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40화 (37/229)

40화.

***

시종은 세 사람을 아래층의 알현실로 안내했다.

“어서 오게!"

그들이 내려오자마자 잔뜩 화려한 로브를 걸친 땅딸막한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로베르 아키타스,

아키텐 대영주 로베르는 늙고 노쇠했고,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재능 넘치는 후계자였던 맏딸은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그 이후 남은 두 아들들은 수년째 행방이 묘연했다.

소문에 따르면 누이의 죽음을 을놓고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가문을 나가 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늙은 영주의 곁에 남은 것은 호시탐탐 뭔가를 뜯어내려고 아첨하는 자들뿐이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레녹스 칼라 일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아키텐 영주가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호의는 무슨!"

레녹스의 영혼 없는 인사치레에도 아키텐 영주 로베르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그를 반겼다.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으니 부담 갖지 말게나.”

로베르는 세워 놓은 시종들에게 슬쩍 눈짓을 하더니 레녹스 일행을 다시 데리고 나갔다.

“자, 이쪽으로들 오게.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영주는 마치 뒤따르는 시종들에게 그들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베르는 그들 일행을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다.

붉은 휘장을 드리우고 꽤나 사치스럽게 차려진 아래층은 소규모의 연회장으로, 이미 몇몇의 손님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연회장 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전체적으로 조금 긴장한 것 같은 태도들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다.

원체 표정 변화가 적은 하딘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주드는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며 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아키텐 영주의 속셈은 뻔했다.

아무래도 가신들 앞에서 북부의 공작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저것밖에 자랑할 게 없겠지.'

주드는 잠시 딱하다는 표정을 을지었지만, 그가 알기로 그의 주군인 칼라일 공작은 이런 일에 이용당하는 걸 질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드의 예상과는 달리, 레녹스는 의외로 아무 말 없이 아키텐 영주가 권하는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하딘과 주드 역시 다소 실망한 기색으로 착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드는 조용히 입을 비죽거렸다.

영주의 지시대로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고, 잔이 채워졌다.

얼마간 흰소리를 늘어놓던 로베르는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칼라일 공작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죽은 자네 아버지와 나는 아주 잘 아는 사이었지. 그러니 나를 아버지처럼 편히 생각해도 좋 좋아.”

레녹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결코 로베르 아키타스같은 자와는 상종하지 않았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크흠.”

영주의 눈치를 보며 연회장 내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에 중년남자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자자, 소개해 줄 사람이 있었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헛기침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스스로를 소개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카이만 자작이라고 합니다.”

카이만은 야심가였다.

얼마나 야심가냐면, 늙고 교활한 아키텐 대영주의 비위를 살살맞추며 기회를 기다릴 만큼의 야심가였다.

희귀한 마물들을 잡아다 투기장에 팔아넘기고, 아인종을 납치해 경매장에 팔아 버리고, 그렇게 해서 붉은수레바퀴) 길드가 벌어들인 돈의 상당수가 고스란히 로베르 아키타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노예제는 제국법상 불법이지만, 제국의 법은 동부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동부의 명목상 통치자인 아키텐대영주는 그 모든 불법행위를 황금을 받고 눈감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만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아키텐 대영주의 비위를 맞췄던 것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통해 다른 귀족들에게 선을 댈기회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기대는 응답받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규모로 말이다.

'칼라일 공작가라니.'

로베르 아키타스가 넌지시 북부의 천년 가문의 이름을 흘렸을 때 카이만은 그를 믿지 못했다.

너무 엄청나지 않은가. 설령 황제가 왔다고 하더라도 이만큼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술잔이 몇 번 돌고, 취기가 오르자 카이만 자작은 긴장이 풀린 탓에 정신까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하여간 소문이란. 믿을 게 못된다니까.’

카이만은 슬쩍 풀린 눈으로 상석에 앉은 레녹스를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어린놈의 자식이.

건방지기는,'카이만이 만약 일찍 결혼했더라면 그 아들뻘이 저 정도 나이일터였다.

처음으로 칼라일 공작을 목도한 순간, 카이만 자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게 '그' 칼라일 공작이라고?

확실히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미남자였다.

서른 전에 그 전설적인 공적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카이만 자작은 자연히 키가 2미터가 넘는 거한을 상상했었다.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을 거라고 넘겨짚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름 무인으로 동경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궁정의 귀부인들이 푹 빠질 것 같은 외모의,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청년이 아닌가.

균형 잡힌 자세나 훤칠한 체격은 분명 오랜 세월 검술을 단련하지 않으면 갖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흑과 백으로만 그려낸 것 같은 단정한 얼굴의 임팩트가 지나치게 강해서 다른 생각을 차단해 버렸다.

거기에 붉은 눈은 어딘지 섬뜩했다.

'흥. 귀하신 공작 나리시라 이거지.’

생각보다 훨씬 더 귀족스러운 외모에 괜히 배알이 뒤틀렸다.

게다가 카이만을 가장 자극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검이 보이지 않았다.

기사라면 응당 목숨처럼 여겨야 할 검이.

무장한 것은 칼라일 공작의 호위인 듯 보이는 두 명의 기사뿐이었다.

카이만은 비록 자작 행세를 하고 있으나 동부의 무수한 신흥귀족들이 흔히 그렇듯이 뒷골목을 구르다 돈으로 작위를 산 케이스였다.

동부는 황제의 법보다는 길드와 뒤 세계의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고, 그런 험한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하나로도 카이만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귀족들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족들을 미워했다.

눈앞에 있는 아키텐 대영주만 해도 그렇다.

백년 전에는 아키타스 가문이 동부를 호령했을지 모르나, 궁핍해진 지금에서는 누구에게나 황금 한 궤짝에 기사 작위를 팔아 넘기지 않던가.

카이만 자작은 늙고 노쇠한 아키텐 대영주, 로베르 아키타스를 있는 대로 이용해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피가 파랗다는 귀족들도 역시 힘과 돈 앞에서는 다 똑같다.

그렇다면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제 자리를 만들어 쟁취한 쪽이 더 우수한 것이 아닌가?

저 애송이도 마찬가지였다.

꼭 겉멋이 잔뜩 들어서는, 고작 무겁다는 핑계로 검을 멀리하는 곱게 자란 도련님.

술기운이 돌기 시작해서인지, 한번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카이만 자작은 자신보다 나이 어린 게 분명한 젊은 칼라일 공작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귀족이랍시고 반반한 얼굴과 운 좋게 타고난 혈통 덕분을 보는 게 뻔했다.

지위를 앞세워 아랫것들의 공적.

을 가로챘겠지. 손에 피 한번 묻혀 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레녹스 칼라 일의 시선이 카이만 쪽을 슬쩍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카이만 자작은 재빨리 움찔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때 적당히 취한 아키텐 대영주가 말을 건넸다.

“그보다, 카이만, 자네 길드원들이 요즘 아키텐에서 누굴 찾고 있다지?”

"아,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께서 염려해 주실 일은 아닙니다.

하하.”

정체불명의 정령사를 찾는다는 얘기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그가 불법으로 사로잡았던 웨어울프의 이야기로 흘러가게 될 터였다.

되도록 공작 앞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카이만 자작은 적당히 알아듣게 신경 끄라고 돌려 말했다.

그러나 술이 들어간 아키텐 영주는 눈치가 영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내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수 있으니 말해 보게!”

아무래도 로베르 아키테스는 북부의 젊은 공작 앞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별일 아닙니다.”

카이만 자작은 비굴한 미소로 굽실거리며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상단의 물건을 옮기는 과정에서 웬 계집이 나타나 훼방을 놓았답니다.”

아키텐 영주는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허어. 간도 큰 계집이로군. 그래서, 잡았나?"

“아직입니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깟 게 도망치면 어딜 가겠습니까? 영주님의 상품에 손을 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겁니다.”

아첨하는 카이만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로베르가 괜한 허세를 부렸다.

“아니, 아니지! 그럼 더더욱 내 가만 있을 수 없겠군! 자네 사업이면 곧 내 일이 아닌가."

“영주님께서는 크게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워낙 특정되어서 잡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시간문제라니?”

“아, 그게…….”

카이만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건방진 공작 놈을 제외한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확인하고는 기분이 좋아져 결국 말하고 말았다.

“마침 흔치 않은 사악한 재주를 부리는 계집이라, 금방 찾을 겁니다.”

“사악한 재주라면 뭘 말하는 건가?”

"그…… 드물게 나비 마물을 부리는 정령사라고 합니다.”

"!"

그 말에 연회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지루해서 죽어 가던 주드와 묵묵히 앉아 있던 하딘마저 고개를 번쩍들었다.

술렁이는 반응에 용기를 얻은 카이만은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공작 나리께서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동부에서는 정령사를 보기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실은 카이만 역시 살면서 딱 두번 만나 봤지만.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힐벤 남작이 기회를 엿보다 재빨리 끼어들었다.

“제가 인상착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찾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대영주님."

"크흠.”

“암, 동부가 넓다곤 해도 내 손바닥 안이지!”

로베르 아키타스는 그저 이 상황이 흡족한 듯 잔을 들었다.

“정령사라고 했나?"

그 순간, 공기가 차갑게 바뀌었다.

연회 내내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칼라일 공작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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