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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41화 (38/229)

41화.

카이만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 사실에 꽤나 신이 났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다소 거드름피우는 투로 말했다.

"예. 정령사 계집이라더군요, 제 수하 말로는.”

술이 들어가서 호기가 생긴 건지, 아니면 이 얼굴만 반반한 북부의 애송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단 결심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카이만 자작은 그 자리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짓을 저지르게 되었다.

“뭐라더라, 꽤나 반반한 계집이 특이하게 나비를 부린다던데. 하여간 별 웃기는 일이죠. 기껏 고른 마물이 나비라니. 안 그렇습니까?”

“....… 재밌군.”

그러자 다소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레녹스 칼라일의 입가에 처음으로 비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 역시 여자를 하나 찾고 있는데 말이지.”

"!”

그 말에 카이만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실 연회장에 모인 자들은 모두 아키텐 대영주에게 줄을 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 말인 즉, 모두 로베르에게 뇌물을 가져다 바치고 있는 자들이란 것이다.

로베르는 그들을 불러 모으기 전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칼라일 공작이 이곳에 누군가를 찾으러 온 듯하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니 추측만 할 뿐이었다. 도망친 노예를 쫓아왔다거나, 혹은 공작의 혈족이라거나.

시건방진 게 영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만약 여기서 칼라일공작을 돕는다면 그는 무려 북부의 지배자에게 빚을 지우는 게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저 공작이 찾는 여자라니, 굳이 보상이 아니더라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였다.

너무 들뜬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카이만이 말했다.

“찾으시는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미약하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 레녹스 칼라일의 곁에 앉아 있던 두 기사들의 표정은 이미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카이만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

칼라일 공작은 가볍게 입술만 만축인 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과거 아키텐의 백포도주는 동부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땅이 변해 버렸는지, 명성이 다한 지 오래였다.

향은 좋지만 역시 너무 숙성된 포도주는 그의 입에 맞지 않았다.

“혹은 특정인을 찾으시는 게 아니라면 제가 소개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동부에는 미인이 많지요.”

분위기를 살피던 로베르 아키타스 역시 그를 부추겼다.

"말해 보게, 공작. 저 친구가 사람 찾는 데는 이골이 난 친구란 말일세."

“글쎄…….”

레녹스는 느긋하게 뜸을 들이는 듯하다가 물었다.

“그럼 묻겠는데, 내가 원하는데 ?”

여자를 찾는 데 얼마나 걸리지?”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일주일이라. 그럼 그 안에 찾지 못하면 목을 내놓을 건가?”

“물론……. 예?”

카이만이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판단을 못하고 있을 때, 칼라일 공작이 다시 말했다.

“그럼 쉽겠군. 내가 찾는 여자도 정령사에 나비 마물을 부리니까.”

“아하. 그것참, 왠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다음 순간 카이만 자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챙그랑.

금속 잔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가 났다.

카이만이 떨어뜨린 잔은 아니었다. 자작은 이미 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 공작님……."

"분명 일주일이라고 했지."

“예, 예…?”

“그럼 그때까지 목을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야.”

캉!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목격했다. 칼라일 공작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까지 온통 새카만 칠흑의 의검이 정확히 카이만 자작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줄리엣의 머리칼 한 올이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그땐 네놈의 목을 받지.”

*

“아아.”

줄리엣은 머리칼을 닦다가 눈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따끔했다. 아니나다를까, 수건을 내려다보니 긴 머리칼이 붙어 있었다. 꼼꼼히 물기를 닦다가 그만 머리가 엉켰던 모양이다.

수건을 탈탈 털다 줄리엣은 문득 처량해졌다.

“에취.”

긴 머리는 말리는 데 오래 걸린다. 게다가 이만저만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줄리엣은 새 수건으로 적당히 머리를 를감쌌다.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노동력의 산물이라고.'

숱 많고 풍성한 데다 올이 가늘기까지 한 머리칼은 엉키기 쉬웠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아침저녁으로 하녀들이 몇 명이나 달라붙어서 공들여 빗질해 주곤 했었다는 게 생각났다.

거울을 힐끔 보다가 줄리엣은 피식 웃었다.

지금 제 상태를 공작가 사람들이 보면 기함할 것 같았다.

손재주도 없고, 머리 손질에 공들일 시간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줄리엣은 거울을 물끄러미 보다가 중얼거렸다.

“자르는 게 나으려나.”

오랫동안 기른 게 아깝긴 하지만 관리하기 힘들고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렇다고 또 혼자 싹둑 머리를 잘라 버릴 용기는 없었다. 결과 물이 무섭기도 했고, 줄리엣은 대충 물기를 제거한 뒤 마을에 나가 보기로 했다.

광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줄리엣의 발걸음은 살짝 들떠있었다.

전날 자카리가 짧게 일할 만한 곳들을 소개해 줬던 것이다.

작은 마을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다들 의외로 제 일처럼 알아봐 주고 흔쾌히 일자리를 주겠다고 나섰다.

바느질이나 요리 등은 어렵지만, 다행히도 줄리엣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참 다행인 일이지.'

심지어 장부를 작성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로벨에는 큰 상단의 지점이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구할 수 있는 일이 꽤 있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다소 설렜다.

아직 여비가 넉넉히 남아 있긴 했지만, 일을 구하면 이 마을에 예정보다 좀 더 오래 머물러도 좋을 것이다.

"......?"

그러나 줄리엣의 설렘이 의아함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날 흔쾌히 일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마을 사람들이 난처한 얼굴로 당장은 줄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며 거절했던 것이다.

'아니, 어제랑 말이 다르잖아요?’

도서관 사서인 베로니카 역시도 새 사서가 필요 없어졌다고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관장님께 여쭤봤는데…… 새 사서를 쓸 여유가 없다고 하셔서 ….….”

줄리엣은 괜찮다고 웃으며 말하고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과는 달리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물푸레 상회에도 들러 봤지만 어쩐지 허둥거리며 당장 일손이 급하지는 않다고 거절당했다.

'외지인이라 그런가.'

줄리엣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줄리엣이 다시 마을 중심가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늦은 점심 무렵이었다.

줄리엣은 점심을 먹기 위해 파라솔을 펴 놓은 노천 테이블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쩌지?'

뜻하지 않게 차질이 생겨 버렸다.

‘원래 계획하던 곳으로 가야 하나.’

줄리엣의 목적지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엣이 원하는 풍경이 나타나기까지는 아직 꽤 시간 여유가 있었다.

좀 더 여기 있고 싶었는데 줄리엣은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음식과 머무는 작은 집도 좋았다.

아직 못 본 유적지도 있고, 무엇보다 옆 도시인 카르카손에서 열리는 죽은 자들의 축제도 보고 싶었다.

고민에 잠긴 줄리엣은 포크로 로샌드위치 빵을 포크로 쿡쿡 찔렀다.

집을 렌트하긴 했지만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 풍족하진 않았다.

줄리엣은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게 빠른 성격이었다.

음식은 사 먹고 그 외의 청소나 빨래는 혼자 하기로 했던 것이다.

혼자 한다고 해 봤자, 이틀에 한 번 집주인인 론다 아주머니가 들러 청소를 도와주고 세탁물을 걷어 가 주지만 말이다.

달칵.

생각에 잠겨 있던 줄리엣의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파이 접시가 나타났다.

줄리엣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안 시켰는데요?"

"연습 삼아 만들어 봤어요. 디저트로 맛이나 보세요.”

인심 좋은 식당 주인 라일리 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상냥하게 권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감사를 표한 줄리엣은 파이의자태를 보고 감탄했다.

이것 봐. 대륙 어디에서 단돈 8쿠퍼에 이 같은 만찬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수도였다면 2실버, 아니 3실버는 받았을걸.'

사람들은 친절하고, 인심도 후하다.

산딸기가 듬뿍 올라간 파이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던 줄리 엣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지. 과하게 후하지.

아마 로벨은 전 대륙에서 가장 인심이 후한 마을일지도 몰랐다.

장갑을 한 짝을 잃어버려서 하나 살까 했더니 론다. 아주머니가 자기 조카딸이 쓰던 게 있다며 고급 레이스 장갑을 줬다. 머리핀을 찾느라 반나절을 고생했더니 라일리 부인으로부터 공짜로 새머리핀도 얻었다.

어제는 마차를 탈까 했더니 때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간다며 잡화상 볼렌이 마차를 태워 줬다.

오는 길엔? 어쩐 일인지 또다시 물푸레 상회 사람들과 마주쳐서 갈 때보다 편하게 왔다.

줄리엣은 턱을 괸 채로 시선을 조금만 돌렸다.

테이블 위에는 싱그러운 이슬을 머금은 앵초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계절에 앵초라니.'

늦은 점심 무렵 중심가로 향하는 길에 꽃집 주인 젤라즈니가 손님이 비싼 꽃을 예약해 놓고 찾아가지 않았다며 공짜로 안겨 준 것이었다.

게다가 이 파이.

줄리엣은 포크로 파이 끝을 조금 잘랐다. 파삭하게 부서지는 겉 표면과 부드럽게 잘리는 속면, 달콤한 냄새. 입에서 사르르녹아내리는 걸 보면 최고급 버터와 설탕을 아낌없이 쓴 식감이 분명했다.

이게 동부 시골 마을의 식당 주인이 시험 삼아 한번 만들어 본 파이라고? 그렇다면 황궁의 요리 사들은 다 죽어야 한다.

줄리엣은 침착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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