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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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르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잠자는 마물을 잔뜩 화나게 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줄리엣은 절벽의 한쪽 벽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뱀 마물이 몸부림칠 때마다 지형이 바뀌어 버려서 사실 이제는 절벽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마그다가 다급히 줄리엣을 향해 외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그다와 아이들. 에셀리드는 타이밍 좋게 절벽 근처의 틈으로 피신해 있다는 거였다.
'물론 저 뱀이 저렇게 버티고 있어서야 올라가긴 힘들겠지만…….’
잠시만 뱀의 주의를 돌리면 그들은 그 틈을 타서 절벽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줄리엣!”
줄리엣은 절벽 끝에 매달려 담 담담히 생각했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줄”
에셀리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줄리엣은 절벽 끝 융기를 밟고 올라섰다. 그 곁으로 나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키르르르…….
잔뜩 화가 나서 몸부림치던 뱀이 갑작스레 잠잠해졌던 것이다.
… 환술?
에셀리드는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마그다, 아이들을 데리고 빨리 올라가요!”
**
팟.
연결이 끊기고 의식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그 순간. 줄리엣은 두통을 느끼고 약간 그 자리에서 휘청했다.
키르르르!
운 나쁘게도 연결이 끊김과 동시에 뱀 마물 역시 고통을 느끼고 날뛰기 시작했다.
“줄리엣!”
위에서 에셀리드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 손이 터무니없이 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에셀리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줄리엣은 이미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 이런.
줄리엣은 가물거리면서 후회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줄리엣은 천천히 추락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게 주마등이란 걸까?'
줄리엣은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들이 한 번에 스쳐 지나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추락하는 순간 줄리엣이 떠올린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울어나 줄까.’
참 타이밍에 어울리지 않게도 도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다.
그 남자는 무너진 던전에서 누가 죽어 가는지 따위는 영영 알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파드득 하고 일제히 날개를 편푸른 나비들이 그녀의 주위를 무리 지어 스쳤다.
멀리서 보면 푸른 꽃잎들에 감싸인 것처럼 보였다.
줄리엣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충격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쿵.
'…쿵?’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줄리엣은 이상한 낌새에 눈을 느리게 떴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제대로 보기도 전에.
"!”
홱 하고 별안간 몸이 쏠리는 느낌이 났다.
느리게 떨어지던 조금 전까지는 비교도 안 되는 급격한 방향전환에 줄리엣은 아찔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줄리엣은 그게 누가 자신의 허리를 허공에서 낚아챘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로드!”
낯선 목소리가 크게 외치는 걸 들었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힘들게 눈을 뜬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거대한 붉은 털을 가진 늑대였다.
늑대는 유유히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뱀 마물을 짓밟고 튀어 올랐다.
“나탄!”
“데리고 나가라고 했잖아!”
줄리엣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쾅!
키에에에!
잠시 눈을 뗀 사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뱀 마물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쿵!
순간적으로 섬광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뱀의 몸체가 절벽 한쪽 벽에 부딪혀 있었다.
“줄리엣!”
그녀가 절벽 위로 끌어올려졌다.
완전히 넋이 나간 줄리엣은 그제야 겨우 제가 사흘 만에 단단한 땅 위로 올라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안녕, 줄리엣.”
호박색 눈 한 쌍이 그녀를 보고기쁜 듯 웃고 있었다.
*
밖으로 나왔을 때, 줄리엣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대한 뱀 마물이 몸을 뒤틀며 죽어 가면서 내뿜는 독성 때문인지, 머릿속이 안개 낀 듯 멍하고 어질어질했다.
'약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이따위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토할 것 같진 않았지만 절벽에서 떨어지고 이리저리 짐짝처럼 옮겨지면서 뛰어다녔던 통에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때문에 줄리엣은 조금 독성이 가신 뒤에야 자신이 평화로운 숲한가운데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일행들은 하나같이 인상적인 외모들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큰 키에 건강해 보이는 체격들이었다.
그들은 줄리엣을 어쩐지 알 수 없는 눈으로 힐끔거리다가 하나둘씩 어딘가로 또 사라져 버렸다.
"네가 줄리엣이구나?"
그래서 줄리엣의 곁에는 두 명만이 남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말을 붙이자 남자가 툭하고 저지했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엘자.”
'엘자'라고 불린 여자는 구불거리는 풍성한 금갈색 머리칼을 갈기처럼 늘어뜨린 여자였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하고 키도 큰 대단한 미인이었다.
"하여간 재미없다니까. 나단, 그러니까 네가 인기가 없는 거야.”
나단이라고 불린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단은 짧은 회갈색 머리칼에 근육질인 남자였다.
어딘지 수도자처럼 금욕적인 인상이었고 조용히 있으면 나름 잘난 얼굴이었지만 어깨에 새겨진 문신이 인상적이었다.
엘자는 투덜거렸지만 여전히 줄리엣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엘자는 팔짱을 끼고 줄리엣 바로 곁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줄리엣을 만져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일부러 팔짱을 낀 것 같았다.
"우와.”
그러나 만져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킁킁.
“정말이네? 진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엘자가 눈을 빛내며 즐거워했 했다.
“나단, 얘 좀 봐! 나무딸기 냄새야!”
……무슨 냄새?
자기가 어떤 몰골인지 아는 줄리엣은 귀를 의심했다.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줄리엣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있냐, 멍청아.”
나단이 쏘아붙였지만 엘자는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계속 줄리엣의 곁을 기웃거리는 엘자는 꼭 새 장난감을 눈앞에 둔 어린애 같았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지고 같이 놀고 싶어서 안달하는 어린애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온몸에 힘이 풀려서 가만히 앉아 있는 줄리엣을 만져 보고 싶은 것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가만있질 못했다.
“줄리엣에게서 손 떼, 엘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이크."
나탄과 툭탁거리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엘자는 후다닥 줄리 엣에게서 물러났다.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꺼져.”
내뱉은 것은 잿빛 머리칼의 젊은 남자였다. 등에 지고 온 것을 내려놓은 뒤, 남자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가서 인간들이나 불러오는지."
남자의 눈치를 보던 나단이 재빨리 엘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힝.”
엘자는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줄리엣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줄리엣은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지는 장소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관객처럼 이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마물의 독에 취한 탓인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괜찮아요?”
두 사람을 쫓아 버린 다음, 남자는 줄리엣의 앞에 앉아 그녀와 조심스레 눈을 맞췄다.
조금 전의 두 사람을 대할 때와는 온도가 딴판이었다.
은회색 머리칼, 흰 피부 그리고 투명한 황금빛 눈.
줄리엣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남자 이름이.
“....…로미오.”
로미오. 로이. 줄리엣을 구한 사람은 그였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