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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56화 (53/229)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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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흙투성이가 된 채 숲속의 공터로 돌아왔다.

자그마한 공터 이곳저곳에는 횃불이 켜져 있었고, 메리골드상단의 표식을 단 단원들이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들은 이미 완전히 붕괴해 버린 절벽 아래 던전 입구가 있던 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줄리엣은 그 모습을 정 반대 방향, 그러니까 숲에서 걸어 나오면서 보았다.

“줄리엣!”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것은 헬레네였다.

헬레네가 비명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어서 달려온 사람들이 온통 엉망인 그녀의 몸에 얼른 모포를 둘러 주었다.

“괜찮아요.”

로이가 그녀를 사람들 틈에 내려 주었다.

줄리엣은 다리에 힘이 풀리긴 했지만 비척비척 제 힘으로 섰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픽 쓰러지고 싶었지만 줄리엣은 정신줄을 놓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그녀가 가물거리는 눈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훑어보는데, 때마침 줄리엣이 찾던 사람이 몰려든 인파를 가르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야! 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테오였 였다.

줄리엣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주위로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려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테오를 향해 척척 걸어갔다.

테오 역시 제 쪽으로 다가오는 줄리엣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었다.

갓 태어난 기린 새끼처럼 걷는 줄리엣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줄리엣! 너, 너 걸어도 괜찮……?"

그러나 테오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

퍼억.

"악!"

"......?"

감동적인 사촌 남매간의 재회를 기대하며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찍어 낼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다소 당황스러워했다.

줄리엣이 갑자기 테오의 명치를 가격했던 것이다.

“야!”

테오가 호흡곤란으로 허리를 접고 있을 때, 때마침 반대편에서 그레이와 이자크가 달려왔다.

“줄리엣!”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테오는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섰다. 지은 죄를 실토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게.”

“길을 잃었어요.”

퍽.

그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것은 줄리엣이었다.

아야!

아직까지도 명치가 얼얼한데 어둠속에서 누가 그의 발등을 확밟았다. 물론 이번에도 줄리엣이었다.

지은 죄가 큰 테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숙부님. 다 제 잘못 이에요. 마법사님에게는 화내지 마세요.”

줄리엣이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뜬금없이 지목된 에셀리드가 모닥불 옆에서 치료받다 말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항의할 틈 따윈 없었다.

“제 잘못이에요.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제가 고집을 부려서…….”

줄리엣은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자초지종을 요약해 설명했다.

마그다가 상단 행렬을 보고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연락용 팔찌를 벗어 둔 걸 깜빡하고 그녀를 따라 나선 것, 무너진 지반틈에 빠져서 사라졌던 아이들과 던전의 입구를 발견한 것 등 말이다.

“아니, 아무리 그렇대도 겁도 없이~!”

이자크는 드물게 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줄리엣을 보고는 오래 화내지 못했다.

이자크는 자꾸만 비틀거리는 조카를 향해 최대한 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준엄하게 말했다.

“이 일은 나중에 묻겠다. 우선 빨리 들어가서 치료부터 받자꾸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레이와 상단 사람들이 줄리엣을 마차 쪽으로 끌고 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자크는 뒤돌아섰다.

"이걸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거기에는 줄곧 조용히 서서 흥미롭다는 듯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대략 열 명 남짓한 남녀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훤칠한 체격에 인상적인 외모를 자랑했다.

비단 외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라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들은 고대의 사제들이 입었을 법한 느슨한 카타나(사제복)를 입고 있었는데, 금사가 들어간 흰 의복은 확실히 인간의 직물은 아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어딘가의사제들처럼 보였지만 잔뼈 굵은 용병이었던 이자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자크는 깍듯하게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조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숲의 종족이 분명했다.

이자크는 적잖이 긴장 중이었다. 메리골드 상단의 부단주로 그리고 용병으로 다년간 별의별일을 다 겪어 본 이자크였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라이칸슬로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숲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웨어울프는 워낙 폐쇄적이고 인간을 경멸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었다.

특히나 카티아의 왕, 은의 숲의 지배자들은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해서 말 섞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나 이자크의 감사 인사를 를받은 젊은 청년은 꽤 호의적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무리 중 어린 축이었지만 그가 대표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잿빛 머리의 청년은 이자크의 인사치레에 드물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자크는 조금 희망을 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숲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풍문이 돈 적이 있었다. 어째 그 이후로 은의 숲동향이라고 할 것 없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만약 로드가 바뀌었고, 이번 대의 로드의 성향이 인간에게 우호적인 편이라면? 이 청년 역시 새로운 로드의 세력일지도 모른다.

약간의 기대감을 담고 이자크는 자신을 공손히 소개했다.

“저는메리골드 상단의 이자 크 르바탄이라고 합니다.”

청년은 내밀어진 손을 잠시 보다가 이내 이자크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로미오 바스칼입니다. 로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제 조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은혜를 갚았을 뿐인 걸요.”

“예? 은혜라니요?"

이번에야말로 이자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로이는 싱긋 웃었다.

**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줄리엣이 헬레네에게 사과했다.

집이 아닌 밖에서 앓아누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헬레네는 어디선가 엄청나게 화려한 사두마차를 가져왔다.

사실 화려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한 크기의 마차 안이 온통 푹신하게 채워져서, 마차는 거의 움직이는 침대나 다름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헬레네가 산 한복판에서 어떻게 그런 걸 심지어 몇 시간 만에 가져올 수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대충 메리골드상단의 권력을 이용한 듯했다.

“무슨 섭섭하게 그런 말을.”

헬레네는 줄리엣이 딱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말고 푹 자고 푹쉬렴. 그래야 빨리 낫지. 알겠지?"

“네.”

꼭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줄리엣은 조금 민망해졌다.

급한 짐들은 상단 사람들이 에셀리드와 줄리엣을 찾는 사이 앞서 카르카손에 도착했다고 했다.

덕분에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두마차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외삼촌 내외 식구들과 줄리엣 그리고 로이의 일행들 정도였다.

뒤척이던 줄리엣은 물끄러미 작은 협탁에 올려진 유리잔을 바라보았다.

안에 든 것은 무려 얼음이 든 아이스티로, 유리잔 표면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산골짜기에서 얼음이라니.'

아무리 메리골드상단이 크다지만 여기선 꽤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하지만 누가 가져다 두었는지 짐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 너 여기서 뭐하냐?”

“아…… 좀.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뭐? 웃긴 새끼네, 이거. 뭐 하냐니까?”

"아 쫌! 상관 말고 꺼져….…!”

마차 바로 밖에서 낯익은 형제가 툭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낮추는 테오를 그레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아까부터 마차 밖을 서성이던 인기척이 신경 쓰였는데, 테오였던 모양이다.

줄리엣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흥. 지은 죄가 있어서 양심에 에찔리긴 했던 모양이지.'

하지만 줄리엣은 아직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기에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푹 묻었다.

열이 오른 탓인지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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