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허!”
검은갈기 길드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막혀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메리골드 상단의 정령사래서 기대했더니만, 쯧.”
"에이, 괜히 시간만 버렸네.”
“하기야. 저런 여자가 뭘 알겠어?”
실망한 길드원들은 투덜거리며 멀어졌다.
그러나 줄리엣은 개의치 않았다. 그 반응이 바로 그녀가 원했던 것이었다.
흡족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뒤를 돌아본 줄리엣은 살짝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에셀리드가 그녀를 보고 빙그레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참 놀라운 능력이군요.”
잔뜩 비꼬는 말에도 줄리엣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을 돌아보니 마그다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마그다.”
마그다는 자신의 딸인 데이나와 마을 아이들을 붙잡아 보호하고 있었다. 조금 전 줄리엣의 나비를 보았기 때문인지 줄리엣을 힐끔거리던 데이나가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엄마는 조각가예요!"
“그러니?”
줄리엣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지만 에셀리드는 흥미를 보였다.
“조각가요? 카나벨에서 말입니까?”
"아뇨. 원래는 카르카손에서 미술 학교를 다녔어요. 카나벨로 온 지는 얼마 안 되었고요. 카나 벨산 대리석은 아주 유명하거든요.”
호기심을 느낀 줄리엣이 물었다.
“그럼 요즘도 조각 작업을 하시나요?”
“네, 아직 미완성이지만요."
“어떤 조각이요?”
“비탄의 성녀상인데 ….…."
“비탄의 성녀요?"
신학에 관심 없는 줄리엣은 그런가 보다 했지만 엉뚱하게도 고개를 번쩍 쳐든 것은 에셀리드였다.
“올해 사육제에 맞춰서 조각하는 그겁니까?”
“네, 맞아요.”
"대단한 거예요?"
“대단한 거냐고요? 엄청난 겁니다! 전 대륙에서 단 열세 명의 조각가만 안는 영예라고요!”
“그,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아직 미완성인 걸요."
마그다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에셀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시선으로 쯧쯧 면박을 주자 줄리엣이 그를 흘겨보았다.
아니 종교에 관심 좀 없을 수도 있지. 왜 유난이야?
“그러는 에셀은 마법사잖아요?
마법사도 종교 믿어요?"
“안 될 건 뭡니까?"
"마탑과 신전은 사이 나쁜 거 아니었어요?”
에셀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마그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러다간 얼굴 없는 성녀상이 될지도 몰라요. 어떤 얼굴로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요컨대 그런 얘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조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의 기준은 다 조금씩 다르다. 더욱이 의뢰자가 신전인 인만큼 그 고매하신 미적 기준을 만족시키기가 너무 어렵다.
“차라리 실존 인물을 조각하는 게 훨씬 쉬워요.”
“밑그림을 따로 그릴 필요가 없으니까?”
“네. 거기에 본바탕보다 조금씩만 잘생기게 조각하면 사례금을 언제나 두둑이 받죠.”
마그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데이나도 긴장이 풀린 듯 까르르 따라 웃었다.
"어이, 이봐. 저거 문처럼 보이지 않아?”
그때 슬슬 굶주림에 미쳐 가던 검은갈) 길드원 중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줄리엣과 에셀리드 역시 그들이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절벽 한쪽의 색이 좀 달라 보이긴 했다.
“문처럼 보이나요?"
“글쎄요. 근데 문처럼 보이면 뭐가 달라질까요……?”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검은갈기길드원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나흘 만에 희망을 발견한 그들은 잔뜩 들떠서 웅성거렸다.
“이거다!”
“여기를 뚫으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검은갈기길드원들은 희망에 차서 외쳤다.
"어서 파!”
글쎄.
줄리엣은 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서식지의 구조는 옛날 얘기랑 똑같았다. 보통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귀한 보물이 나오고, 더 강한 마수가 살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는 운 좋게 지반이 무너져 밖으로 드러난 곳이지만 오래된 서식지란 얘긴데.
운이 좋으면 지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찾을 수도 있지만, 아니면…….
게다가 저 조악한 도구들도 못미더웠다.
괜히 더 팠다가 절벽이 붕괴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말릴 힘도 없었다.
‘어차피 저러다 말겠지..'
줄리엣은 귀찮아서 신경 끄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줄리엣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절벽 아래로 떨어진 이래시간 개념이 모호해진 지도 오래 되었다. 줄리엣은 여기 떨어진 이래로 하루쯤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해가 지지 않았으니까….….’
사실 빛이 잘 들지 않는 비좁은 절벽이고, 또 산속이라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에.”
“네.”
"저거 마법이에요.”
에셀은 줄리엣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들은 더 이상 다툴 기력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게 꿀을 넣은 차가운 우유였다니. 최후의 만찬치고는 꽤 호화로운 식사였다.
“그렇군요. 저게 결계로군요.”
에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저것만 깨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소리를 쳐서 도움을 청하는 건 가능하겠지.
하지만 어떻게?
저 위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저 천장에 닿는다 해도 결계를 어떻게 깨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두드린다고 깨질 것 같지도 않고.’
물론 마법은 물리적인 힘에 약한 법이니까, 굉장히 큰 충격을 가하면 깰 수 있을 테지만.
같은 생각 중이었는지 에셀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 나비를 이용하면-”
“그런 건 못해요.”
줄리엣은 단호하게 말했다.
건 안 말에
물리적인 건 안 된다는 말에 에셀이 좀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에셀이야말로 마법사잖아요. 뭔가 할 수 있는 거 없어요?”
그러자 에셀리드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가 무슨 만능인 줄 아십니까? 뭐가 있어야 주문을 쓰든지 하는데”
에셀은 길드원들 쪽을 힐끔 한번 곁눈질한 다음 목소리를 낮춰속삭였다.
“.....… 여기서는 쉽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줄리엣은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들었다.
여기서 나가기는커녕 마음을 바꿔서 저 길드원들이 돌변해서 그들을 죽이려 든다면 힘들어질 거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저들이 메리골드 상단과 마탑의 마법사라는 에셀리드의 직함에 겁을 먹고 감히 덤벼들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거지만…….
줄리엣은 슬쩍 길드원들의 수를 헤아렸다.
그들은 여전히 절벽의 석벽을 깨고 말겠다며 열심히 곡괭이질 중이었다.
“더 이상은 못 파겠어.…….”
“교대하자고, 교대!"
총 열두 명.
그에 반해 이쪽은 마력이 제한된 마법사가 하나, 정령사 하나.
나머지는 다섯 명의 어린애들과 마그다였다. 솔직히 마그다와 아이들은 인질로나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줄리엣이 찬찬히 일행들을 둘러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에셀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테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마치 줄리엣의 생각을 읽기라도한 듯한 말에 줄리엣은 그를 돌아보며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에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부연했다.
“그래 봬도 꽤 검 실력이 좋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요.”
"본 적 없어서 모르겠네요."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캉!
놀란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뚫렸다!”
검은갈기 길드원들이 기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절벽 한쪽에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 단단한 석벽이 곡괭이질 몇 번에 뚫린단 말이야?'
“이제 조금만 더……!”
그때였다.
쿠구구궁.
"방금, 나만 느낀 거 아니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줄리엣은 귀찮다는 이유로 저 비허가 길드원들이 멍청한 짓을 하도록 놔둔 것을 후회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을까?
서식지에는 그곳의 주인인 마물이 있다. 하물며 이렇게 깊고 거대한 서식지에는 당연히 거대 마물이 있겠지.
쾅!
"아아악!”
절벽 가까이 서 있던 길드원 몇몇이 강한 충격으로 튕겨져 나왔다.
“조심해요!”
에셀이 마그다와 아이들 쪽으로 펄쩍 뛰었다.
"!"
금이 간 석벽뿐만 아니라 그들이 조금 전까지 딛고 서 있던 이끼가 잔뜩 깔린 푹신한 바닥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키아아아!
줄리엣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그들이 서 있던 곳은 거대한 뱀 마물의 몸뚱이 위였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