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 네. 그분은 괜찮으셨어요. 따로 치료도 받지 않으셨고, 그러니까 다치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렇군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남자는 가볍게 목례한 뒤, 담백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뒤를 돌았다.
엔지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불러 버렸다.
“저, 저기요!”
이래도 되는 걸까.
다급히 남자를 뒤쫓아 간 엔지는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분, 반지를 끼고 있어서 여쭤보니 남편이 동부 관문에서 일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로아델에서 내리셨고요. 그러니까….…..
아마도 카르카손, 그 근처로 갔을 거예요.”
정보라고 해 봐야 별건 없었다.
"이, 이게 전부예요. 제가 아는 건…….”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남자는 끝까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이곤 자리를 떠났다.
“그럼.”
하딘이라는 남자 역시 가볍게 목례하고는 앞서가는 남자를 뒤따라 역사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도 엔지는 는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멍하니 상자를 끌어안고 서 있던 엔지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냈다.
'기억났다.'
왜 백단향이 익숙했는지 말이다.
백단향은 꽤 비싼 향에 속했다.
향유 같은 사치품에는 관심도 없는 엔지가 백단향이 뭔지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엔지가 그 향이 뭐였는지 동료에게 물었던 것은, 며칠 전의 한 승객 때문이었다.
말수가 적고 어딘지 그늘진 분위기의 여자.
그녀의 손목과 옷깃에서도 방금 전의 남자와 꼭 같은 은은한 백단향이 풍겼다.
엔지는 부디 자신이 그 이름 모를 승객에게 최악의 행동을 한 게 아니기를 빌었다.
'카르카손이라.'
줄리엣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군.”
하딘이 급히 우산을 들고 뒤따라왔다. 그들이 빗속을 지나 한 적한 길가에 세워진 마차에 오를 때까지 레녹스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였다.
우산을 접은 하딘이 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죽은 자들의 축제겠군.”
레녹스는 어렵지 않게 줄리엣이 카르카손에 갔을 만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몇 번인가, 줄리엣은 입버릇처럼 카르카손에서 열리는 축제에 대해 얘기한 적 있었다.
"화려한 가면을 쓰고 행진을 하는 거예요. 죽음이 스스로를 찾아내지 못하게.”
소란스러운 자리는 싫어하는 주제에 또 그런 축제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고 얘기하면서도 한 번도 데려가 달라거나 함께 가 줄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줄리엣 모나드라는 여자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왜 진즉 알아채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그건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무언가를 은근히 바라고 기대를 품은 눈빛을 보내는 대신, 줄리엣은 그의 곁을 떠나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고 있었다.
줄리엣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선 밖에 두었다. 그리고 그 선이 그의 판단을 흐렸다. 그 이상을 바라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은 그였음에도.
레녹스는 손안에 움켜쥔 것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줄리엣은 그저 평소 보고 싶어했던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동부관문으로 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로 공교롭게도, 그 그 축제가 열리는 도시가 그녀의 옛 약혼자가 있는 도시일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레녹스는 제 인내심이 얼마나 얄팍한지 알았다.
그는 만에 하나라도,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게 될 가능성을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주군.”
하딘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빈센데 보우만.”
"아직 동부에 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하딘은 충실히 대답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칼라일 공작이 그 이름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빈센테 보우만은 보우만 후작의 차남으로 장교로 복무 중인 그럭저럭 평범한 귀족 청년이었다.
제법 준수한 외모로 과거엔 평판도 나쁘지 않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시 말하면, 칼라일 공작이 존재를 알고 있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 못 된단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널리고 널린 흔한 귀족한량 중 하나에 불과할 빈센테보우만의 이름을 칼라일 공작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모나드가의 외동딸과 약혼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7년 전, 줄리엣이 부모를 잃고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기 전까지의 일이었지만.
줄리엣은 그 약혼에 대해 레녹스에게 말한 적 없었다.
공작이 제 연인의 과거 연애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때문에 줄리엣 모나드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레녹스가 알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한 경위에 의해서였다.
몇 년 전쯤인가, 레녹스 칼라일은 수도에서 우연히 보우만 후작을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녹스는 보우만 후작가가 뭐 하는 집안인지도 몰랐다.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다만 보우만 후작은 그날 파티에 참석했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칼라일 공작의 호감을 얻어내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저희도 공통점이 있군요, 공작 전하.”
보우만 후작은 나름의 공통점을 찾고자 애썼다. 후작의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보통, 대부분의 사교술에서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다만, 후작의 화제 선택은 최악이었다.
"줄리엣 모나드 말입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공작의 연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어쨌든 보우만 후작은 목적을 달성하긴 했다.
그날 파티에서 그는 독보적으로 칼라일 공작의 관심을 독점하게 되었으니까.
"줄리엣 그 애를 저희 둘째 녀석과 맺어 주기로 했던 적이 있습니다. 뭐, 다 예전 일이지만요.
하하.”
후작이 바란 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관심이었겠지만, 어쨌든 그날 이후 레녹스 칼라일은 보우만 후작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빈센데 보우만,”
정확히는 보우만 후작의 둘째 아들인 빈센테 보우만에 한정해서.
"어디서 뭐 하고 굴러먹는 놈인지 찾아내.”
그날 파티 직후, 칼라일 공작은하딘에게 조사를 명했다.
하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빈 센테 보우만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에 대해 착실히 보고서를 작성해 갖다 바쳤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딘은 은설마하니 그 조사가 줄리엣 모나 드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제법 잘생긴 장교고, 과거에 모나드가의 외동딸과 약혼했으며 그 집안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데릴사위가 되어 모나드 백작위를 물려받을 뻔했다는 것이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 빈센테 보우만의 별특출할 것 없는 인생을 논하려면 줄리엣 모나드의 이름을 빼고는 설명할 게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때 하딘은 이것을 전혀 별개의, 분리된 사안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칼라일 공작이 뭔가 보우만 후작의 사업적 약점을 잡기 위해 그 집안 아들의 조사를 명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레녹스 칼라일은 제 연인의 과거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이용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연인에게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과거에 누구의 아내였든 누구와 눈이 맞든 개의치 않았다.
매몰차다고 해야 할지, 무섭도록 공정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그날 이후로 레녹스가 보우만 후작가와 관련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지나가는 투로도 도빈센테 보우만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하딘은 지난 몇 년간 빈 센테 보우만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찾아와.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불과 며칠 전.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듯하던 푸른 방의 주인이 공작저에서 도망치기 직전까지는.
그리고 하딘은 빈센테 보우만의 근황에 대해 꽤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그가 마지막으로 정보를 수집했을 때까지만 해도 빈 센테 보우만은 썩 괜찮은 커리어를 가진 젊은 군인이었다.
출세 가도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승진 코스를 착실히 밟고 있었다.
특출하진 않지만 가문도 무난하고, 능력치도 괜찮아서 몇 년 뒤에는 꽤 괜찮은 지위까지 노려볼수 있을 만한 인재.
삿된 표현을 빌자면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 정도였다.
그러나 빈센테 보우만은 그 직후, 갑자기 정석적인 코스에서 벗어나 외딴 변방인 동부 관문으로 전출되어 버렸다.
갑작스레 동부로 배치되는 일은 극히 드문 케이스였다.
그리고 빈센테 보우만이 수도를 떠나 동부로 보내진 시기는 하딘이 칼라일 공작의 요구대로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하딘은 그 일의 배후에 칼라일공작이 연루되어 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심지어 새로이 알아봤을 때 빈 센테 보우만은 중증의 도박 중독이라, 도박 빚에 빠져 집안과 연도 끊기고 허우적대고 있다고 했다.
하딘은 혼란스러웠다. 애초 그의 일은 판단하는 것보다는 명령을 받은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딘은 제 주군의 의심이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순간의 감정에 눈이 멀어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결혼반지라.”
모양 좋은 손이 창틀을 느릿하게 두드렸다.
“이상하지. 난 그런 걸 준 적이 없는데.”
레녹스는 자신이 뭐에 화가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빈센테 보우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던 3년 전.
그를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주제도 모르고 입을 놀리는 보우만 후작도, 그 한심한 아들놈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줄리엣에게 화가 났다.
3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그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여자였다.
줄리엣 모나드의 사교 범위는 놀라울 정도로 좁았다. 북부에서도 얼마나 조용히 살았는지 누군가와 접촉한 흔적조차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줄리엣의 인간관계에서,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던 남자를 고른다면 딱 한 사람뿐이었다.
“…… 욕심내는 법이 없지, 내 아가씨는.”
차라리 줄리엣 모나드가 욕심을 부렸더라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흥미를 잃고 버릴지, 갖지 못해 안달하다가 꺾어 버릴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가 한 번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자 비탄에 잠긴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평소의 냉랭한 얼굴로 돌아왔다.
투명한 창에 비친 남자는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출발해.”
“어디로 모실까요?”
레녹스는 한번 성마르게 웃고는 짧게 대답했다.
“카르카손으로.”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