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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57화 (54/229)

57화.

***

줄리엣의 발목을 진찰했던 의원은 단순한 염좌라며 잘 쉬기만 하면 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음날이 되어도 줄리엣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이자크와 헬레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우선, 하루 정도는 더 지켜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당황한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줄리엣은 헬레네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괜찮아요, 숙모님. 저 원래 한 두 번씩 이래요. 내일이면 나을 거예요.”

줄리엣은 제 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이유 없이 고열에 시달리곤 했다.

딱히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한 말이 아니었는데도, 어째 줄리엣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다들 번갈아 가면서 줄리엣의 마차로 병문안 왔다. 그날의 마지막 문안객은 에셀리드였다.

줄리엣을 물끄러미 보던 에셀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혹시 그 나비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줄리엣은 힘없이 웃었다.

던전에서 그녀가 뱀 마물을 제압했던 장면을 목격한 이후, 에셀리드가 그녀의 능력에 관해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비와 관련되기 훨씬 전부터 그랬어요.”

“꼭 신열(神熱)같네요.”

눈을 가늘게 뜬 에셀이 조용히 말했다.

“신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나요?”

에셀리드가 좀 놀리는 듯한 기색으로 싱글싱글 웃었다.

"흠, 그거 이상하네요. 듣도 보도 못한 정령도 마구 다루고, 심지어 라이칸슬로프와도 친분이 있길래 줄리엣은 뭐든 다 알 줄 알았는데요.”

"아픈 사람 붙잡고 비아냥대면 재밌어요?"

줄리엣이 투덜거리자 에셀이 어깨를 으쓱했다.

“신전에서 호들갑 떨어 대는 증상이 있습니다. 신전의 사제들이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시죠? 뭐, 어떤 사제들은 예언의 힘이라고도 하더군요.”

에셀리드는 간략히 설명했다.

그것이 신성력의 증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신병 같은 건가, 주술사들이 앓는?"

줄리엣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신성력 그리고 마력. 두 힘은 서로 반대 속성이라 충돌했다.

그래서 사제와 마법사, 신전과 마탑은 항상 서로를 거북하게 여겼다.

“그런데 줄리엣은 사제가 아니잖아요. 정령사가 정령, 혹은 마물을 불러내기 위해서 쓰는 힘은 분명 마력일 테고. 그럼 줄리엣의 병은 신열이 아니라는 건데…… 뭘까요?”

“..... 그러게요.?"

줄리엣은 떨떠름하게 맞장구쳤다. 동시에 그가 마탑 소속의 마법사라는 걸 떠올렸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면 몹시 흥미로워하며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를 끌고 가 해부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 마물 때문이 아닙니까?”

에셀은 못미더운 표정으로 한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네, 아니에요. 그건 장담할 수 있어요.”

줄리엣이 작게 하품하며 베개를 하나 더 옆에서 끄집어 왔다. 그녀는 잠자리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왜냐면….”

베개를 팡팡 두드려 높이를 조절한 다음, 줄리엣이 대꾸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그 나비들을 불러낼 낼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요.”

줄리엣이 작게 하품하며 웅얼댔다.

“이건 홍역이나 수두, 뭐 그런 거예요. 어린애들 앓는 거."

"그건 전염병인데요?"

“어쨌든요.”

아까 먹은 해열제의 부작용인지, 줄리엣은 졸음이 쏟아져서 점점 더 에셀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나가라는 듯 줄리엣이 손을 휘적댔지만 에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기 직전 다시 그녀를 불렀다.

“줄리엣.”

"네에.”

"이상하게 듣진 말고요. 걱정되어서 하는 소린데.”

그럼 하지 말든가.

줄리엣은 반쯤 졸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물을 부리는 자들 중에, 정신 조작 계열, 그러니까 환영 마법을 쓰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네, 알아요…….”

줄리엣이 웅얼거리듯 대답했지만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줄리엣?”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셀리드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정령사라고?'

에셀리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싹 사라졌다.

사실, 에셀리드는 줄리엣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의 정체를 의심했다.

에셀리드는 등골이 오싹했다.

손바닥에 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젠장.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어..'

줄리엣 모나드.

저 여자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정령사를 본 적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 리 없다.

'환영 나비라고?’

가당치도 않다.

환술 계열 능력을 쓸 줄 아는 정령사는 극히 드문데, 심지어줄리엣은 자유자재로 소환수의 숫자를 늘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열 몇 번째 나비가 날아오른 것을 본 순간 에셀리드는 표정을 감추려고 혀를 깨물어야 했다.

'사기잖아!'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에셀리드 역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정령술은 기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와 계약을 맺고 힘을 빌려 오는 행위였다.

온전히 본인의 마력만을 사용해야 하는 마법사에 비해, 정령사는 계약한 상대를 불러낼 수 있을 만큼만 마력을 소모하면 된다.

소환된 정령체의 힘을 빌리기 된 때문에 마력을 적게 소모한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말만큼 간단하지 않다.

다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독특한 파장의 마력을 가진 소수뿐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자칭 정령사라고 떠드는 사기꾼들은 대부분 편법을 사용한다.

억지로 신성력이 담긴 성유물파편 같은 걸 몸에 삽입하거나 해서 인위적으로 마력의 파장을 을망가뜨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은 죽지만…….’

어찌어찌 파장을 맞춰서 운 좋게 문을 여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불러낸 차원 너머의 계약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는 미지수다.

편의상 정령이라고 통칭해서 부르긴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차원 너머에서 소환되는 마물들이었다.

비교적 평범하게 불을 뿜는 작고 귀여운 도마뱀부터 짧은 시간에도 배 한 적을 침몰시킬 수 있는 바다 괴수까지 종류도 용도도 다양하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에 침투해 해환영을 보여 주고 공포를 먹어 치우는 정령체라니,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다.

마법에도 여러 가지 분야가 있지만 정신 조작 계열은 고위 마법사들조차도 꺼리는 마법이었다.

백이면 백, 전부 다 미쳐서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스물 몇 살 먹은 여자애가 이차원의 존재를 자유자재로 불러내고, 심지어는 대화를 한다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건 정령이라기보다는……

신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건 오히려 악마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

꿈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억을 더듬는 것뿐인지 몽롱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얼거리면서 잦아들고, 줄리엣은 온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다.

지난해 여름의 기억이었다.

에셀리드에게 말했던 것처럼 줄리엣에게는 오래된 버릇이 있었다. 몸이 약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한 해에 한 번은 꼬박꼬박 앓았다. 대개 가벼운 감기로 그쳤고 하루 이틀 정도면 가뿐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지난여름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돌아간다.”

그 해의 여름휴가는 시작도 전에 끝났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인해 그의 심기가 상했기 때문이다 공작성으로 돌아온 레녹스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사냥터로 가 버렸다.

사용인들이 분주히 짐을 정리하는 동안, 줄리엣은 공작성의 응접실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짐 더미처럼.

공작성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줄리엣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게 내 애라고?"

잘못한 것은 그녀가 아닌데 어쩐지 줄리엣은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찻물이 천천히 식어 가는 것을 보고 줄리엣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 관계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잔인한 진실을.

대체 뭘 기대했어?

누군가 비웃는 것 같았다. 줄리 엣은 발작적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할 만큼 했어.'

이대로 떠나자.

줄리엣은 충동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침대 아래에서 작은 여행 가방을 끄집어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준비해 두었던 가방이었다.

그리곤 서랍장을 열어 몇 안 되는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고, 가방을 닫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공작성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수십, 수백 번. 수년간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아가씨!”

갑자기 열이 오르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줄리엣이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는 암전.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그녀는 호화로운 침실에 누워 있었다.

천장의 익숙한 덩굴무늬, 어둡게 조절한 조명이 그녀를 반겼다.

"일어났나?”

익숙한 목소리 또한.

줄리엣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간소한 차림새의 남자가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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