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43화 (40/229)

43화.

*

줄리엣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르신.”

자카리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줄리엣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도와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줄리엣은 이름 모를 노인이 원망스러워졌다.

“이것, 돌려주게나.”

“.....어?”

웬일인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인은 마치 비무장지대에서 무기를 반납하듯이, 신중한 손길로 자카리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분부 받은 대로 줄리 엣에게 물건을 전달했다.

줄리엣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도 모르게 외쳤다.

"내 장갑!”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 낯익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건 내 머리핀이잖아?'

정확히 이틀 전에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들이 분명했다.

저걸 찾겠다고 침대를 두 번이나 뒤집었는데!

영락없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물건들을 다시 찾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줄리엣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노인을 쏘아보았다.

"아, 좋아요. 이제 슬슬 소름 돋네요.”

줄리엣은 화가 났다.

그녀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라면 그럴 터였다.

상냥한 시골 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수상쩍기 그지 없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한통속으로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걸 막으려 했고, 서로 작당해서 일자리도 안줬다. 그리고….….

……이걸 왜 가져갔는지, 이걸로 뭘 할 작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물건을 훔쳐 자작극에 쓰기까지 했다.

줄리엣이 막 물어보려는데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붉은 머리칼의 노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내 이름은 리오넬 르바탄이다.”

아무리 줄리엣이라도 거기다가 대고 “아, 네. 그러시군요. 저는 줄리엣 모나드랍니다. 모나드 백작이죠.”라고 대꾸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농담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게 진실이라면 그녀는 반세기 제일의 유명 인물을 만나고 있는 셈이었다.

“...… 그래서요?”

줄리엣은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자신을 리오넬 르바탄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한동안 말없이 줄리 엣을 내려다보았다.

“르바탄'은 샛별이란 뜻이지.”

알고 있다.

줄리엣은 다소 비딱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리오넬이 젊었을 적 이끌었던 월계수 용병단의 상징 깃발에도 금성이 그려져 있었으니까.

줄리엣도 그 깃발은 본 적 있었다. 검정에 가까운 남색 천에 황금실로 자수를 놓은 깃발.

“그리고 '세네카'는 고대어로 금성이란 뜻이란다.”

줄리엣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줄리엣이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자 리오넬 르바탄이 웬도톰한 감색 천을 하나 꺼내어 보여 주었다.

줄리엣이 보기에 그건 꼭 아기 포대기처럼 보였다.

백합과 장미, 황금색 별이 수놓아져 있었고, 그 아래에 적힌 이름은…….

릴리안 로즈 세네카 - 르바탄.

줄리엣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와 눈이 마주친 리오넬 르바탄이 조용히 한숨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릴리의 딸이로구나.”

* * *

적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던 리오넬 르바탄이 범죄 도시카르카손에 정착한 것은 대략 반세기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유명세를 뒤로하고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이유를 궁금해했다.

누구는 그가 살해당했다고 했고, 누구는 그가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때문에 겁을 먹고 영영 숨어 버린 거라고 했다.

혹은 어느 날 모든 소란에 염증을 느껴서 속세를 등졌다고도 추측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틀렸다.

리오넬 르바탄이 카르카손에 칩거하기로 한 것은 그의 죽은 아내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슬픔에 잠긴 리오넬의 곁에는 세 아들들과 달수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태어난 핏덩이가 있었다.

그리고 작은 아기를 품에 안은 순간, 리오넬은 말년에 얻은 막 내딸에게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릴리안 로즈 세네카 - 르바탄.

리오넬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주려고 고민했다.

고심 끝에 그는 딸에게 르바탄이란 투박한 어감 대신 축복받은 고대신들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릴리안 로즈 세네카 르바탄.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밝고 건강하게 자란 릴리안은 제 엄마를 꼭 빼닮은 딸이었다.

상냥하고 쾌활했다.

그런 릴리안이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보통 장교도 아니고 제국의 귀족이었다.

제국 명문가 출신의 젊은 청년장교와 릴리안이 사랑에 빠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리오넬은 고뇌했지만 그는 언제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정은 빨랐다.

리오넬은 하나뿐인 딸의 인생에서 조용히 물러나 주는 것을 택했다.

잠적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제국령에 들어서는 순간 체포되어 사형대로 넘겨질 사형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리오넬은 딸에게 자신이 붙여 준 이름을 영원히 잊고 새이름으로 살 것을 종용했다.

그게 그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디, 보다 넓고 안전한 세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

벽난로에는 타닥타닥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짧고도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줄리엣은 벽난로 앞 양탄자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타오르는 불씨를 보고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리오넬은 그녀의 바로 옆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줄리엣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런 이야기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의 삶에 이런 기억은 없었다. 그대로라면 줄리엣 모나드는 줄곧 제도를 벗어나지 않고 살다가 죽게 되니까.

하지만 어쩐지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엄마의 유품인 진주 목걸이를 손에 쥐고 집을 나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다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줄리엣은 머릿속에 떠오는 순서대로 두서없는 질문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은요? 할아버지가 시키신 건가요?”

할아버지라. 리오넬은 묘한 기분에 조금 웃으며 답했다.

"아니, 네가 내 외손녀 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니까 다들 자진해서 도와주겠다고 나서 더구나.”

그런 거였구나.

줄리엣은 그제야 과하게 친절했던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장갑이랑 머리핀은 확인을 위한 거였겠네요.”

줄리엣의 말에 리오넬의 얼굴에 조금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렇단다.”

차마 너무 언짢아하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론다 부인에게 줄리엣이 몸에 지녔던 소지품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그였으니까.

동부에는 마도구가 많았고, 중에는 소지품만으로 친자 관계를 확인해 주는 종류의 물건도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줄리엣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이해했어요."

리오넬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좋은 시점에 말해 주고 싶었단다.”

"괜찮아요.”

“하지만 네 얘기를 듣자마자 얼간이들이 죄다 로벨로 몰려왔지 뭐냐.”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 리오넬은 웃으며 문을 밀어 열었다.

쿠당탕!

“어이쿠!”

요란한 소리에 줄리엣은 깜짝놀라 문 밖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뒤엉켜 넘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방 안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바짝 붙어서 있었다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열리자 놀라서 쓰러진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택 복도는 상당히 넓었음에도, 뱃사람처럼 체격 좋은 장년남자 셋이 그러고 있으니 복도가 꽉 차서 비좁아 보이기까지 했다.

"아…… 안녕. 줄리엣.”

“크흠”

"만나서 반갑구나. 내가 네, 크흠, 큰삼촌이란다.”

결국 줄리엣은 웃음을 터뜨렸다.

잊혀진 줄리엣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