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53화 (50/229)

53화.

이것도 마력석인가?

그냥 돌멩이라고 해도 보기 드물게 예쁜 모양이었기 때문에 줄리엣은 그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마력석을 와르르 다 쏟아 버리고 그 까만 돌멩이만 조심히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가 있었죠. 마물의 왕인 드래곤이 자리를 잡으면 그 주변에 자연적으로 하급 마물들의 서식지가 생성된다고요.”

처음 듣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드래곤이 멸종한 지금에는 더 이상 새로운 서식지는 생성되지 않는다고도 하고요.”

“그럴듯하네요.”

“그렇죠? 그러면 다른 지역에 에비해 대륙 동쪽에 왜 유달리 이런 서식지가 편중되어 있는지도 설명되고요.”

줄리엣과 에셀은 나란히 바닥에 앉아서 그런 한담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배고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사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

“테오 르바탄 ……죽여 버릴 거 거야.”

에셀은 어이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말아요.”

줄리엣이 투덜거렸다.

“애초에 테오가 추적기에 장난만 안 쳤어도 우린 여기서 진즉나갔을 거라고요.”

에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가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던 것이다.

"내 말이 맞죠.”

“줄리엣.”

"네, 왜요.”

“..… 사람 흉골 바로 아래, 여기를 명치라고 합니다.”

“....… 그런데요?"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에셀을 따라서 제 명치를 짚어 보았다.

에셀리드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명치를 노려요.”

* * *

“하지만 이건 깨기 힘들겠는데, 요.”

꼼꼼히 절벽을 살펴본 뒤, 그들은 자력으로 이곳에서 탈출하기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줄리엣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서 죽게 되나요?”

에셀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줄리엣은 가만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타고난 팔자는 고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지난 삶에서도 줄리 엣은 스물다섯에 죽었다. 이번 생에도 이렇게 죽게 되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아직 달리아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리고, 칼라일을 다시 만나지도 못했는데, 억울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하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여기서 죽는 걸 알 수나 있을까? 아니, 알게 되면 슬퍼나 해 줄까.

“역시, 테오가 있었어야 균형이 맞았겠는데요.”

벽을 살펴보면서 에셀리드가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검사, 마법사 그리고…….”

말꼬리를 흐리면서 에셀리드가 줄리엣을 똑바로 보았다.

“정령사.”

맞죠?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진부하게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흐어엉….”

그때 훌쩍거리던 어린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떨어진 지 세 번째 밤이 되자 어린애들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식량도 없고, 어둠도 무섭고.

어린아이들로서는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울지 말렴. 얘들아.”

줄리엣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에셀은 실소했다.

'위로인지 협박인지.'

으아앙!

애들답게 하나가 울기 시작하니까 연달아서 운다.

“쉿. 착하지, 데이나.”

마그다가 아이를 달래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안 그래도 좁은 절벽 틈에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대쪽 벽에 붙어 누워 있던 길드원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거기! 애새끼들 조용히 좀 시켜!"

이게 지금 다 누구 때문인데?

줄리엣은 그들을 쏘아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 쪽으로 다가갔다.

“착하지? 언니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

신기한 거?

아이들은 물론이고 반대편의 길드원들조차 혹해서 고개를 번쩍들었다.

줄리엣은 훌쩍거리는 아이의 손을 펴게 한 다음 손바닥을 잠시 맞댔다가 뗐다.

그러자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 하나가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셀리드의 눈이 커졌다.

"와…….”

손톱만 한 아주 작은 나비는 파닥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울던 것도 잊고 파닥거리며 도망 다니는 나비를 쫓아 다니느라 정신없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에셀이 그녀를 의외라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다정하군요?”

"애들이 울면 마물들이 우릴 더 빨리 찾아낼 거예요. 그럼 우린 더 빨리 죽겠죠?"

“아하."

줄리엣은 심드렁하게 그러나 아이들과 마그다에게는 들리지 않게 소곤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에셀은 웃음을 을꾹 참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를설레설레 흔들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다소 착잡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그동안은 믿는 구석도 좀 있었다.

납치를 당하는 길을 잃는 그냥 생존만 해 있으면 찾으러 와 줄사람이 있었다. 감히 제 것을 해하려 한다는 게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레녹스는 안 와.

'그게 네가 선택한 거잖아.'

줄리엣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에셀.”

“네, 줄리엣.”

줄리엣은 조금 긴장해서 물었다.

“숙모님한테 이를 거예요?"

“예?”

에셀리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을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왜요?"

“마법사니까요."

줄리엣은 그렇게만 말했지만 에셀리드는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크.”

그는 과장되게 고개를 뒤로 빼는 시늉을 했다. 소리 없이 나타난 나비 두어 마리가 아까부터 위협적으로 그의 곁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좀 치워 주세요.”

에셀리드가 꼭 면도날이라도 목에 들이밀어진 사람처럼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오히려 저한테 위험하죠. 저것들은 말입니다.”

이론상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럼 이카론의 맹세를 해 주세요. 제가 말해도 좋다고 하기 전까지는 숙모님이나 삼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요.”

에셀리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카론의 맹세라니.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은 겁니까?"

“약속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좋아요. 맹세합니다.”

에셀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검은갈기길드원들이 굉장히 어정쩡한 표정으로 가까이 와 있었다.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줄리엣은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힘이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검은갈기 길드의 길드장, 압실론이요.”

“에셀리드입니다. 메리골드상단의 마법사입니다.”

줄리엣을 대신해서 에셀리드가 대신 말했다. 압실론의 뒤에 있는 다른 길드원들은 에셀리드를 경계하듯 힐끔거렸다.

“아, 그래.”

압실론은 에셀리드의 어깨너머로 줄리엣을 힐끔거렸다.

"그…… 우리가 비록 아름답게 만난 건 아니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서로의 능력 정도는 알아야. 그 뭐냐-"

“탈출에 도움이 되지 않겠소?”

다른 길드원이 말을 받았다.

에셀리드는 기막히단 표정을 지었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좋습니다.”

그러자 길드원들은 차례로 자기 소개를 했다.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마그다와 아이들도 이름을 말했다. 그렇게 한 바퀴 빙 돌고 나자 남은 것은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한쪽에 앉아 있던 줄리엣뿐이었다.

“어흠!”

압실론이 목을 가다듬곤 물었다.

“그쪽의 아가씨는 무슨 기술이 있소?"

줄리엣은 팔짱을 끼고 구경하다가 모두의 눈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말을 꺼낸 것은 줄리엣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사람들 앞에서 나비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나비를 노출했으니까.

줄리엣은 비딱하게 기대어 서 있다가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 내 몽글몽글 뭉치고 선명한 형태를 갖췄다.

완전히 나비의 형태가 된 빛은 날개를 파닥이며 위까지 올라갔다.

파지직.

기운차게 올라가다가, 결국은 은위의 결계에 막혀 밖으로 나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오….”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에셀리드뿐이었다.

그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줄리엣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제가 소환한 정령이에요."

줄리엣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쟤네는….”

줄리엣은 리오넬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모든 걸 보여줄 필요는 없단다.”

"반짝여요.”

“....… 뭐요?”

“그…. 그게 답니까?"

“네, 어두운 데서 무척이나 쓸모 있죠.”

줄리엣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반짝반짝!

나비들은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전보다 열심히 반짝이는 빛을 뿌리며 날아다녔다.

잊혀진 줄리엣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