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네. 그래서 나무딸기 냄새는 는어떤 냄새인지 궁금했거든요."
그러자 로이는 빙그레 웃으며 손 안의 열매를 내밀었다.
“먹어 보면 알겠네요.”
냄새는 모르겠지만 맛은 새콤달콤하니 맛있었다.
'그럼 욕은 아니었구나.'
은근히 엘자의 발언을 신경 쓰고 있었던 줄리엣은 나무딸기를 먹어 보고는 엘자에 대한 평가를 올려 주기로 했다.
달콤한 걸 먹고 기분이 좋아진 줄리엣은 마차를 따라 나란히 말을 타고 걷는 로이를 향해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숲은 어떻게 생겼어요?"
“성도 있나요?”
“그 옷은 뭐라고 불러요?"
그러다가 어디서 스윽 나타난 에셀리드가 합세해서 로이를 질문의 늪에 빠뜨리는 데 일조했다.
질문 공세에 당황한 로이가 물었다.
“그럼 줄리엣은요?"
"내 얘기는 별로 할 게 없는 데…….”
그렇다고 북부 얘기를 할 수는 없고.
줄리엣은 고민하다가 적당히 무난한 얘깃거리를 골랐다.
“수도에서는 여름 사교 기간에 디어 블루벨이라는 연회를 열어요.”
디어 블루벨. 청사슴 연회.
늦여름 밤 7일 동안만 열리는 이 거창한 이름의 무도회는 황후가 가장 자랑하기 좋아하는 행사였다.
디어 블루벨은 소녀 같은 면이 있는 황후의 오랜 취미이기도 했다.
열여덟 살 생일을 넘긴 성인 남녀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연회지만, 사실상 참석하는 나이 층은 거의 갓 성년을 지난 어린 이들이나 젊은 미혼 귀족 남녀가 대부분이다.
“조금 유치해도 재밌어요.”
가면을 쓰거나 가장을 하기도 하고, 평소보다 화려한 의상을 을입기도 한다.
연회장 여기저기에 사슴 모양조형물들을 놓고 푸른 등을 많이 켠다.
때문에 평소의 진중하거나 격식 있는 연회보다는 낮은 연령대를 겨냥한, 조금 큰 규모의 테마 살롱에 가까웠다.
“꽃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그날의 블루벨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파티 참석자들은 누구든 그날의 블루벨이 된 사람이 요구하는 걸 들어줘야 해요."
다분히 의도적인 규칙이다.
한여름 밤에 젊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가장무도회라니.
눈 맞으라고 판을 다 깔아 준게 아닌가.
말이야 뭐든 요구할 수 있다지, 사실상 고백을 부추기는 행사나다름없었다.
“고백 받으면 거절도 못하는 건가?”
어느 틈에 가까이 와서 듣던 그레이가 왠지 심각하게 물었다.
“그렇죠. 청사슴 연회에서 맺어지는 한 쌍은 오랫동안 행복하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미신이겠지만.
정확히는 그렇게 맺어지는 커플들을 보며 황후가 뿌듯해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줄리엣도 블루벨이 되어 본 적있나요?"
"아…….”
줄리엣은 순간 멈칫했다.
7년 전, 줄리엣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사슴 연회에 참석했던 때가 기억났다. 그 해의 청사슴 연회에서 그녀는……
'블루벨 화관을 받긴 받았지.'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보지?”
아마 역대 가장 무례한 청사슴지기였을 것이다. 그 남자는. 네가 오늘의 블루벨이다. 그가 막 무가내로 그렇게 정했다.
줄리엣은 자신도 모르는 틈에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청사슴 연회에서 맺어진 한 쌍이 영원히 행복해진다는 전승은....
'미신이지.'
줄리엣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
카르카손에 도착한 줄리엣은 다 나을 때까지는 집 안에만 있으라는 처분을 받았다.
적왕 리오넬 르바탄의 저택은 붉은 박공이 우아한 대저택이었지만, 사실 드나드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였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할 일도 없었던 줄리엣은 짐 정리를 하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쿵!
데구루루.
옷가지 사이에서 검고 동그란 구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게 뭐지?'
"아.”
그러다 줄리엣은 기억해 냈다.
“카나벨 마을!”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다.
그때 그 협곡에서 널린 마력석들을 다 버리고 이것 하나만 챙겨 왔었지. 그런데…….
“그때는 이보다는 작았던 것 같은데?”
분명 그때는 주머니에 넣을 만큼 작았는데, 이제는 성인이 한손으로 들기에는 살짝 버거운 사이즈가 되어 있었다.
줄리엣은 의심의 눈초리로 반질반질한 구체를 살펴보았다. 딱히 마력이나 신성력 같은 특수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마도구도 성유물도 아니란 뜻이었다.
'그럼 이게 뭐지?'
“아가씨, 그건 또 어디서 난 겁니까?”
줄리엣이 동그란 구체를 든 채 요리조리 살피는데 복도를 지나 가던 에셀리드가 흥미롭다는 듯 끼어들었다.
“원하신다면 그것도 괜찮은 값에 팔아 드릴 수 있습니다.”
에셀리드가 은근한 투로 권하자 줄리엣의 눈매가 불신으로 가느스름해졌다.
"이게 뭔 줄 알고?”
"마물의 알이죠.”
지나치게 명쾌한 답에 줄리엣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마물 알이었단 말이야?
그럼 내가 마력석을 버리고 마물알을 주워 온 거야?''
“그럼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위험할수록 가격도 올라가는 법이니까요.”
에셀리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정확한건 감정을 받아 봐야겠지만……
제 생각엔 그냥 파는 게 이득일 것 같군요.”
“왜요?”
"아가씨, 그 던전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 안 나세요?"
뱀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큰 뱀마물.
잠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줄리엣은 몸서리쳤다. 가지고 있어 봤자 그런 뱀 마물이 나올 텐데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마물의 알은 어떤 종인지와 상관없이 알 상태일 때는 모두 똑같은 생김새라고 들었다.
즉 겉으로만 봐서는 안에 든 게 어떤 마수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뱀 소굴에서 가져왔지만 알에 든 것은 뱀 마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줄리엣은 알에서 뭐가 나올지 궁금했다.
“안 파실 겁니까?”
“네.”
“그래도 감정은 받아 보는 게 좋겠군요. 경매장에 가 보시겠습니까?”
“여기에 마수 경매장이 있나요?”
줄리엣은 호기심을 보였다.
"마수 경매장은 아니고, 암시장입니다. 성유물이나 마도구가 거래되는데 종종 마물의 알도 나오지요.”
그러더니 에셀리드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요즘 암시장 때문에 어르신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어르신이라 함은 줄리엣의 외조부인 리오넬 르바탄을 뜻했다.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니.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최근 암시장에 잔챙이들이 들어와서 물을 흐리고 있답니다.”
“잔챙이?"
“사기꾼 말입니다.”
"아.”
에셀리드가 말하길, 경매장에 들어와서 질 낮은 물건을 고급품으로 꾸미거나 가짜 성유물이나 마도구를 진짜라는 식으로 속여 팔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속아서 물건을 산 사람들의 항의가 들어와서 카르카손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단속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성유물이나 마법 세공품같은 건 한눈에 알아보기 힘드니까요.”
암흑가 거물도 이런저런 고충이 있겠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줄리 엣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