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어머?”
도서관 입구의 카운터에 앉아 몇몇 사람들과 뭔가 심각하게 얘기하던 베로니카가 줄리엣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관람은다 하셨나요?”
"네, 덕분에요.”
줄리엣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도서관을 나오려는데, 입구에 우르르 몰려 있던 사람들이 알은체를 했다.
“아하, 관광 오셨다는 그 아가씨로군?”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소문도 빠른 모양이었다.
그들의 차림새를 빠르게 훑어본 줄리엣은 마을 광장에서 많이 본 상단의 의복이란 걸 눈치챘다.
붙임성 좋은 상단 사람들답게, 그들은 초면인 줄리엣에게도 서슴없이 친절하게 말을 붙였다.
“오자마자 험한 꼴을 보셨다지요?”
“항상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디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잠시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줄리엣은 이내 소매치기와 부딪쳤던 일을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 네. 괜찮아요. 멀쩡한걸요.”
그들은 자신들을 물푸레 상회상단이라고 소개했다. 그들 역시 어제 사건이 일어난 시각 광장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광장으로 돌아가실 거라면 기다렸다가 같이 수레를 타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했기에 줄리엣은 냉큼 승낙했다.
상단 사람들이 도서관에는 웬볼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도서관에 보관 중인 숲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숲의 지도? 지도라면 상회에 훨씬 많지 않나?'
굳이 도서관까지 올 일이 뭐가 있지.
그때 무심코 상회 사람들이 옮기고 있는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숲의 지도는 종이로 된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목판으로 조각해 퍼즐처럼 짜 맞춘 거대한 숲의지형도가 펼쳐졌다.
줄리엣은 상단 사람들이 하나씩 해체한 숲 모형을 수레에 옮겨 신는 동안 입구에 앉아서 비치된 책들을 구경했다.
아무래도 지역이 지역인지라, 약초학이나 역사서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줄리엣은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뽑아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 상단 사람과 베로 니카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문제가 심각해지겠네요.”
“안 그래도 요즘 노예상들 때문에 난리라더군요. 마구잡이로 아인종을 잡아들이는 통에 -."
“그게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을까?"
“아키텐 대영주는 뭐랍디까?"
“대영주가 언제 이런 일에 신경쓰는 거 봤나?”
은의 숲도 이러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라이칸슬로프 말씀이시죠?"
…… 라이칸슬로프?
엿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줄리엣은 멈칫했다.
「은의 숲」
자신이 살펴보고 있던 책의 제목이었다. 줄리엣은 파라락 책장을 넘겼다.
거대한 늑대를 형상화한 그림과 함께 글이 실려 있었다. 입술을 비죽거리던 줄리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로이.
'걔는 집에 잘 갔을까?' 제국법상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동부는 인간의 숫자보다 아인종의 수가 월등히 많다. 그런 이종족들에게는 제국법이 미치지 않는다.
수인들은 대부분 인간을 적대시하고 '은의 숲'같은 폐쇄적인 곳에서 무리를 이루며 산다고 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숲의 일족들은 매력적인 대상이기도 했다.
하여간. 어딜 가나 인간이 문제라니까.
줄리엣은 쇠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던 늑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단순히 진귀한 사냥감이 아니라, 노예로 쓰려고 포획했던 걸지도 몰라.'
북부에서 지내던 시절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사치스럽고 할 일 없는 남부의 부자들 중에는 아인종을 사들여 노예로 장식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평생 제도와 북부만을 오간 줄리엣은 동부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수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 열차에서 만난 것이 줄리엣이 난생처음 본 웨어울프였다.
그 이후로 나름 두 개의 도시를 거쳤지만 아인종은커녕 평범한 제도의 풍경처럼 보통 사람들만질리도록 만났다. 그걸 보면 동부에서도 생각만큼 자주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원하는 책이 있다면 얼마든지 빌려 가서 읽어도 좋다고 했지만 줄리엣은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일단 상단 사람들을 따라 짐수레에 몸을 실었다.
상단 사람들은 줄리엣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주고받았다.
“설마, 그쪽으로 가실 계획은 은아니겠죠?”
“왜요?”
“어휴, 지금 그 부근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소문이 흉흉합니다.”
“로드가 바뀌었다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러면 페리나스까지 가는 경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안 그래도 어제 저희 부단주님이…….”
물푸레 상회사람들은 걱정어린 투였다.
아무래도 유통망이 중요한 상인들로서는 동부 한가운데 큰 면적을 차지하는 은의 숲을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문제인 듯했다.
“혹시 카티아 근처에 가실 예정이었다면 되도록 지금은 가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상단 사람들은 줄리엣에게도 꽤나 진지하게 충고했다. 어차피 그녀의 계획에 숲을 방문하는 일은 없기도 했다.
줄리엣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로드가 뭐예요?"
"웨어울프의 왕을 말하는 겁니다.”
“아하.”
줄리엣은 나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단 사람들은 더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인간과는 달리 웨어울프는 수명이 길어서 로드가 바뀌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요. 적어도 동부에서는 아키텐 대영주보다 웨어울프 로드가 훨씬 왕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어요.”
“그 정도예요?”
줄리엣은 조금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아키텐은 동부 관문이 위치한 곳으로 동부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였다. 옛 왕국의 수도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키텐은 대대로 아키타스 가문이 다스리는데, 대충 그 위치가 칼라일 공작가가 북부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의 지식으로는 대영주를 제치고, 하물며 이종족의 왕이 더 영향력이 크고 중요한 위치라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은의 숲 때문이죠.”
상단 사람들이 앞다투어 설명했다.
은의 숲.
'아까 책 제목도 그거였는데.'
그건 동부 카티아 지역의 거대한 숲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새 로드가 어떤 성향인지 알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설명에 따르면, 숲의 일족들에게 미치는 웨어울프 로드의 영향력은 제국으로 치면 황제의 영향력에 버금간다고 했다.
또한 로드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인지에 따라서 숲의 성향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먼 거리를 이동하며 물건을 옮겨야 하는 상단 사람들로서는 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고 말이다.
“누가 로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나 봐요?”
“알기 어렵죠. 더욱이 요즘은 은밀렵꾼 놈들이 기승이라. 더더욱 인간에게 적대적일 겁니다.”
상단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몇 개의 군소 길드들이 숲근처에서 어린 수인 개체들을 납치해 노예 경매에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된 거였네.
'그럼 내가 본 것도.'
줄리엣은 눈살을 찌푸렸다. 열차에서 마주쳤던 괴한들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그 불법 사업에 발을 들인 길드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뭔가 쇠사슬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진정제가 담긴 실린더며, 조직적인 범죄 같긴 했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네'멍멍이를 풀어 준 걸 후회하진 않지만, 지하 세계의 불법적인 조직과 얽힌 거라면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혀를 한 번 가볍게 차고는 이 문제를 머릿속한구석에 밀어 놨다.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니까, 갑자기 줄리엣은 로이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진 게 좀 미안해 지기 시작했다.
또 나쁜 사람한테 잡히면 어쩌나,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너무 순하던걸.'
아직 어려 보이기도 하고. 줄리 엣은 제가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하면서 생글생글 웃던 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착했습니다.”
줄리엣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을 태운 수레는 어느덧 마을의 광장에 다다랐다.
줄리엣은 감사 인사를 표하고는 수레에서 내렸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 ?"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줄리 엣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아뇨, 방금 저기서 -."
뭔가,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줄리엣은 수상한 인기척을 느꼈던 모퉁이까지 직접 걸어가 보았지만 그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피곤해서 잘못 봤나?
줄리엣은 목덜미를 가볍게 쓸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