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줄리엣은 로벨에서 카르카손으로 넘어가는 길 위에 있었다. 정확히는 산맥 위였다.
외조부인 리오넬 르바탄과는 아쉬운 이별 인사를 나누었다. 리오넬은 줄리엣에게 머물러도 괜찮다 했지만 줄리엣은 거절했다.
그녀는 이자크와 그레이 테오, 두 사촌과 함께 함께 로벨을 떠나 카르카손으로 향했다.
외숙모인 헬레네를 만날 겸 메리골드상단의 본부가 있다는 카르카손에 가서 며칠 머물다 헤어질 예정이었다.
이자크가 통신구를 통해 헬레네에게 미리 전달한 덕에 그들은 로벨과 카르카손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랬었는데-
"대단하네요.”
줄리엣은 솔직한 감상을 중얼거렸다.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마차와 수레 행렬을 보니 그런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감상을 들은 그레이와 이자크는 씩 웃었다.
'로벨에서도 물푸레 상회〉사람들과 자주 마주쳐서 놀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잊고 있었다. 메리골드 상단은 그녀가 동부에 오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을 만큼 유명한 상단이라는 걸 말이다.
“줄리엣!”
대규모 행렬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줄리엣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를 확인하기도 전에, 누군가 줄리엣을 덥석 끌어안았다.
가 놓았다. 마치 어제 헤어졌던 사람을 대하는 듯해서 줄리엣은 살짝 얼떨떨했다.
"드디어 만나게 돼서 기쁘구나, 줄리엣.”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짧은 금발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사실 헬레네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뭔가 카리스마넘치는 미인, 혹은 여장부를 떠올렸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는키가 자그마하면서도 어딘지 강단 있는 인상이었다.
“카르카손에는 처음 가 본다고?”
눈을 반짝이는 헬레네는 쾌활하게 장담했다.
“우리 정말 재밌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렸다.
그녀는 함께 시간을 보낼 만한 즐거운 계획들을 잔뜩 들려 주었다. 줄리엣은 벌써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반짝이는 짧은 금발에 다정한 다갈색 눈이 인상적인 헬레네는 그레이와 테오, 장성한 두 아들을 둔 어머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쾌활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상단 마차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헬레네는 자그마한 키와 짧게 자른 금빛 머리칼 때문에 얼핏 멀리서 보면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엄연한 메리골드상단의 상단주였다.
메리골드상단은 동부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의 상단이었다.
줄리엣은 문득 로벨에 있을 때 그녀에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해 줬던 물푸레 상회상단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럼 은가시나무상단은요?"
은가시 나 상단은 메리골드와 더불어 동부의 상권을 양분하는 거대 상단이었고, 물푸레 상단은 사실은가시나무상단의 형제 상단이란 얘기가 있었다.
지나친 걸지도 모르지만 왠지 물푸레 상회>가 로벨에 지회를 둔 것부터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아, 흠. 그건….”
줄리엣이 묻자 헬레네는 고민하는 척 이마를 짚다가 슬쩍 줄리 엣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하..'
줄리엣은 그 제스처의 숨은 의미를 금방 알아들었다.
결국 대륙을 누비는 5대 상단 중 두 개가 리오넬의 소유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진짜 대단한 거 아닌가?'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리오넬 르바탄의 행방을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실상 그는 여전히 대륙의 반을 지배하고 있었던 셈이다.
예전만큼 악명을 떨치지는 않지만, 보다 빠르고 부유한 방식으로,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줄리엣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적왕의 보물.'
사람들을 설레게 했던 그 보물에 대한 무수한 소문은 헛소문이 분명했다.
적왕은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보물을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냈던 게 분명하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상단을 만든 건 좋은 선택이었다.
"어머니 없이는 상단이 안 돌아가지.”
헬레네를 만나러 오기 직전 그레이는 그렇게 말했다. 의미 모를 한숨을 푹 쉬면서.
줄리엣은 그게 유능한 어머니를 둔 아들의 존경심 어린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헬레네를 만나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
그건 아첨도 관용적인 표현도 도아니었다.
“단주님!”
이곳저곳에서 헬레네를 부르는 상단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알수 있었다.
헬레네는 줄리엣을 데리고 가볍게 걸으며 그런 상단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저 바보들이 너를 귀찮게 했다지?"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귀찮지 않았는걸요.”
“그러게 하지 말라니까."
헬레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분명 이자크를 말렸단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헬레네는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 했다.
듣자 하니 로벨에서 어설픈 연극을 주도한 건 큰외삼촌인 이자 크의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네가 수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겁먹어서 도망가면 어쩔 거냐고 그랬더니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하더구나.”
헬레네의 말에 줄리엣은 가볍게 웃었다. 겁먹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수상쩍긴 했지만.
“좀 철없는 데가 있단다, 네 외삼촌이.”
헬레네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나 그 말투에 남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서 줄리엣은 조금 웃었다.
메리골드상단의 상단주답게 헬레네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는 재주가 있었다.
딱히 의식하지 못했는데 줄리엣은 어느 순간 헬레네가 이끄는 대로 상단 대열을 둘러보며 상단 사람들과 눈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카리 씨는 이미 알고 있지?"
앞서가던 헬레네가 쾌활하게 물었다.
“네.”
딸 리즈벨과 놀아 주고 있던 자카리가 줄리엣과 헬레네를 발견하고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언니!”
아빠에게 안겨 있던 리즈벨이 줄리엣을 향해 앙증맞은 손을 흔들었다.
자카리는 아내가 카르카손의 상회에 있어 겸사겸사 상단과 동행한 것이었다.
리즈벨이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걸 보고 내심 안타까운 사연을 상상했던 줄리엣은 뭔가 미스터리가 하나 풀린 듯한 기분이었다.
'일종의 주말부부인가 봐.'
줄리엣은 대충 그렇게 이해했다.
“저기는 우리 회계 담당 셜리.
그리고 그 옆은 라일라, 카이트."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면서 헬레네는 단원들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짧게 소개해 주었다.
“여기는 필릭스, 베테랑 몰이꾼이고. 아, 마빈! 마빈은 내 개인 비서야.”
대충 그런 식이었다.
헬레네는 마차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얼굴이 보이는 순서 대로 줄리엣에게 직책과 이름을 간략히 소개해 주었다.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이 대규모 인원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고 있다니.'
줄리엣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때였다.
쿠르르릉!
어디서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한바탕 왁자지껄한 비명이 들렸다.
“무너진다!”
“다들 피해!”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마차 위에 쌓인 짐 더미 일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젠장!”
사태를 파악한 단원들이 재빨리 몸을 피했다. 하지만 짐 더미가 붕괴하는 방향에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몇 남아 있었다.
“안 비키고 뭐 하는 거야!”
“줄! 줄을 잡아!”
그러나 이미 사고를 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다들 놀라서 고함을 지르고 달려가는 가운데.
콰드득!
끊어졌던 밧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끔찍한 비극에 비명을 각오하고 있던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걱정 마, 헬렌! 내가 잡았어!”
멀리서 밧줄을 한 손으로 움켜쥔 이자크가 해맑게 손을 붕붕흔드는 게 보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짐 더미가 붕괴하기 직전 잽싸게 반대편으로 달려간 이자 크가 끊어진 밧줄을 붙잡아 당겼던 것이다.
이자크가 밧줄을 잡고 버티는 사이, 꼼짝없이 깔려 죽을 뻔했던 사람들은 무사히 빠져나왔다.
기겁한 상단 사람들이 너나 할것 없이 이자크를 도우러 달려갔다.
“부, 부단주님!”
“응?”
“이제 그거 놓으세요! 아니, 아니…!"
"천천히 놓으셔야죠!”
“으아아아!”
“못살아, 정말……."
헬레네가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바로 곁에 서 있던 줄리엣은 똑똑히 듣고 말았다.
“하지만 저런 점이 귀엽다니까.”
헬레네가 한숨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줄리엣은 이 부부가 어떤 사이인지 알 만하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에셀 님!"
쓰러진 상자들을 다시 나르던 단원들이 누군가를 부르자 한 남자가 불쑥 짐 더미 틈에서 나타났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남자였는 데, 그는 뭐라고 설명을 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팟!
그의 손끝에서 순간적으로 하얀 빛이 반짝했다. 그걸 본 줄리엣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엔 다른 쪽에서 그를 불렀다.
“에셀리드! 여기도 좀 봐 주게!"
“강화 마법 일일이 걸다간 느려진다고 불평하신 건 부총관님이셨잖습니까.”
“그건 그때고!”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의 에셀은 그런 식으로 행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강화 마법을 걸어 주는 것 같았다.
'아.'
줄리엣은 그를 소개받기도 전에 잔뜩 긴장해 뒷걸음쳤다.
'마법사!’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비들이 잔뜩 흥분해서 멋대로 날뛰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리기 시작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