확실했다.
걸쇠가 느슨하게 걸려 있기에 몰래 들어가서 안을 구경하던 줄리엣은 기막힌 풍경을 발견했다.
창고 안에 있는 물건들은 정확히 똑같이 생긴 물건들이 두 개씩이었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가지고 있던 거울 조각으로 도자기 두 개를 동시에 비춰 본 줄리엣은 어떻게 된 자초지종인지 이해했다.
한쪽에서는 신성력을 가진 성유물 특유의 빛이 반사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 빛도 반사되지 않았다.
하나는 진짜고, 다른 하나는 겉모양만 똑같이 만든 가짜인 것이다.
'경매장에서 가짜를 파는 것도 모자라, 진짜를 보여 주고 물건을 내줄 때는 복제품을 주기도 한단 말이지? 그리고 진짜는 다시 또 어딘가에서 같은 수법으로 팔아먹고?'
전형적이고 저열한 사기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현장을 잡는 게 가장 좋을 텐데…….'
준비 없이 고발하면 발뺌할 수도 있고, 증거를 빼돌릴 수도 있고 말이다.
조용히 창고를 빠져나오던 줄리 엣은 때마침 경매장 건물 사이를 건들거리며 걷는 낯익은 빨간 머리를 발견했다.
"테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