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줄리엣이 모든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마자, 자카리는 몇 번이고 거듭 사과했다.
줄리엣이 일부러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자 그는 난감해하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던 마을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말을 바꾼 것도 모두 외삼촌들의 뒤 공작이었다고 했다.
줄리엣은 그의 말에 기막혀 물었다.
"아니, 왜요?"
의외로 자카리는 풀죽은 얼굴로 솔직하게 있던 일만을 대답했다.
“수십 년 만에 겨우 만난 조카 딸을 겨우 서류 정리나 책상 청소 같은 걸로 부려먹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셨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어제 당황한 자카리가 줄리엣에게 제안한 딸의 가정교사 자리였다.
자카리의 딸, 리즈벨은 통통한 뺨이 사랑스러운 어린이었다.
“언니이!”
리즈벨은 난생처음 보는 줄리엣에게도 답삭답삭 잘 안겼다.
“과자 준다고 아무한테나 안기면 안 돼, 리즈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줄리엣은 리즈벨을 꼭 끌어안았다.
어른보다 체온이 높아 따끈따끈하고 보드랍고, 심지어 달달한 냄새까지 난다. 게다가 고작 쿠키 하나로 행복해지다니. 어린아이는 너무 작고 귀엽다.
손도 입도 작은데 오물거리는 게 너무 신기해서 줄리엣은 리즈벨의 손에 세 개째 쿠키를 쥐여 주며 물었다.
“리즈벨, 몇 살이에요?”
리즈벨은 오른손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펴며 자신 있게 외쳤다.
"세 살!”
귀여워!
줄리엣은 리즈벨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한편으로는 자카리의 발상이 눈물 날 정도로 황당했다.
뭐? 가정교사? 글씨를 가르쳐?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르신이 함구령을 내리셔서요…….”
옆에서 딸의 재롱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자카리는 찬바람 쌩쌩부는 줄리엣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눈썹 끝을 내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연극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 같은 일주일이긴 했지만, 사실 줄리엣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는데…….
“뭐? 저게 릴리안 고모 자식이라고?”
줄리엣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하! 그동안 소식 한 통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게 말이 돼? 저거분명히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언제 봐도 인상적인 빨간 머리.
그러니까, 줄리엣이 며칠 전 로벨로 오는 역마차에서 마주친 그 또라이였다.
‘붉은 머리가 널려 있는 걸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의 이름은 테오 르바탄으로 애석하게도 줄리엣의 큰외삼촌인 이자크 르바탄의 두 아들 중 둘째였다. 리오넬의 손자들 중에는 가장 어리다고 했다.
테오는 온 저택에 다 들리도록 떠들다 홱 고개를 돌리더니 리즈벨을 안고 있던 줄리엣을 향해 척척 걸어왔다.
“야, 너!”
그리곤 대뜸 삿대질로 줄리엣을 가리켰다.
"네 입으로 솔직히 말해 봐. 너 노인네 유산 노리고 찾아온 거 맞지?"
테오는 이런 얘기를 면전에다 대고 할 정도로 무례하고 뻔뻔했다.
*
이자크의 첫째 아들인 그레이는 동생인 테오만큼 눈에 띄는 빨간 머리는 아니었다.
적갈색 머리칼을 가진 그레이는 테오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레이는 테오보다 다섯살 위의 형이라고 했다.
“늙은이.”
“뭐 인마?!”
발끈하는 걸 보면 정신연령은 별 차이 없어 보였다.
줄리엣이 보기에 붉은 머리칼은 부계 유전이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그레이는 다혈질인 아버지 보다는 유쾌한 어머니 쪽을 더 닮은 듯했다.
테오보다 다섯 살 위 형인 그레이는 다행히 정상인이었다.
“미안하다. 원래 저렇게까지 인성 개차반인 놈이 맞아.”
방에서 혼자 차를 마시던 줄리 엣에게 그레이가 다가오며 말했다.
조금 전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모양인지, 제 딴에는 동생의 무례를 사과하겠다며 찾아온 것 같았다.
그레이는 줄리엣 맞은편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았다.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다.
"보통은 빈말이라도 '원래 저렇게 나쁜 애는 아니란다.'라고 해주지 않나요?”
그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 걸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어? 우리 부모님한테 따져야지.”
하지만 두 형제의 아버지이자 줄리엣에게는 큰외삼촌이 되는 이자크는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줄리엣은 아직 만나지 못한 외숙모, 그러니까 테오와 그레이의 모친이 어떤 사람일지 퍽 궁금해졌다.
그녀는 상단 일로 집 안을 떠나 있어서 내일쯤 만날 예정이었다.
“아무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적당히 무시해. 쟤가 원래 악의가 있기는 한데 그게 그렇게 오래가지도 못하거든.”
“저는괜찮아요. 재밌는데요, 뭐."
빈말은 아니었다. 줄리엣은 형제자매가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제게 형제자매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확실히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쟤가 진짜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네.”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집안의 사랑스러운 막내 포지 션을 뺏겼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사랑, 뭐……?”
찻잔에 퐁당퐁당 각설탕을 떨어뜨리던 그레이가 어깨를 움츠리며 되물었다. 마치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아냐. 쟤는 태어난 이래 그런 존재였던 적이 없어요. 그보단 차라리 할아버지 유산 어쩌고 하는 소리가 진심일 확률이 높을걸.”
“그런가요?”
“응.”
줄리엣은 제 찻잔에도 설탕을 을넣어 주려는 그레이의 손길을 슬쩍 피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첫인상이 상당히 나쁘긴 나쁘긴했다. 하지만 테오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유산 문제 때문이라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조금 냉정하지만, 줄리엣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리오넬만 해도 그렇다. 론다 부인이 빼돌린 장갑과 머리핀으로 줄리엣이 정말 자신의 외손녀가 맞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외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기쁘지만, 줄리엣은 자신이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만약 줄리엣이 릴리안의 딸이 아니고, 릴리안이 리오넬의 딸이 아니었다면 성립될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바꿔 말하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혈연뿐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는 있었다.
테오가 유산을 들먹거렸다는 것은 그 말고도 그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더 존재할 거라는 이야기니까.
'마침 잘됐네.'
어쩌면 테오에게는 그녀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줄리엣은 남들 사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어차피 미움받는 건 익숙하다.
아무렇지도 않고,
하지만 줄리엣은 누가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잠시 앉아서 생각하던 줄리엣은 잔을 내려놓고 리오넬이 앉아 있는 거실 창가의 안락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자카리를 비롯한 몇몇 르바탄가의 측근들이 리오넬의 의의견을 묻기 위해 모여 있었다.
“할아버지.”
“그래, 줄리엣.”
줄리엣을 발견한 리오넬은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왜 그러니?”
리오넬 르바탄이 앉아 있는 거실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만 돌리면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줄리엣은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나, 둘, 셋.
풀썩.
그리곤 무릎이 꺾인 것처럼 리오넬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고개까지 푹 숙였다.
“줄리엣? 아가?”
"아, 아가씨?”
주변 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제대로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속으로 다섯까지 센다음 고개를 들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믿어 주세요. 저는 유산 따위는, 그런 건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유산이라니?”
“제가 할아버지의 유산이 탐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게 분명하대요. 사실은 엄마의 딸도 아닐 거라고.”
“무슨 그런!”
"아니, 아가씨.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한답니까?"
곁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대신 화를 내 줬다.
“누가 그랬다고 일러바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그분들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셔도 괜찮생각하신다면.....다만 할아버지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해서……. 오해를 풀고 싶었어요."
줄리엣은 대충 수도에서 지겹게 봤던 신파 연극의 대사들을 생각 나는 대로 읊었다.
사실 대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표정과 타이밍이었다.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할아버지.”
리오넬을 제외한 사용인들은 퍽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아, 아가씨…….”
그런데 리오넬은 그런 외손녀를 내려다보면서 어쩐지 웃음을 꾹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만 일어나렴, 줄리엣.
대체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떠드는지 모르겠지만-."
그 대목에서 리오넬이 집 안을 슥 훑자 몇몇이 움찔했다.
“약속하마. 앞으로는 그 누구도 너를 그런 식으로 모함하지 못하게 해 주마.”
줄리엣은 끝까지 가련한 척하는 연기를 잊지 않고 비척비척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 났다.
물론 2층 계단참에 서서 이 광경을 목도한 테오를 향해 비밀스럽게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
줄리엣은 정말로 누가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건 가만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이유 하나쯤은 만들어 줘야지.'
줄리엣은 테오와 눈이 마주치자 의기양양하게 활짝 웃어 보였다.
“저거 완전 또라이 아냐……?”
경악한 테오가 중얼거리는 듯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러나 줄리엣이 몰랐던 것도 있었다.
그들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양손에 커다란 환영 케이크를 들고 서 있던 외삼촌들이 이장면을 모두 본 것이다.
줄리엣과 테오 간에 오가는 심상찮은 눈빛까지 모두.
리오넬의 세 아들들은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져 있었다.
차례로 이자크, 바리스 그리고 카일로스, 세 형제는 멍하니 굳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이 방금 본 것에 대한 감상을 교환했다.
"허억.”
“형, 방금 저거 봤어?”
"맙소사, 릴리랑 하는 짓이 똑같아……!”
"피는 못 속인다더니…….”
“역시 릴리안의 딸이 분명하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