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49화 (46/229)

49화.

*

승마 내기가 끝난 후 줄리엣은 내키면 말을 타고 속도를 내서 행렬의 맨 앞까지 달리기도 하고, 애플이 지치거나 좀 쉬고 싶으면 다시 행렬의 맨 뒤로 돌아와 걷기도 했다.

줄리엣은 지금 짐마차 뒤편에 거꾸로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애플에게는 보상으로 각설탕이 듬뿍 주어졌다.

애플은 느리고 행복하게 각설탕을 받아먹었다.

"응? 비밀이 뭐냐니까?"

"너 반칙했지? 그치?"

테오와 그레이가 번갈아 가면서 끈질기게 귀찮게 굴었지만 줄리 엣은 느긋하게 차만 홀짝였다.

"말 안 할 거예요."

제풀에 지친 그레이는 시무룩해졌고 테오는 줄리엣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이자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군마들을 이기다니, 애플이 대단하구나.”

그 말에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테오와 그레이는 지레찔린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군마들이라니. 처음부터 작정하고 경주를 하자고 한 게 틀림없었다.

“군마들이라면, 저 말들은 카르카손 출신인가요?”

“그래. 카르카손 출신 말들이 유명하지. 제국군도 매년 엄청난 수를 사들인단다.”

“그러고 보니 카르카손에도 병영이 있었죠?”

“그렇지.”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아?"

그레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줄리엣은 대답 대신 애매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와서야 떠올랐는데, 줄 줄리엣에게는 카르카손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할진 모르지만…….’

줄리엣에게는 나름 꽤 가까운 관계긴 했다.

빈센테 보우만.

한때 약혼자였던 남자.

물론 7년 전 모나드 백작 부부가 죽은 이후로는 흐지부지 관계가 끊겨 버렸다.

열 살 어린애였던 시절부터 가문끼리 맺어 둔 약혼자였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파혼서를 따로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어쨌든 줄리엣과 보우만가의 관계는 7년 전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오히려 보우만 후작가 쪽에서는 안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이 없는 모나드 백작가에 아들을 데릴사위로 보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니까.

정작 줄리엣은 빈센테 보우만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었다.

조금 신랄하게 평가하자면 그녀보다 네 살 많았던 그녀의 약혼자는 반반한 얼굴을 빼면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게다가 첫 번째 삶에서 우연히 소문을 들었을 때는 도박에 손을 대 패가망신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언젠가 줄리엣이 레녹스를 따라 북부로 간 이후 연회에서 우연히 마주칠 뻔한 일도 있긴 했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빈센테 쪽에서 먼저 불쾌하다는 듯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 이후로는 만난 적 없었다.

그가 카르카손에 있다는 것도 우연히 들은 얘기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들은 게 2, 3년 전이니까 지금쯤은 카르카손에 없을 수도 있겠구나싶었다.

줄리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빈센테가 죽는 게 언제쯤이더라?'

땡땡땡!

앞쪽에서 종이 울리자 짐마차 행렬이 천천히 멈췄다.

카르카손에 도착하기까지 이틀 정도 남았다는 얘길 들었을 때 줄리엣은 아쉬움까지 느꼈다.

줄리엣이 그런 감상을 말하자 듣고 있던 헬레네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이슬비를 피할 겸, 잠시 멈춰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말들에게는 휴식과 먹이가 주어졌고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차가 주어졌다.

“의외네.”

“뭐가요?”

“사실 널 만나기 전에는 좀 걱정했거든.”

헬레네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보다시피 이런 -”

검지를 척 치켜든 헬레네는 뭔가를 찾듯 오른손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 있는 건 헬레네의 두 아들이었다. 그레이가 낄낄거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그레이 르바탄, 이 빌어먹을 새끼야!"

테오가 뭐라고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뭔진 몰라도 또 유치한 거로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둘 다 성인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유치했다.

주변의 메리골드 상단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인 듯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라 네가 싫어하면 어쩌나 했어. 여자애는 키워 본적이 없어서.”

헬레네는 어깨를 으쓱했다.

“릴리안도 마차 여행을 좋아했지.”

그 말에는 줄리엣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희 엄마를 만난 적 있으세요?”

“그러엄.”

헬레네가 흔쾌히 긍정했다.

“릴리안이 지금의 너만큼, 아니다. 지금 너보다도 어릴 때 얘기 이겠구나.”

그러고 보니 이자크는 리오넬의의큰아들이었고, 릴리안은 늦둥이 막내딸이라고 했다.

이자크와 릴리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니까 만약 이자크가 헬레네와 일찍 결혼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가만있어도 에너지가 넘치고 작고 단단하고 반짝반짝한 사람이지만, 줄리엣은 어쩌면 헬레네가 그녀의 짐작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엄청난 말괄량이였단다.......”

식사 시간 내내 이자크와 헬레네는 즐거운 듯 웃으며 릴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들려 주었다.

"어찌나 말을 거칠게 타던지.”

헬레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줄리엣의 코끝을 가볍게 톡 치곤 웃었다.

“넌 네 엄마를 많이 닮았어.”

새벽부터 내리던 이슬비는 딱 기분 좋은 습기를 뿌리고 그쳤다. 일행은 행렬을 정비하고 출발 준비를 서두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주님! 상단주님!”

저 멀리서 낯익은 제복을 입은 상단원 하나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말은 그들 바로 옆에서 겨우 멈춰 섰다.

어지간히도 급한 일이었는지, 그 단원은 말에서 뛰어내리다가 거의 구르다시피 했다.

허리에 양손을 가볍게 얹은 헬레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데 이 소란이야?"

“그게 ”

가쁜 숨을 헐떡이던 단원은 손에 들고 온 종이를 겨우 내밀었다.

헬레네가 종이를 낚아챘다. 줄리엣이 얼핏 봤을 때 그건 급한 소식을 적은 것 같았다.

빠르게 읽어 내려간 헬레네가 다음 순간 내뱉었다.

"이런, 젠장-”

이자크가 흠칫하면서 재빨리 줄리엣의 눈치를 보았다.

"아, 안에 들어가서 얘기할까, 헬렌?”

이후 몇 분 동안 헬레네와 이자 크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했다.

얼핏 들리는 얘기로는 뭔가 상단의 다른 지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상단의 총관을 비롯해 사람들까지 불러 모아 뭔가 빠르게 의견을 교환한 다음, 헬레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멀뚱히 서 있던 줄리엣에게 다가왔다.

“미안하구나, 줄리엣. 내가 네 외삼촌과 함께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테오랑 같이 있을 수 있겠니?”

……누구랑요?

줄리엣과 테오 둘 모두 동시에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지, 둘의 얼굴을 본 헬레네가 급히 덧붙였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우리 마법사, 에셀리드도 같이 남을 거고.”

헬레네는 줄리엣을 안심시키기 위해 덧붙인 말이었겠지만 줄리 엣에게 그건 별로 더 나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녀만 보면 으르렁대는 사촌과 단둘이 남겨지느냐, 아니면 거기에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까지 셋이서 남겨지느냐의 차이였으니까.

하지만 어린애도 아니고.

줄리엣은 고작 개인적 감정으로 헬레네와 이자크의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부담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고.

“물론 괜찮아요.”

"정말?”

“네, 급한 일인데 가 보셔야죠.

저 어린애 아니에요."

테오는 “내 의사는 왜 안 물어봐?” 따위를 중얼거리다가 기어코 그레이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헬레네와 이자크는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분주한 가운데, 줄리엣은 할 일이 없어서 애플을 을쓰다듬고 있었다.

"그레이도 가요?”

“응, 그렇게 됐어.”

그레이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능숙하게 자기 담당 단원들을 챙기고 누구보다 빠르게 떠날 채비를 마친 다음 부모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럴 때 보면 다섯 살 아래인남동생과 하루가 멀다 하고 유치하게 툭탁거리는 사람이 맞나 싶었다.

“무슨 일인데요?"

줄리엣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사실 전문적인 분야라 설명해 줘도 모를 거란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줄리엣 역시 이쪽 일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대충 눈치로만 뭔가 상단이 진행하던 일에 문제가 생겼다, 헬레네가 직접 가 봐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다, 정도만 눈치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레이는 의외로 흔쾌히 설명해 주었다.

"머메이드 실크 알아?"

“네, 알아요.”

머메이드 실크는 남해에서만 나는 진귀한 옷감이었다.

이름처럼 인어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니고 머메이드 젤리라는 이름의 해파리를 가공해 만드는 옷감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실크보다도 가볍고 튼튼한 데다 은은한 광택까지 최고였다.

다만 흠이라면 만들어 내는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고 싶어도 쉽게 살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고급 옷감이었다.

“그래? 그럼 설명이 쉽겠네."

그레이는 씩 웃더니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레이에게 듣게 된 자초지종은 대략 이랬다.

얼마 전, 메리골드상단은 어느 가문으로부터 머메이드 실크같은 고급 옷감들을 대량으로 의뢰받았다.

극지방에서 남해에 이르기까지, 대륙에서 가장 폭넓은 유통망과 높은 신용도를 자랑하는 메리골드 상단이기 때문에 그 주문을 소화하는 게 가능했다.

“사실 머메이드 실크뿐만이 아니야.”

다이아몬드 울, 울프람 양모, 그레이가 말하는 옷감들은 전부 최고급품들뿐이었다.

잠자코 듣던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최고급 옷감들이네요?"

“응. 어떻게 알아?”

그레이는 조금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신기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머메이드 실크나 비스크 레이스 같은 건 제도 수교계에서도 인기 있는 품목이다. 드레스를 만들 때 최고로 치는 원단들이라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익숙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울이나 울프람 양모 같은 건 전문적으로 옷감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소재들이었다.

“그냥 알아요.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게 많거든요.”

줄리엣은 웃으며 그렇게 얼버무렸다.

사실은 다이아몬드 울은 북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옷감이기도 했다.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니까. 북부 귀족들은 어떻게든 얇고 가벼우면서 보온력이 탁월한 옷감을 찾아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레이는 줄리엣의 그 말을 듣고는 크게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오늘 문제가 생긴 거지.”

납품 업체에서 갑자기 말을 바꿔서 합의했던 가격에 옷감을 공급해 줄 수가 없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대리인 선에서 해결이 될 텐데, 계약 조항에 문제가 있어서 상단의 주인인 헬레네가 직접 가 봐야 한다는 거였다.

얌전히 듣던 줄리엣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그 주문이 모두 한곳에서 들어온 건가요?"

“응. 결혼식이래.”

결혼식이라.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다.

결혼식에는 최고급 옷감을 쓸 테고, 크게 하는 예식이라면 신랑 신부의 예복만도 십수 벌씩 맞추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호화로운 결혼식은 보기 어려운데.

어느 가문인지는 몰라도 무척 성대한 결혼식인 모양이라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어디의 왕족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그래. 사실 우리 쪽만 난리 난게 아니야. 렌토르의 보석상들도 지금쯤 정신없을걸. 주문이 왕창들어갔거든.”

우리가 그 주문도 땄어야 했는데.

그레이가 못내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줄리엣은 조금 흥미를 느꼈다.

메리골드상단을 통해서 고급 옷감을 잔뜩 주문하고, 또 대륙한 렌토르에서 보석을 주문하다니.

최대 규모의 보석 경매장이 위치 어떤 결혼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대륙적 규모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대체 누구예요, 이렇게 서둘러서 결혼하는 고객이?"

“아, 이건 업무상 기밀이라 어머니가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레이는 이미 말하고 싶어 안달 난 눈치였다.

그레이는 싱글거리며 과장되게 주변을 한 바퀴 살피는 척했다.

에헴. 그리곤 줄리엣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줄리엣은 은웃으며 그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레이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칼라일 공작이야.”

“....…네?"

“칼라일 공작가라고.”

순식간에 줄리엣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잊혀진 줄리엣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