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머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곤거렸다.
'조용히 해.'
줄리엣은 조용히 나비들에게 말을 걸어 진정시켰다.
“……저 사람도 상단 사람인가요?"
“응, 내가 소개해 줄게. 에셀!"
헬레네가 부르자 에셀이라는 남자는 짐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쪽은 우리 마법사, 에셀리드.
숨은 실력자야.”
헬레네가 남자를 소개하자 호기심을 담은 연녹색 눈이 줄리엣을 향했다.
그는 줄리엣을 향해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에셀리드라고 합니다.”
"줄리엣이에요.”
상단에 마법사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법사치곤 지나치게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여긴 동부고, 마탑은 동부의 끝에 있었다.
언제 습격당할지 모르는 숲길을 이동해야 하는 상단에게 있어 마법사는 커다란 전력이었다.
동부에서는 이동할 때 도적의 의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용병 대신 마법사들을 고용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마법사의 희소성은 평범한 검사의 백 배쯤은 되었기 때문에 그를 고용하는 비용 역시 만만찮을 거라고 줄리엣은 짐작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줄리엣은 내밀어진 에셀의 손을 살짝 마주 잡으면서 조금 긴장했다.
그녀가 만나 본 마법사들은 궁정 마법사들뿐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마법사'의 이미지에 부합했다.
궁정 마법사들은 대개 사람들이 화려한 로브를 입고, 흰 수염을 기르고, 평소에는 황궁의 지하에 틀어박혀 있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 말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일 년에 한두 번 신년제 같은 큰 행사에 나와서 근엄한 척 불꽃놀이를 하는 것뿐이었다.
"마법사와는 절대 단둘이 남지 마. 위험해.”
그래서 레녹스가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줄리엣은 별 위기감이 없었다.
오죽하면 불꽃놀이를 거행하는 궁정 마법사들을 멀리서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은 할 줄 아는 마법이 저거밖에 없는 걸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네 마물을 마법사에게 들키면 안 돼.”
그런 줄리엣에게 레녹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설명은 직관적이었다.
나비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감정을 먹어 치우지만, 사람의 감정 에너지는 사실 마력과 성질이 같다.
희석된 마력이랄까.
때문에 일반 사람보다 마력이 풍부한 마법사들을 만나면 그녀의 나비들이 그야말로 피의 축제를 벌이고 싶어 할 거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마법사를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마법사들이 그녀를 무서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묻자 레녹스는 싱긋 웃었다.
"그놈들은 네 앞에 동료를 미끼로 던져서라도 널 해부해 보고 싶어 할걸.”
요컨대 희귀한 실험 재료가 되기 싫으면 섣불리 굴지 말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레녹스는 몇 번인가 영지의 일로 마법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줄리엣을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에셀은 은줄리엣과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누고는 이렇다 할 어떤 기색도 보이질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상단주의 조카라는 말에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는 이내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생각했던 이미지랑 다르네.'
마탑에 틀어박혀 수상한 연구를 할 것 같았는데.
하지만 눈앞의 마법사, 그러니까 에셀리드는 사교성도 좋아 보였다.
'……장갑 끼길 잘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여기까지 말을 타고 왔기 때문에 줄리엣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승마복을 입은 상태였다.
가죽 부츠와 장갑 역시 착용했다.
'혹시 모르니까 벗지 말아야지.'
줄리엣은 조용히 경계심을 높였다.
* * *
마차 여행은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다.
상단 사람들은 늘 활기가 넘쳤고 대규모 인원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캠핑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오랜만에 말을 실컷 탈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웠다.
"저기 언덕까지 시합할래?”
말안장 위에 올라탄 줄리엣이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리를 고쳐 묶는데, 그사이 그레이가 말을 몰고 가까이 다가왔다.
줄리엣은 힐끔 언덕 위에 세워진 커다란 전나무를 확인하고는 승낙했다.
"좋아요.”
그러자 줄리엣의 어깨너머를 힐끔 곁눈질한 그레이가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내기할까? 셋 중에 가장 늦은 사람이 먼저 도착한 사람 소원들어주기. 어때?"
셋?
“왜 셋이죠?”
줄리엣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좋아! 그럼 시작!"
“야! 반칙이잖아!”
냉큼 대답하면서 먼저 치고 나 나간 테오에 이어, 질세라 그레이 역시 앞서 튀어 나갔다.
머리를 묶고 있던 줄리엣의 출발이 가장 늦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조급해하지 않고 고삐를 바투 쥐었다.
두 형제를 태운 튼튼한 말들은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먼저 앞으로 거침없이 치고 나갔다.
“조심!”
테오를 태운 말은 덜커덩거리는 짐마차 옆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바로 뒤에서 무섭게 뒤쫓아 오던 그레이의 회색 말은 간발의 차로 가로막혔다.
곁눈질로 그걸 확인한 테오는 는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무 쉽잖아?’
줄리엣은 시작부터 뒤로 처져 달리는 내내 그 그림자 비슷한 것도 비치지 않았다.
삐끗한 그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내 승리야!’
곧 목표 지점인 커다란 전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승리를 예감한 테오는 우쭐해졌다.
이왕이면 목표점을 도는 순간 여유롭게 한번 점프해서 뒤를 돌아봐 주는 게 나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금빛 형체가 갑자기 그의 시야 앞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어?”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이런 !"
테오는 반사적으로 고삐를 급히 당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금빛 말이 전나무 앞을 먼저 통과했다.
도착 지점을 조금 지나친 금빛 말의 기수는 여유롭게 말을 달래세우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테오가 상상한 바로 그 포즈를 가로챈 것은 줄리엣이었다.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뒤이어 들어온 그레이 역시 경악한 표정이었다.
테오는 당황하느라 간발의 차로 가장 늦게 결승점을 통과했다.
“무슨 반칙을 쓴 거야?”
"너 분명 맨 뒤에 있었잖아!”
“..…다시 해!”
두 형제의 경악한 표정을 본 줄리엣은 웃음을 터뜨렸다.
*
조금 전.
줄리엣이 매끄러운 금빛 털을 가진 유순한 암말을 쓰다듬고 있자 이자크가 다가왔다.
"얘 이름은 애플이란다.”
세 살배기 어린 암말인 애플은 겁이 많았지만 줄리엣을 처음 보고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줄리엣이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내밀자 얌전히 받아먹었다.
“말 탈 줄 아니?"
외삼촌인 이자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일부러 유순한 애플을 골라다 준 게 분명했다.
“네, 걱정 마세요.”
줄리엣은 웃으며 애플의 목을 살살 쓸었다.
메리골드 상단의 짐말들은 하나같이 크고 튼튼했다.
그에 반해 몸집이 작은 말들은 종종 좁은 곳을 지나거나 할 때 단원들을 잠깐 태우는 용도인 것 같았다.
줄리엣은 애플을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르마스 종이네.'
아르마스 종의 말들은 유순하고 몸집이 작은 편이지만 놀랄 만큼 점프력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직선 코스에서야 큰 말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좁은 산길과 곳곳에 짐마차들을 피해야 하는 복잡한 코스에서는 커다란 말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부 칼론에는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마장이 있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장애물 경주에서 번번이 우승을 차지하는 아르마스 종의 말들을 많이 봐 왔다.
그녀는 애플이 유리한 길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끝까지 자신이 어떻게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