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
그녀의 반응이 기대와는 영 다르자 그레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몰라? 북부 칼론의 공작 가문말이야. 수도에서도 유명하지 않아?"
줄리엣은 말없이 웃었다.
리오넬이 말하길, 그녀의 사촌들이 줄리엣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수도에 살았었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아뇨. 맞아요, 유명해요."
“근데 반응이 왜 그래?”
“그냥, 좀……. 놀라서요.”
줄리엣은 애써 미소 지었다.
“그래. 우리도 좀 의외긴 했어.”
그레이가 잠시 생각에 잠겨서 턱을 문질렀다.
"분명 공작가의 혼사이니 상대도 대단한 가문일 텐데, 신부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는 아직까지 말이 없단 말이지.”
“......."
당연하다.
레녹스 칼라일이 아내로 맞을 여자는 가문도 지위도 알려진 바가 없는 여자일 테니까.
그리고 칼라일 공작은 그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금할 것이다.
헐뜯기고 내몰려도 신경 쓰지 않고 방치했던 누구와는 달리.
“줄리엣?”
고개를 떨군 줄리엣이 한참이나 말이 없자 그레이는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줄리엣, 혹시 내가 뭔가 실수했어?”
그레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 아니에요. 저, 저, 잠시만요.
뭘 좀 두고 나와서요.”
줄리엣은 변명하듯 아무 핑계나 대곤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대충 발길 닿는 대로 조금 걷다 보니 그녀의 짐이 실린 짐마차 앞이었다.
줄리엣은 별생각도 없이 마차 문을 벌컥 열고 짐 가방을 찾았다.
뭘 하는지 자각 없는 무의식으로 손을 뻗어 짐을 헤집었다.
깔끔히 정리된 가방 안이 금방 엉망이 되었지만 줄리엣의 머릿속만큼은 아니었다.
'결혼식이라고.’
칼라일 가문에 결혼식을 치를 나이의 사람은 딱 하나뿐이다.
그녀가 수도를 떠난 지 지금 며칠이나 되었더라. 일주일? 열흘?
누구와? 달리아와?
똑똑.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줄리엣? 안에 있니?"
“네!”
줄리엣은 다급히 뺨을 훔치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쉰 다음 마차 문을 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헬레네가 서 있었다.
헬레네의 뒤로 어쩐지 불안한 표정으로 기웃거리는 그레이가 보였다.
보아하니, 걱정이 된 그레이가 쪼르르 달려가 헬레네에게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줄리엣, 너 괜찮니?”
“네. 두통이 있어서 약 좀 찾으려고요.”
줄리엣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웃으며 손에 쥔 작은 약통을 흔들어 보였다. 알약들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랬구나.”
헬레네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웃으며 줄리엣을 안아 주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구나.
대신 꼭 돌아와서 재밌는 거 잔뜩 같이하자. 알겠지?”
헬레네가 줄리엣의 등을 도닥였다.
“네, 여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
이자크와 헬레네, 그레이까지 떠났다.
예정대로라면 일행은 카르카손을 향해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앞서 내린 비가 굵어져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지나가는 비니까, 그치면 금방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단을 이끄는 총관이 줄리엣에게 와서 설명해 주었다.
총관 발터는 말 그대로 상단주인 헬레네를 대신해서 거의 모든 상단의 실무적인 일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떠나기 전 헬레네가 당부한 모양인지 발터는 시시각각 줄리엣에게 출발이 늦어지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줄리엣이 바쁘실 테니 알려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발터는 요지부동이었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면서 줄리엣은 천막 아래에서 시간을 죽였다.
사실 헬레네와 이자크가 떠난 이후로 상단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 고작 서너 명이 떠났을 뿐이고, 카르카손을 향해 가는 일행은 여전히 대규모의 마차 행렬이었는데도 다들 말수가 적어진 느낌이었다.
“… 뭐 하냐?"
바뀐 분위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뜻밖에도 테오였다.
줄리엣은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앉아 있는데.”
줄리엣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테오가 인상을 구겼다.
“시합할래? 이번엔 소원 두 개 걸고.”
이 빗속에?
줄리엣은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아니.”
“……너 질까 봐 그러지?”
줄리엣은 어이없다는 듯 테오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네가 이긴 거로 해 줄게.”
“뭐? 그런 게 어딨어?”
테오가 기분이 상한 듯 벌떡 일어났다. 이긴 거로 해 주겠다는데도 난리네.
“너 자꾸 그렇게 나오면 애플팔아 버리는 수가 있거든!"
“가져. 어차피 내 것도 아니잖아.”
다시 테오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긴 하다. 애플은 메리골드상단의 자산이니까.
“흥. 재미없긴.”
지분거리던 테오도 줄리엣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당황한 눈치였다.
결국 그는 줄리엣 주변만 기웃거리다가 제풀에 지쳐서 투덜거 거리며 어디론가 가 버렸다.
줄리엣은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딱히 뭔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테오는 아무래도 그녀가 우울해진 원인이 헬레네와 이자크가 떠나서라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는 외숙모 외숙부 때문도, 날씨 때문도 아니었다.
줄리엣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집에 가고 싶다.'
그 남자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대륙 반대편으로 도망쳐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그의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줄리엣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쯤 되니 아예 다른 대륙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는 가고 싶었지만 그게 딱히 제도에 있는 모나드 저택이 아니라도 된다.
어딘가 안전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영영떠나 버리고 싶었다.
사실, 그 남자의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았다.
'잠깐. 그럼 이제 집에 가도 되나?'
칼라일 공작의 결혼식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수도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줄리엣은 당장 백작저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줄리엣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건 그가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사실뿐, 그밖에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른 생각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줄리엣은 마차에서 책을 한 권가지고 천막으로 돌아왔다.
“앗.”
차가워.
문득 줄리엣은 목덜미에 떨어진 물방울에 흠칫 놀랐다.
책에서 눈을 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줄리엣…… 아가씨?"
그리고 천막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 살짝 어색하게 그녀를 불렀다.
상단의 마법사인 에셀리드였다.
그는 꽤 어색한 표정으로 손에 컵을 들고 있었다.
“?”
“들어가도 될까요?"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 펴 놓은 천막은 어차피 그녀의 개인 공간도 아니었다.
달칵.
갑자기 테이블 위에 에셀이 들고 온 컵을 내려놓았다.
“드세요. 아침 식사 대신입니다.”
“감사합니다.”
우유처럼 보이는 차가운 음료였다. 마침 목이 말랐던 줄리엣은 별생각 없이 컵을 들고 마셨다.
입에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네요. 어디서 났어요?”
줄리엣은 호기심을 느끼고 에셀을 올려다보았다. 산속이라 이렇게 차가운 우유는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아 그건 제가 아니라 저기-"
에셀은 스무 발자국쯤 떨어진 천막 바깥을 가리키려다가 눈썹을 올렸다.
허어? 저건 또 뭐 하는 짓이람.
에셀리드는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마차 뒤에 몸을 숨긴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심지어 제대로 숨겨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고개를 죽 뺀 것 때문에 붉은 머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다만 숨어 보겠다는 의지가 가상해서 한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에셀은 결국 혀를 한 번 찬 다음, 줄리엣에게 말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줄리엣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여 에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에셀은 줄리엣의 손에서 빈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은근슬쩍 줄리엣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루만 더 지나면 카르카손에 도착합니다.”
"네, 그러네요.”
"드디어 바퀴 달리지 않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괜찮죠?”
줄리엣은 픽 웃었다.
에셀리드가 어울리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 가 보려 너스레를 떠는 게 꽤 재밌었다.
사실 그녀 쪽에서 처음부터 마법사라는 이유로 그를 경계했을 뿐, 에셀리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었다.
다행히 줄리엣은 에셀을 쫓아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줄리엣은 잠시 그에게 시선을 힐끔 주었다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셀은 줄리엣이 접어놓은 페이 지가 벌써 한참 전부터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몇 시간째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에셀은 살짝 회의감을 느꼈다.
에셀은 르바탄 일가를 상당히 좋아했지만 어디까지 고용주와 와고용인의 입장에서였다.
그리고 그건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줄리엣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줄리엣에 대한 에셀리드의 태도는 적당한 사교술을 섞은 예의바름에 가까웠다. 고용주 일가의 조카라고 해서 살갑게 대해 줄 필요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에셀리드는 가져온 것을 테이블 위에 잔뜩 꺼내 놓았다.
“이건 뭐예요?”
설마 이런 거로 될까 싶었지만,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줄리엣은 그가 가져온 물건에 관심을 보였다.
평범한 가죽 팔찌였다.
가운데에 녹색 수정인지 뭔지 모를, 어쩐지 싸구려 같은 장식이 달린 것을 빼면 여느 팔찌와 다르지 않았다.
“추적 마법입니다.”
"아.”
이 팔찌처럼 생긴 물건의 어디가 추적 마법인가 생각하던 줄리 엣은 이내 그 말뜻을 깨달았다.
“마력석이군요. 이해했어요.”
마력석에 마법사가 주문을 걸어 한정된 시간 동안 팔찌를 추적할 수 있게 하는 거다.
“숲은 위험하니까요.”
“유능하네요.”
줄리엣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거라면 북부나 제도에서도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력을 일일이 불어넣을만한 마법사의 노동력이 있어야겠지만 확실히 새로운 방식이다.
마탑에서 개발한 방식일까?
‘마탑이라..'
줄리엣은 힐끔 고개를 들어 에셀리드의 눈치를 살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에셀도 마탑에 있었어요?"
“물론이죠.”
“그럼 왜 마탑을 나온 거예요?"
에셀은 빙긋 웃으며 마력을 채워 넣은 추적 장치들을 들고 일어섰다.
“저는 이걸 테오에게 가져다주고 오겠습니다.”
갑자기?
“궁금한 거 물어보라면서요?”
“물어봐도 된다고 했지 대답해 해준다고는 안 했잖습니까?"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이람.
줄리엣은 말을 말자는 표정을 을지었고 에셀은 빙그레 웃었다.
그때였다.
“도와주세요!”
뭐지?
갑자기 바깥이 시끌시끌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