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42화 (39/229)

42화.

줄리엣은 냅킨으로 손을 닦는 척하면서 담담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을 숨기는 것이 질리도록 익숙한 덕분에 줄리엣의 동요는 조금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가게 안에 있던 라일리 부인이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힐끔거리다가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줄리엣도 활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왜 진즉 눈치를 못 챘지?'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 잊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한 번도 평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줄리엣의 머릿속에 스릴러 시나리오가 좌르륵 펼쳐졌다.

이 한가롭고 목가적인 마을을 배경으로도 충분히 범죄 시나리 오가 가능했다.

이런 작은 마을일수록 사람들은 단합하기 쉽다. 로벨은 관광객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혼자 방문하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만큼 소문이 빨랐다.

‘멍청한 여행자를 잡아다 쥐도 새도 모르게 팔아넘긴다거나'

줄리엣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겉모습만은 제압하기 쉬운 상대일 텐데.

쥐도 새도 모르는 새에 납치하는 대신 이렇게 복잡한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게 뭘까?'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마을에 붙잡아 두기를 원했다.

원하는 게 뭐지? 인신매매? 인신 공양? 그도 아니면…….

'역시, 공작가려나.'

줄리엣은 찻잔의 둥근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하지만 왜 이런 짓을 하지? 딱히 원한을 살 만한 짓은 하지 않았잖아?

맙소사.

잠시 지난 며칠간의 행적을 되짚어 보던 줄리엣은 혀를 깨물었다. 놀랍게도 짚이는 구석이……

꽤 많았다.

별로 눈에 띌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수도를 떠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꽤나 은원 관계를 쌓았나 보다.

열차에서 그 늑대를 팔아넘기려던 무리?

아니면, 반대로 로이를 구해 준 그녀를 그 길드와 한패라고 착각한 웨어울프들이 벌인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치밀했다.

로이를 납치했던 작자의 길드에서 벌인 짓이라면, 차라리 로젠에서 자신을 납치하는 것이 훨씬 이치에 맞았다. 막 기차에서 내려 어수선했을 때니까 말이다.

줄리엣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 자신의 값어치 중 가장 높은 값을 부를 사람들.

‘공작가의 정적들.'

레녹스 칼라일에게는 적이 많았고, 유명세에 비해 칼라일 공작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극단적으로 적었다.

다른 가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오로지 북부 영지에만 관심 있는 칼라일 가문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부에 이를 가는 적대자들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일이었다. 자고로 뭐든 상대를 잘 알아야 약점을 파고들 수 있는 법이니까.

줄리엣은 공작가의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억만금을 내놓을 가문의 이름을 열 개도 더 댈수 있었다.

잠정적으로 반쯤 결론을 내린 줄리엣은 한 마을을 통째로 매수해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 만한 세도가들의 이름을 하나씩 꼽아 보는 중이었다.

이 정도 행동력이라면 상대방도 엄청난 거물일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날 납치해 봤자 레녹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겠지.

실제로 몇 번 납치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런데 그런 여자가 공작의 곁을 벗어났으니, 얼마나 손쉬운 먹잇감이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는데.

줄리엣은 지금쯤에야 줄리엣 모나드가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수도에 퍼지기 시작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배후가 누군진 몰라도 상당히 힘이 세고 정보가 빠른 자일 터였다. 줄리엣은 그렇게 판단했다.

줄리엣은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천천히 샐러드를 음미했다.

신선한 샐러드가 아삭아삭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도망치려면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

'으응?’

사샤삭.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씹어 넘기던 줄리엣은 수상한 장면을 하나 더 발견했다.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닦인 식기에 그녀의 등 뒤 풍경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조금 전, 그녀가 뒤를 돌아보려 하자 황급히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기던 어떤 남자들을 똑똑히 보았다.

아무래도 더 지체하면 위험할 할것 같다는 생각에 줄리엣은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 * *

딸랑.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아, 세네카 부인!”

숙소에 들러 얼마 안 되는 짐을 모두 챙겨 여행 가방에 집어넣은 다음, 줄리엣이 찾아간 곳은 자카리의 사무실이었다.

“안녕하세요, 자카리 씨."

“좋은 오후입니다. 날씨가 참 좋죠?”

자카리는 줄리엣이 문을 열어둔 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는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예의바르게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물론 지적했더라도 줄리엣은 문을 닫지 않았을 것이다. 퇴로 확보는 중요하니까.

쾌활하게 인사하며 자카리가 접객용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줄리엣은 그와 마주앉아 예의바르게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신, 테이블 위에 가져온 집 열쇠를 내려놓았다.

"열쇠를 반납하러 왔어요.”

동시에 자카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지내시는 데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뇨, 집은 훌륭해요."

“그, 그런데요?”

줄리엣은 대답하기에 앞서 하얗게 질린 자카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금은 반만 돌려주셔도 괜찮아요. 다만 현금으로 바로 받을 게요.”

“어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자카리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어떤 점이 불편한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해결….…."

"해결해 주신다고요? 제 문제가 뭔 줄 알고요?”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최대한 해결하도록 도와드리겠다는…….”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확신 반 의심 반이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네.

자카리 역시 이 수상한 마을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의 목적은 그녀를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왜 그녀를 굳이 붙잡아 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한통속이 분명하다.

"저 돈 없어요.”

“예?”

줄리엣은 일부러 불퉁하게 말했다.

“만약 돈이 목적이라면 헛수고 하고 있는 거라고요.”

사실이었다.

줄리엣은 수중에 가진 돈이 별로 없었다.

엄마의 유품이나, 모나드 백작가의 열쇠가 있긴 하지만 그건 그렇게 고가의 물건은 아니다.

매니악한 수집가들이나 열을 올릴 법한 고풍스러운 귀중품이지 하물며, 온 마을이 한통속이 되어서 움직일 만큼 비싼 물건은 은결코 아니지.

줄리엣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 정도 규모의 자작극을 준비할 정도라면 이 사람들은 뭔가 엄청난 걸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돈이든, 뭐든.

하지만 줄리엣은 그건 당신네들은 착각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설령 이 사람들이 어떻게 칼라일 공작가를 알고 그녀를 빌미로 그를 협박해 한몫 뜯어낼 생각이라면, 그건 더더욱 잘못된 판단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자신을 속이고 도망친 여자의 몸값을 지불할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당황한 듯하던 자카리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해졌다. 한참을 침묵하던 자카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세네카 양, 혹시 일하고 싶으신 겁니까? 정말, 그만큼이나 일자리가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이신가요? 만약 그런 거라면..”

“그, 그래요! 혹시 가정교사 일은 어떠십니까? 안 그래도 저희 리즈벨 때문에 좋은 가정교사를 찾고 있는데……. 아, 리즈벨은 은저희 딸입니다. 아주 똑똑하지요.”

'이것 봐라?' 줄리엣은 일자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데, 자카리는 이미 그녀가 거절당한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투였다.

“우리 딸 이름은 리즈벨입니다.

착한 애니까 가르치기 힘들진 않으실 겁니다. 도서관이나 상단에서 일하시는 것보단 훨씬 안전…….”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는 자카리를 물끄러미 보던 줄리엣이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자카리 씨.”

“예?”

“그만하시고, 나오라고 하세요.”

“.……누굴, 말입니까?”

줄리엣은 고개를 까딱하며 싱긋 웃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줄리엣은 아까부터 가게 한쪽의 벽을 유심히 관찰했다.

정확히는, 안이 텅텅 빈 것이 분명한 가짜 책들이 잔뜩 꽂힌 위장용 서가를 말이다.

끼이익.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책꽂이처럼 위장했던 두꺼운 문이 덜컹소리를 내며 열렸다.

미리 예상했던 그대로의 전개라 줄리엣은 놀라지도 않았다.

뚜벅.

그러나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줄리엣도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어, 어르신…….”

로벨에 도착한 첫날 잠시 스쳐 지나갔던 친절한 노인이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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