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45화 (42/229)

45화.

**

열차가 동부 관문에 도착했다.

커다란 상자를 옮기던 엔지는 는멈칫했다. 그녀는 역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열차가 멈춰서는 역사는 이용객이 적지만, 돈을 많이 들여 지은 건물이라 상당히 근사했다.

안 그래도 한적한 플랫폼인데, 오늘따라 드물게 비가 내려 날씨까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엔지는 투덜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어……?”

어디선가 숲 냄새가 났다. 정확히는, 비오는 날 우거진 깊은 숲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향이었다.

두리번거리던 엔지는 밖으로 나 있는 열주 아래에 기대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비스듬히 그늘진 곳에 서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으로 보아하니 젊은 남자 같았다. 그것도 키가 큰.

비를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굴 마중이라도 나온 걸까.

‘하지만 승강구는 반대편인데…….'

엔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 공간만 공기가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묘하게 날이 선듯, 빗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사실 걸음을 멈춰 선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가서 말을 붙일 만큼 용기 있지는 않았지만, 플랫폼 안을 오가는 사람들도 연신 그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멍해져서 엔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넋을 놓고 있었다.

이게 무슨 향이더라.

열차의 주요 이용객들은 부유한 평민층이라 흔하진 않지만 간혹 있었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연초 대신 진정 효과가 있고 독특한 향이 나는 궐련을 피우는 승객들이.

엔지는 그게 어마무시하게 비싼사치품이란 것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우거진 숲 냄새인지, 젖은 흙냄새인지 모호했지만 엔지는 그 향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았다.

며칠 전에 동료가 알려 줬기 때문이다.

'백단향.’

그건 백단향이라고 했었다. 기억해 낸 엔지는 스스로 조금 뿌듯해졌다.

남자에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엔지는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을 때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고 말았다.

“실례합니다.”

“아?”

엔지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은 낯선 사람이었다.

“엔줄로스 딜로프 양 되십니까?"

"어…… 네, 전데요."

오랜만에 싫어하는 본명으로 불리게 된 엔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 겁을 먹었다.

그녀에게 질문한 상대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색 피부를 보아하니 사막 민족 출신인 것 같았다. 딱히 험악한 인상이 아닌데도 어딘가 무서웠다.

신기하게도, 다시 마주치면 알아보기 힘들 것처럼 인상이 흐릿했다. 얼굴을 직접 마주보고 있는데도 그런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저는 하이라고 합니다. 승객을 한 명 찾고 있는데, 엿새 전 아키텐 행 열차에서 근무한 엔줄 로스 양이 맞으십니까?"

“엿새 전이라면…… 아! 네. 맞아요.”

엔지는 그제야 경계를 좀 누그러뜨렸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엔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든 그 일에 대해서 묻고 싶어 했다. 며칠 동안 난리가 났었으니까.

그날 엔지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칼을 빼는 남자들이 나타나서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을 때, 엔지는 꼼짝없이 거기서 죽는 줄 알았다.

엔지는 이야기하다 말고 하딘이라는 남자를 힐끔거렸다.

이 남자도 어딘가의 소속인 걸까?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사건 경위에서 사람들이 왔었다.

위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그들은 열차에 탑승했던 승객들과 승무원들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별로 대답이 신통치 않았는지 이내 고개를 젓고는 돌아가버렸다.

직원들끼리는 쉬쉬하고 있었지만, 듣자 하니 숲의 일족과 패큰 규모의 붉은수레바퀴 길드가 얽혀 있다고 했다.

붉은수레바퀴길드는 동부에서 최근 유명해진 길드인데, 사실상 불법적인 지하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여서 평판이 나빴다.

칼부림이 나는 순간 엔지는 타이밍 좋게 기절했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이었다.

다행히 사상자 없이 사태가 마무리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장한 무리가 제압당했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숲의 일족들은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난 거지만.

아키텐의 대영주가 조사관을 파견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엔지의 동료 직원들은 아키텐영주와 붉은수레바퀴 길드가 유착 관계라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는 건 말도 안 돼요!"

엔지는 분개해서 주장했고, 자신을 하딘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 주다가 본론을 꺼냈다.

“그 열차에 제가 찾는 사람이 이 탔었습니다.”

하딘은 조곤조곤 자신이 찾는 승객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했다.

연한 갈색 머리칼, 푸른 눈, 혼자 여행하는 20대 여자 승객. 그러면서 슬쩍 스케치 비슷한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네, 기억하고말고요."

투덜거리던 것도 잊고 엔지는 금방 눈을 반짝거렸다. 혼자 여행하는, 그것도 여자 승객은 매우 드물어서 엔지는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남편분을 만나러 동부관문에 간다고…….”

그 말에 줄곧 무표정이던 하딘이 처음으로 눈에 띄게 움찔했다.

매번 베일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본 것은 잠깐뿐이었지만 엔지는 그녀의 생김새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상 깊은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연갈색 머리칼은 움직일 때마다 햇빛 아래에서 은빛으로 반짝였다.

고전 명화에서 나올 것 같은 동그란 이마와 나붓이 내리깐 눈매 그리고 흰 뺨. 그런 건 확실히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분명 남편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말했고 엔지에게 반지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엔지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이야기를 반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 년째 승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승객들을 본 탓인지, 엔지에게는 어떤 직업적 직감 같은 게 있었다.

그 여자는 시종일관 검은 베일을 내리고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기혼 여자는 그런 옷을 입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사연이 깊은 듯한 분위기였다. 캐묻진 않았지만, 정인을 만나러 간다기보단, 오히려 헤어진 듯해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엔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 하지만 승객의 개인 정보는 대답해 드릴 수 없어요!"

엔지는 한 발짝 늦게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이미 좀 늦은 것 같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하딘,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하딘이 뭐라 설득할 것처럼 입을 막 열던 그 찰나였다.

“남편이라.”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엔지는 돌아보기도 전에 제 뒤에서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백단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열주에 기대서 오랫동안 비를 보고 있던 그 남자였다.

엔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숨을 몰아쉬었다.

특별할 것 없는 차림새였다.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없는 남자의 옷차림은 부유한 열차 이용객들이 많은 역사에서는 그리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을 떼기 힘들었다.

"..주군.”

하딘이 끼어들려고 했으나 남자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곤 이 내 싱긋 웃었다.

“그렇게 말했습니까? 남편이라고?”

“아…… 네.”

엔지는 뭐에 홀린 것처럼 더듬더듬 대답했다.

사실은 조금 놀랐다.

줄곧 표정 없이 서늘하던 눈매가 가볍게 웃는 순간 곱게 휘었다. 나직한 말소리에는 흡사 위압감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엔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왠지, 그런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을 릴리안 세네카라고 소개했던 여자는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말한 신분과 이름이 모두 가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거짓 이름을 대고 열차에 올랐던 이유는 필시 이 남자 때문일 것이다.

엔지는 팔에 힘을 주어 상자를 고쳐 안았다. 그리곤 경계심 가득한 태도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릴리안 세네카는 그녀의 진짜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남자를 피해 가짜 이름과 신분을 댔다.

엔지는 이 남자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남자가 그녀의 뒤를 쫓는 스토커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별한 연인인지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진짜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엔지에게도 상냥했던 승객이었다. 엔지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승객분의 개인적인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용기를 그러모아 단호하게 말하긴 했지만 엔지는 다소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걸 물으려던 게 아니니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남자가 담담히 말했다.

엔지는 방어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뭐라고 자신을 구슬리든지 간에, 엔지는 한마디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엔지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그녀가 어디로 갔느냐 묻지 않았다.

“무사하던가요.”

“네?”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맞아요."

그랬지. 그녀도 그 열차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엔지는 그제야 사고가 일어난 열차에 탄 사람을 찾는다면, 가장 첫 번째로 궁금해할 질문이 뭔지를 깨달았다.

“어딘가, 다친 곳은 없었습니까.”

엔지는 깜짝 놀랐다.

찰나였지만 그렇게 묻는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억눌린 듯 들렸다.

간신히 감정을 붙잡아 두는 사람처럼.

잊혀진 줄리엣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