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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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그게 얼마짜리 물건인데 그걸 놓쳐!”
한 남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부지깽이를 내리쳤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빈 우리 하나가 형편없이 부서졌다.
그러자 지하실의 다른 한쪽의 의우리에 갇혀 있던 어린 수인들이 겁먹은 듯 웅크리며 깍깍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닥쳐!"
쾅!
부지깽이를 든 남자가 발로 우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어린 수인들은 저들끼리 몸을 꼭 붙이며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남자의 이름은 카이만 자작이었다.
카이만 자작은 붉은수레바퀴 상단의 상단주였다.
“.....… 죄송합니다, 자작님.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다른 남자의 이름은 힐벤 남작이었다.
힐벤은 카이만 자작 밑에서 일했고, 그들이 서 있는 거대한 지하실은 붉은수레바퀴상단의 ‘상품’들을 보관하는 지하 창고였다.
붉은수레바퀴 상단은 최근 무섭게 세력을 불리고 있는 상단이었는데, 주요 수입원은 다름 아닌 불법 경매와 투기장이었다.
부지깽이를 실컷 휘두르다 제풀에 지친 카이만 자작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 손해를 어떻게 벌충할 건지 말해 봐라, 힐벤.”
“제가 .… 어떻게든 .…."
“저것들 수십 마리를 가져다 팔아도 모자랄 판이라고! 알아?"
카이만은 날카로운 부지깽이 끝으로 어린 수인들을 가리켰다.
우리에 갇혀 있는 토끼 수인들 같은 것은 비교적 온순하고 사람에 대한 경계도 심하지 않아서, 어린 개체들이라면 잡아들이기 수월했다. 다시 말해, 돈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동부의 광활한 숲에는 다양한 아인종들이 뿌리내리고 살고 있었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은 제국법으로 엄연히 금지되었음에도 언제 어디서든 꼭 하지 말라고 하면 되레 욕망을 불태우는, 할 일 없는 부자들이 있는 법이다.
붉은수레바퀴상단은 그런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그들은 부자들의 저열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큰돈을 벌었다.
그들은 인간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는 신성한 숲을 침범해 수인들을 잡아들였고, 비싼 값에 팔아 넘겼다.
아인종란 자고로 희귀할수록, 손에 넣기 힘든 존재일수록 부르는 게 값이었다.
경매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단연 인어와 웨어울프, 두가지였다.
그러나 그 인기 있다는 기준은 신기루나 마찬가지였다. 노예 경매가 금지된 이래, 단 한 번도 시장에 나온 적이 없는 두 종족들이었기 때문이다.
파도가 높아 인간의 배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인어섬은 그렇다.
쳐도, 동부 한가운데 광활한 숲을 대놓고 차지하고 있는 웨어울프를 잡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웨어울프, 혹은 라이칸슬로프라고도 불리는 늑대들.
카이만 자작이 그런 웨어울프를 손에 넣을 뻔했다는 것은 거의 천운에 가까웠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만 해주게.”
온갖 고매한 척을 다 하던 숲의 일족이 제 발로 직접 카이만을 찾아왔다. 제 동족을 팔아넘긴 것이다.
그 배신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흥, 인간을 천박하다고 무시하며 고고하게 굴었지만, 제맛 것들도 똑같은 주제들이었다.
수개월을 고생해 함정을 파고, 평소 쓰는 약의 수십 배 농도로 맞추고, 온갖 주문이 걸린 쇠사슬로 칭칭 옭아맨 다음에야 겨우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고생을 다 하고 나서 마침내 사로잡은 거대한 늑대를 봤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상 최강의 존재라고 칭송받는 거대한 종족의 성체는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카이만 자작이 결코 납득할 수 없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놓칠 수가 있냔 말이야!”
카이만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치사량 직전까지 약을 놓았다.
약에 취해서 결코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 마련한 쇠사슬은 마탑에서도 가장 저명한 마법사에게 의뢰해 간신히 받은 특수 제 작품이었다.
수십 가지의 주문이 걸려 있었는데, 그걸 끊고 도망쳤다니. 도통 납득이 가질 않는 일이었다.
“……이게 다 그 건방진 계집때문입니다.”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던 힐벤이 짓씹듯 말했다.
“계집이라니?”
지쳐서 철창 위에 걸터앉아 있던 카이만 자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힐벤은 어쩐지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열차 안에…… 요사스러운 술수를 쓰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요사스러운 술수?
대낮부터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비웃으려던 카이만 자작은 멈칫했다.
힐벤의 턱이 덜덜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그, 그러니까……."
힐벤은 더듬더듬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확히는 열차에 타고 있던 어떤 이상한 여자가 부린 이상한 술수에 대해서였지만.
“잠깐. 앞뒤가 안 맞잖나? 아까는 그 여자가 이상한 환영 마법을 부렸다며?"
"예,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계집이 부리는 마물이 그런 겁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마술을 부렸다고요! 막, 늑대도 풀어 줘 버리고….”
그 설명이란 게 '이 새끼 약했나?' 싶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횡설수설한 얘기를 끝까지 들은 카이만은 힐벤과 함께 그 열차에 타고 있었던 다른 부하들을 몇 명 불렀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 여자가 나비 마물을 불러냈다?"
“예! 그겁니다. 그리고 그 나비마물이.."
쯧쯧.
잠자코 듣던 카이만 자작은 힐벤이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손에 넣은 최상품을 그 회색 늑대 말이다. 놓친걸 문책 받을 게 두려워서 자신을 습격한 상대를 잔뜩 과장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힐벤은 자신의 말이 의심받는다는 걸 눈치채고는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제 말이 맞습니다! 확인해 보십쇼!”
중간에 다른 부하를 불러 정말 이상한 재주를 부리는 여자가 있었노라고 확인하지 않았으면 분명 힐벤이 그를 속이려 모두 지어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만큼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힐벤의 주장대로 불러온 다른 수하들도 비슷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거 보십쇼! 제 말이 맞잖습니까!”
힐벤은 금방 의기양양해졌고, , 카이만 자작은 조금 심각해졌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계집은 정령사로군."
“정령사요?”
“그래. 진짜 정령사는 아니겠지만.”
진짜 정령사들은 예전에 다 멸종했으니까.
지금 정령사라고 불리는 자들은 모두 마력 친화력을 인위적으로 높여서 이세계의 존재를 불러내는 편법을 썼다. 그런 자들은 대개 최후가 비참했다.
카이만 자작은 평생 뒤 세계 생활을 했고, 그도 가끔이지만 정령사라는 자들을 한두 번 만났었다.
고상하신 제국 귀족들은 어린애장난에 놀라 까무러칠지도 모르지만 그는 달랐다.
드물긴 하지만, 힐벤이 진술한 상황이 아예 이해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이상한데. 미쳤다고 어느 정령사가 나비를 불러내?"
이계의 마물을 부리는 자들 중에서 나비를 고르는 정령사는 없다.
당연하다.
기껏 어렵게 차원의 문을 열어 이계의 마물을 소환하는 것인데, 이왕이면 강력한 힘을 가진 무시무시한 형태의 마수들을 소환하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보통 정령사의 등급은 얼마나 크고 강력한 이세계의 존재를 불러낼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다음은 계약한 마물, 혹은 정령을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붙잡아 둘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겠지만.
환영 마법을 썼다는 얘기가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카이만은 힐벤과 부하들이 난생처음으로 마물을 불러내는 정령사를 봐서 겁에 질렸던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카이만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계집이 설령 정말로 정령사라고 한들, 걱정할 건 별로 없었다.
“흥. 그래 봤자지.”
그 정도 실력자라면 소문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작은 지금까지 나비마물을 부린다는 정령사 계집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그, 그렇게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닙니다. 정말로, 위험한...…..”
“됐다! 알겠으니까 이제 그 입좀 다물어!”
카이만 자작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힐벤은 꽤 쓸 만한 부하였다.
그러니까 어렵게 손에 넣은 늑대를 맡긴 것이었지만.
그런데 특별히 신경 써서 골라 보낸 힐벤 일행이 고작 정령사계집 하나에 궤멸 직전 상황까지 몰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주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진 않긴 했지만 카이만은 이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진짜 존재하는 건지도 의심스러운 이상한 마물을 부리는 여자 따위는.
“잘 들어! 세상 어떤 미친 정령사가 그런 마물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내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나비 마물을 부리는 여자라.
특정하기도 쉽다. 게다가 열차에 탔었다면 기록도 남아 있을 테고 말이다.
카이만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동부에서 엄연히 자기만의 길드를 거느린 야심가였고, 그 계집이 동부에 있다면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댄 계집을 가만 두면 안 되겠지."
“하, 하지만 자작님 -."
여자를 찾아내겠다는 말에 힐벤이 두려운 듯 떨었지만 카이만은 짜증을 냈다.
“됐다! 지금 그따위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든 중앙 정계에 줄을 대려고 안달이었던 그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최근 뇌물을 가져다 바치던 대귀족이 그를 냉대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아키텐의 늙은이 알지? 그 노인네가 나를 불렀어."
“예? 아키타스 대영주 말입니까? 추, 축하드립니다.”
눈치를 보던 힐벤이 물었다.
“그런데, 대영주는 무슨 일로 자작님을 부르는 겁니까?”
카이만 자작은 잔뜩 거드름피우는 태도로 대답했다.
"내게 북부에서 온 귀빈을 소개시켜 준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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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아키텐.
아키텐 성은 동부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성이었다. 비교하자면 북부의 공작성쯤의 위치였다.
차이가 있다면, 아키텐 영주 가문은 이미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잃은 지 오래라는 것이었다. 마치 성벽 위에 나부끼는 빛바랜녹색 깃발처럼 말이다.
고색창연한 성의 망루 위에 세남자가 서서 그 풍경을 보고 있었다.
레녹스는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던 상아 세공품을 가볍게 던졌다.
가 다시 받아 냈다.
아르고스의 눈.
줄곧 줄리엣이 떠난 방향만을 가리키던 성유물이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방향 잃은 나침판처럼 핑그르르돌면서 사방팔방을 발광하며 미친 듯 빛을 쏘아 대더니, 이내 힘을 다한 듯 잠잠해졌다.
이래서는 평범한 돌조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고장난 걸까요?"
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성유물은 고장 나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주드 경.”
하딘이 대신 대답했다. 약간의 한심하다는 어조를 담아서.
주드가 살짝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와 동시에 레녹스가 성유물을 그쪽으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이크.”
솜씨 좋게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챈 주드는 잠시 자신의 반사신경에 뿌듯해졌다.
그 단순함에 조금 웃은 다음 레녹스가 말했다.
“줄리엣이야.”
“네? 모나드 양이요?"
그는 잠시 성 밖으로 끝없이 늘어선 빽빽한 녹색 나무들에 시선을 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파훼법을 손에 넣었나 보군.”
레녹스는 조금 궁금해졌다.
성유물은 길가다 줍는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는 마력석과는 다르다.
줄리엣은 무슨 수를 썼던 걸까?
“아하. 그럼 이제 쓸모없네요.”
주드가 불경스럽게 투덜거리며 품 안에 성유물을 집어넣었다.
하긴. 신관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이 물건은 작동도 비효율적인 주제에 대여료가 비싸기까지 했다.
어쨌든 신전의 보물이니, 돌려주긴 해야 한다.
"크흠.”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동부 식으로 잔뜩 차려입은 시종이 서 있었다.
“영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