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는 침대 쪽으로 등을 기댄 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하.”
줄리엣은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때때로 서글퍼졌다.
대개, 그의 관심은 대가 없이 주어지지 않았고 줄리엣은 언제나 그가 요구하는 것을 내준 다음에도 목말라 했다.
줄리엣은 열없는 시선으로 얼마쯤 남자를 응시하다가 물었다.
"사냥은요?”
"...… 그게 궁금한가?"
어이없다는 투였다.
“취소 했어.”
소리 내 책을 덮은 그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를 짚었다.
줄리엣은 가끔 어떻게 붉은 눈동자가 그렇게 차가워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대신 배를 샀지.”
“….. 갑자기요?”
줄리엣의 반응에 그의 반듯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갖고 싶다며?"
줄리엣은 말을 잃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줄리엣.”
못마땅한 손길이 따라와 턱 끝을 치켜 올렸다.
그제야 줄리엣은 침실 한쪽 안락의자 위에 그녀의 작은 짐 가방이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열린 흔적도, 정리된 흔적도 없었다. 그녀가 쓰러지면서 가지고 나갔던 그대로였다.
그는 저 가방의 의미를 알까 궁금했지만 이내 그 답을 깨달았다.
그럴 리 없다. 저것을 얌전히 침실에 올려다 둔 것은 무수히 많은 공작성의 하인들 중 하나였을 터다.
그는 저 짐 가방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방이 아닌 바깥으로 향하는 계단참에서 쓰러졌는지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아무것도.
울음을 삼키며 줄리엣은 간신히 애원했다.
"다음에…. 다음에요. 지금은 그냥 쉬고 싶어요.”
**
카나벨 마을은 규모가 작은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에, 마그다와 데이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치료를 위해 큰 병원이 있는 카르카손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또래인 데이나와 자카리의 딸인 리즈벨은 금방 친해져서 같이 팔랑거리며 잘도 뛰어다녔다.
"언니!”
천막을 펴 놓고 죽을 먹고 있던 줄리엣을 발견한 데이나가 마차 가까이로 다가와 뭔가를 펼쳐 보여 주었다.
“우리 엄마 그림이에요!"
"와.”
마그다의 스케치 노트였다. 줄리엣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엄마가 그리신 거야?”
"네! 우리 엄마 그림 예쁘죠!”
다섯 살 어린이답게 데이나는 엄마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
“어디어디?”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들 걸음을 멈추고 같이 스케치 노트를 구경했다.
“마그다의 스케치라고?"
“네, 마그다 씨 유명한 조각가래요.”
"아, 그럼 이게 비탄의 성녀 스케치겠군요.”
“비탄의 성녀? 그게 뭔데?”
다들 기웃거리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덕분에 데이나의 어깨가 점점 높아졌다.
"데이나! 언니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마그다가 뒤쫓아 와 데이나를 꾸짖기 전까지는 말이다.
“괜찮아요. 그보다, 멋대로 봐서 미안해요."
"별것도 아닌걸요.”
줄리엣은 스케치 노트를 마그다에게 돌려주었다.
하늘하늘한 옷을 나부끼는 천사가, 아니 날개 달린 미인이 여러 장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날카로운 검을,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었다.
줄리엣은 천천히 그림을 뜯어보며 감탄했다.
'와, 조각가는 그림도 잘 그려야 하는구나.'
하나같이 현실 인물 같지 않은 미인들이었다.
“저도 봐도 됩니까?"
“네, 그럼요.”
이전부터 비탄의 성녀상에 관심이 많아 보이던 에셀리드는 아예 줄리엣의 곁에 앉아서 스케치 노트를 넘겨 보기 시작했다.
“조각상이 아직 미완이라고 하셨죠?”
"네, 마무리 작업만 남았는 데……. 어떤 얼굴로 그려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서요."
그냥 이중에 아무 얼굴이나 골라서 조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 마그다의 고충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러다간 얼굴 없는 성녀상이 될지도 몰라요.”
마그다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줄리엣은 에셀리드의 어깨 너머로 스케치를 보다가 감탄했다.
“그런데 비탄의 성녀는 꼭 이렇게 예쁘게 울고 있는 성녀인가요?”
“네?”
“나 같으면 울지 않을 것 같아요. 단죄자니까. 그게 더 강해 보이지 않나요?”
“어….”
가만히 듣고 있던 에셀리드가 어이없단 듯 끼어들었다.
“비탄의 성녀가 왜 강해 보여야 합니까?”
“심판의 날에 단죄하기 위해 내려오는 최후의 성녀라면서요? 당연히 제일 센 성녀겠죠!"
“……그건 해석의 영역이죠!"
“그럼 표정도 해석의 영역이죠!
왜 꼭 예쁘게 울어요? 벌을 내리는 사람이라면서요?”
“그거야.”
“.....… 그렇죠?”
에셀리드가 드물게 말문이 막히자 줄리엣이 씩 웃었다.
“애초에 왜 비탄의 성녀가 가장 아름다운 성녀가 된 거죠?”
“글쎄요. 가장 최후에 내려오는 성녀니까? 그리고 주인공은 보통 제일 나중에 등장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니까 외모도 상향됐다 이거지.
“언니이!”
그때 저쪽에서 종이와 그림 도구를 가지고 놀던 리즈벨이 줄리 엣에게 달려왔다.
손에게는 팔랑팔랑 종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테오 오빠가 그려 줬어!"
테오가 그림도 그려?
줄리엣과 에셀리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를 펼쳤다.
"쥐?”
“보면 몰라? 곰이네, 곰.”
“돼지가 아닐까요?”
“다리가 네 개는 맞아?"
다들 한마디씩 보태는 가운데, 성큼성큼 다가온 테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내놔.”
테오는 입을 꾹 다물고 그림을 도로 뺏어 갔다.
“대체 뭘 그린 겁니까?"
정답은 리즈벨의 입에서 나왔다.
“토끼! 오빠가 토끼 그려 줬어!”
리즈벨이 폴짝폴짝 뛰며 외쳤다.
줄리엣이 테오를 모처럼 애잔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마그다가 그녀를 불렀다.
“그, 그럼 정령사님, 아니 줄리 엣이라면 어떤 표정으로 그리시겠어요?”
"음, 저는 그림 못 그리는데요.”
줄리엣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그림은 테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괜찮아요. 그림이 아니라 조각이니까!”
그림이나 조각이나. 그게 그거일 것 같은데…….
“잘 모르겠지만 저라면요."
줄리엣은 난처하게 조금 웃다가 대답했다.
“최소한 죄 지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예쁘고 가련하게 울어 주진 않을 것 같아요."
턱을 괴고 그 대화를 듣던 에셀리드가 시니컬하게 평했다.
“가차 없는 성녀님이군요.”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 * *
"루체른으로 가실 일이 있다고요?”
“네.”
떠나기 직전까지 뭔가를 그리고 있던 마그다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마그다는 뭔가에 열중해 있는 듯 했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서 홀린 듯도 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풀린 거라면 좋겠다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줄리엣 일행이 카르카손을 거쳐서, 루체른에 사육제를 보러 갈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그다는 어쩐지 몹시 기뻐했다.
“그, 제가 완성한 조각상이 루체른 성소에서 공개되거든요.”
줄리엣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 그러고 보니 에셀리드와 대화할 때 그런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정말 대단한 거였잖아?'
줄리엣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마그다를 보았다.
“줄리엣이 완성된 비탄의 성녀를 꼭, 꼭 봐 주시면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줄리엣은 웃으며 마그다, 데이 나와 작별했다.
* * *
이어지는 것은 호화 여행이었다.
발목을 살짝 삔 것뿐인데 무척 큰일이었던 것처럼, 헬레네는 줄리엣을 마차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안 그래도 느릿한 이동속도는 물론이고, 말을 타는 것도 당연히 엄금이었다.
“하지만..”
“안 돼. 얌전히 누우렴.”
이러다가 버릇이 나빠지면 어쩌지.
사두마차가 끄는 여행은 몹시 호화로웠지만 줄리엣은 금방 질렸다. 말이라도 타면 훨씬 낫겠지 싶었지만 그마저도 금지됐다.
줄리엣은 그제야 외숙모가 아침에 저를 구슬려 치마를 입게 한 것이 다분히 계획적인 행동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예쁘다고 마구 칭찬해 해주시더니.’
그게 다 헬레네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줄리엣이 얌전히 마차에 앉아 가도록 말이다.
심심할 만하면 툭 튀어나와서 밉살맞게 깐족거리던 테오는 줄리엣이 지루해하는 것을 보고 퍽 고소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안장으로 타면 되지, 멍청아" 라고 이죽거리며 참견했다가 헬레네에게 귀를 잡혀 앞쪽으로 끌려갔다.
줄리엣은 그 이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테오를 보지 못했다.
“로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창틀에 기대어 있던 줄리엣이 불쑥 나타난 로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외쳤다.
로이는 빙긋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잎사귀에 싸인 나무딸기였다.
'나무딸기…….’
먹음직스러운 나무딸기를 보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얘한테서 나무딸기 냄새가나!”
로이의 일행인 여자, 엘자가 그렇게 말했다.
엘자와 나탄을 비롯한 로이의 일행들은 그날 이후 상단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가끔은 보였다가 보이지 않다가 했다.
줄리엣은 처음엔 그들이 어딜간 건지 궁금해했지만 내키는 대로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한다는 걸 깨닫고부터는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엘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줄리엣은 로이에게 그 얘기를 했다.
“엘자가 그렇게 말했어요. 나무딸기 냄새가 난대요."
“..…… 엘자가요?”
로이의 표정이 순간 미묘해졌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