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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37화 (34/229)

37화.

노인은 희끗해지기 시작한 회색 머리칼과 본래의 붉은 머리가 섞여 뭐라 말하기 어려운 오묘한 색의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

아까 역마차에서 마주친 그 이상한 남자도 그렇고, 이 동네는 붉은 머리가 많은가 봐..

줄리엣은 그렇게만 생각하며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그때 소매치기를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광장 쪽으로 돌아왔다.

"아니, 어르신이셨군요!”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왁자지껄 소매치기를 끌고 돌아온 상단 사람들은 노인을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 그보다 .."

광장의 분수대에 기대어 있던 노인이 지팡이 끝으로 잡혀 온 소매치기의 옷깃을 툭 건드리자신기하게도 지갑 여러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대체 몇 사람 지갑을 훔친 거야?”

놀란 것은 상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갑의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소매치기를 다시 끌고 갔다.

그러자 분수대에는 어쩐지 떠날 타이밍을 놓친 듯한 줄리엣과 노인, 단둘이 남게 되었다.

“젊은이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닌 것 같군?”

“아, 네. 맞아요.”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 보게.”

'……이거 혹시 소원을 말할 타이밍인가?' 마을 사람들이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하는 것만 봐도 평범한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줄리엣은 기골이 장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노인과 그의지팡이를 한번 번갈아 봤다.

사실 조금 전 노인의 지팡이를 주워 줄 때 줄리엣은 대충 눈치를 챘다. 묵직한 지팡이는 흔히 소드스틱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안에 검이 숨겨져 있었다.

줄리엣은 문득 케인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늙은 용병은 믿으셔도 됩니다.”

그는 용병 시절 겪었던 것에 대해 종종 말해 주곤 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였다.

늙은 용병은 그냥 노인이 아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훈장이라고 했다.

어쩌면 잘 보이면 터무니없는 소원이라도 들어줄지 모른다. 하지만 줄리엣은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다.

"아, 그럼.”

줄리엣은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자카리 법률사무소.

“여기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시겠어요?”

*

자카리 법률 사무소.

자카리는 이 작은 도시의 법률 가였지만 그의 가장 주요한 업무는 부동산 중개였다.

아무래도 상단 본부가 잔뜩 모여 있는 카르카손의 바로 옆 도시이다 보니, 로벨에는 들고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집을 단기로 렌트하는 일도 잦았다.

딸랑.

"어서 오십……. 아니, 어르신!"

자카리는 그녀와 함께 들어온 노인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나는 그냥 안내역이니 저 젊은이부터 봐 주게.”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줄리엣을 가리켰다.

“실례했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웃는 얼굴로 접객에 들어간 자카리에게 줄리엣은 찾아온 용건을 설명했다.

“집을 빌리고 싶어서요. 넉넉히 한…… 1주일 정도로, 너무 광장에서 떨어지지 않은 곳이면 좋겠어요.”

“그렇군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줄리엣은 자카리가 서류를 꼼꼼히 살피는 동안 뒤쪽을 힐끔거렸다.

줄리엣과 동행한 노인은 제 집인 양 사무실의 안락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아 신문을 살피고 있었다.

'지역 유지인가?'

확실한 건, 평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반기는 자카리나 아까 상단 사람들의 태도만 봐도 그랬다. 좀 터무니없지만, 어쩌면 상단 길드의 높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줄리엣은 문득 저 노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괜찮은 곳이 있군요."

때마침 자카리가 펜대를 두드려서 줄리엣은 그 생각을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친절하게 계약 조건을 설명해 준 다음 자카리는 줄리엣을 힐끔 보고 물었다.

“혹시 길드 소속이십니까?"

“아뇨.”

길드.

동부에도 엄연히 대대손손 그 지역을 다스려 온 영주들이 있다. 제도와 마찬가지로 귀족들도 있고 사교계도 있다.

'있긴 있지만…….’

하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길드랄까. 간단히 말해 상단 겸 용병단 같은 조직이었다.

“대신 길드의 인가를 받은 통행증이 있어요.”

줄리엣은 미리 준비한 통행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열차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했던 신분증명서였다.

자카리는 그 통행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줄리엣의 말대로 발급된 통행증서와 함께 동봉된 것은 유명한 상단 두 곳의 인장이었다. 줄리 엣이 레녹스를 따라 북부로 가기 전 제도의 정보 길드를 통해 미리 받아 두었던 것이다. 그땐 이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군요. 확인했습니다."

자카리는 그 인장 덕분에 위조된 통행증을 눈치채지 못했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길드는 그야말로 행정적, 경제적 공동체였다.

그리고 그 체계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리오넬 르바탄이고.

동부 사람들이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적왕의 이름만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안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릴리안, 세네카…… 양? 아니면 부인이십니까?”

자카리가 통행증에 적힌 이름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줄리엣은 별생각 없이 초기 설정에 충실하게 대답하려고 했다.

“부인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세네카 부인. 그러면 남편분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일행이 더 있으시면 여기에 남편분의 기록을.”

“아뇨!”

줄리엣은 황급히 설정을 변경했다.

“남편은 그러니까…… 죽었어요. 2년 전에요.”

급조된 설정의 부작용이다. 줄리엣의 가상 남편은 만들어진 지 30초 만에 폐기처분되었다.

“아, 저런. 상심이 깊으셨겠습니다. 실례했군요.”

자카리가 동정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와서 줄리엣은 어쩔 수 없이 적당히 슬픔에 잠긴 표정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없는 남편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빨랐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오십시오.”

줄리엣을 집주인인 론다에게 인계해 준 자카리는 끝까지 친절하게 배웅했다.

딸랑.

“이런 마을에 방문객이라니, 드문 일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자카리는 멀어지는 두 여자의 의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쪽의 안락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을 '어르신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직 어린 부인이 안됐군요. 남편과 사별이라니.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을 것-."

무심코 뒤돌아선 자카리는 잠시 흠칫 놀랐다.

붉은 머리칼의 노인은 더 이상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늘 가지고 다니는 소드스틱에 두 손을 가볍게 얹은 채 안락의자에 사자 같은 자태로 앉아 있었다.

“자카리.”

“아, 예. 어르신.”

"방금 나간 저 여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그-."

자카리는 잠시 허둥대다 서류를 뒤져서 방금 나간 손님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릴리안 세네카.

“그래. 분명 그 이름이 더군.”

조금 전의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쏘아보는 노인의 얼굴에 더 이상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줄리엣은 원래의 목적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로벨 광장에서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언덕에는 매우 오래된 정체불명의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줄리엣은 숙소에 짐을 풀어 놓고 마을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벨 광장에서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도서관 옆에는 정체불명의 유적이 있었다. 옛 신전 터라 는데, 정확히 어떤 신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거긴 볼 게 없을 텐데요?”

줄리엣이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도서관 사서라는 여자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아무도 그게 뭔지 모른답니다.

그냥 방치되어 있는 거죠."

“그렇군요. 그럼 좀 둘러봐도 될까요?"

"뭐, 얼마든지요.”

사서 베로니카는 구경하고 오라며 유적 입구까지 안내해 주었다.

줄리엣은 그녀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곧장 유적 주변을 돌면서 네 귀퉁이를 살피기 시작했 했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로벨에는 동부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유적이 있었다. 제국 수도 주변에 방치된 고대의 신전 유적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

모서리가 있었을 법한 자리를 꾹꾹 누르던 줄리엣은 다른 곳과는 조금 촉감이 다른 흙을 발견했다.

달칵.

“찾았다.”

그 자리를 다급히 쓸어 내자 작은 함 같은 게 나왔다. 안에 든 것은 거울 조각이었다.

고대에는 신의 축복을 빌며 거울 조각을 묻는 풍습이 있었다.

줄리엣은 이전 생에서 달리 아가 이렇게 신전의 유물을 찾아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칼라일이 신성력을 이용해 저를 쫓고 있는 지금,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는 신성력이 깃든 물건이 제격이었다.

오래 숨겨 주진 못해도 임시방편은 될 것이다. 신성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성유물들은 보통 오래될수록 신성력이 강한 편이라고 하니까.

'그러고 보면 달리아는 사제가 아닌데도 어떻게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던 거지.'

줄리엣은 거울 조각을 비춰 보며 담담히 생각했다.

게다가 고위급 신관들도 알지 못하는 비밀들을 술술 풀어놓은 적도 많았다.

'예언의 소녀니까 가능했나 보지.'

줄리엣은 찾아낸 거울 조각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손수건으로 감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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