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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36화 (33/229)

36화.

마부는 신이 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적왕의 고향이 바로 이 로벨 마을입니다.”

리오넬 르바탄.

속칭 적왕이라는 불경스러운 별명을 가진 남자는 동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적왕의 이름은 안다는 말이 돌았을까.

지금으로부터 50년쯤 전에, 통제 불가능한 망나니들이 동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왜 이동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먼저 동부에 정착한 이들은 저들끼리 길드를 만들어 새로 동부에 몰리는 망나니들을 수용했다. 그 세력이 제법 커져서 제국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이야, 그 시기의 동부는 완전 범죄의 온상지나 다름없었죠.”

모험가 행세를 하며 몰려온 불량배들 때문에 동부에는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그 상황을 정리한 것이 리오넬르바탄이었다.

그는 동부를 다스리던 그 어떤 권력자보다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낱 용병 출신이 대륙의 4분의 1을 좌우하는 세도가가 된 것이다.

그러자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리오넬 르바탄을 황실이 고깝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국 황실은 그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알아요. 궐석재판이었다죠."

리오넬 르바탄 본인은 참석하지 않고, 텅 빈 의자만 놓고 진행된 재판이었다.

그 재판에서 적왕, 리오넬 르바탄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판결에 따르면 리오넬은 동부를 떠나 제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사형장으로 압송될 것이다.

그 재판은 자존심이 상한 황실의 쇼에 가까웠다.

실질적으로 동부의 제왕인 그를 잡아들일 방도가 없던 황실에서 찾은 고육지책이자 리오넬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직후 리오넬 르바탄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줄리엣은 이 이야기를 여러 번들어 꽤 잘 알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사귄 그녀의 친구 중 한 사람도 동부 출신이었고, 용병이었으며, 당연하게도 리오넬 르바탄이란 사람을 몹시 존경했던 것이다.

그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은 황실에서 그를 잡아다 죽였다든지, 보물을 잔뜩 실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떠났다든지 등등.

“그리고 그 행방은 지금껏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만, 사실 동부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실을 알고 있죠.”

의미심장한 마부의 말에 줄리엣이 귀를 쫑긋했다.

“진실이 뭔데요?"

“적왕은 사실…… 죽은 것도 떠난 것도 아닙니다. 고향인 카르카손에서 이름을 바꾸고 살고 있는 겁니다.”

“하!”

마지막의 비웃음은 마부의 것도, 줄리엣의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소리 난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내 잠을 청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그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자는 척하며 다 듣고 있었는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대놓고 비웃었다.

'….… 비웃은 거 맞나?'

남자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마부를 슬쩍 흘기고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줄리엣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도 뭔가 굉장히 아니꼬운 표정으로,

'뭐야?'

줄리엣은 방금 전의 대화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나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는 건 건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제가 잘못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줄리 엣은 똑같이 마주 쳐다봐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니꼽다는 듯이.

'재수 없어…….’

입 밖으로 굳이 내지 않았는데도 표정으로 충분히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쳇.”

붉은 머리의 남자는 순간 움찔하더니 가볍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중간에 마부의 이야기가 끊기기는 했지만, 이후의 여정은 그럭저럭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역마차는 로아델 역을 떠난 지약 한 시간쯤 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로벨입니다."

첫인상이 나빴던 붉은 머리 남자는 먼저 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줄리엣은 마부에게 팁을 건네고 감사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거쳐 가는 마을일뿐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로벨의 첫인상은 전혀 뜻밖이었다.

‘근사하다..'

줄리엣은 속으로 감탄했다.

북부나 수도는 전통적으로 흰대리석을 최고로 쳐서, 반질반질 깔끔하고 세련된 건물들이 대부 분이었다.

반면, 눈앞에 펼쳐진 로벨의 건물들은 붉은 벽돌을 써서 하나같이 알록달록했다.

높은 종루와 중앙의 시계탑을 중심으로 상점가가 둘러싸고 있어서 광장은 동그란 형태로 펼쳐졌다.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역시. 오길 잘했어..'

주변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던 줄리엣은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비로소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여행지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설레기 시작했다. 북부에서 이곳 저곳을 다니긴 했지만, 그때는 는항상 감시 겸 호위가 따라붙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줄리엣은 광장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툭.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 하나가 줄리엣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

‘어라?’

줄리엣은 순간 위화감을 느끼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를 치고 지나간 남자는 그대로 유유히 지나갔다. 멀뚱멀뚱잠시 서 있던 줄리엣은 곧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남자는 태연자약하게 상단 지점들이 주르륵 몰려 있는 상점가로 다가가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행인에게 접근했다.

퍽!

이번에는 타이밍 나쁘게도 몸을 돌리던 행인과 꽤 세게 부딪혔 혔다.

"어이쿠!”

그리고 줄리엣의 눈매도 가느스름해졌다.

남자가 행인과 부딪쳐 그를 쓰러뜨리기 직전,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슬쩍하는 것을 봤던 것이다.

“도둑이야!"

어떻게 된 게 좋은 마을이야라고 생각한 지 3초도 안 지났는데.

“뭐? 도둑?”

"저놈 잡아라!”

다행히 목격자는 줄리엣뿐만이 아니었다.

때마침 상회 밖으로 우르르 나오던 상단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칫!”

소매치기는 황급히 행인들을 밀치고 골목으로 달아났다.

상단 사람들이 그 뒤를 다급히 쫓았다. 하지만 소매치기도 꽤 신출귀몰해서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혹시 몰라 몰래 나비 한 마리를 소매치기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려 보낸 줄리엣은 쓰러진 노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줄리엣은 자신의 인생에 장르가 있다면 힐링물은 결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평화로운 마을에도 소매 치기쯤은 있을 수 있지.'

로벨은 거대도시 카르카손의 바로 옆 도시니까 말이다. 카르카손만큼 혼잡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여기는 전설적인 동부 거물의 출생지잖아?

줄리엣은 애써 그렇게 이해하고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바닥에 쓰러진 것은 풍채가 좋은 그러나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는 줄리엣과 손을 힐끔 번갈아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거, 신세를 졌군. 젊은이, 고마우이.”

“별말씀을요.”

웃으며 대답하는 동시에 줄리엣은 소매치기가 도망간 골목 쪽을 곁눈질했다.

끄아아악!

그와 거의 동시에, 처참한 비명이 골목 쪽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들으니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봐도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나비가 충실히 배를 채운 게 분명했다.

줄리엣은 자신은 무관하다는 듯 태연히 시치미를 떼며 얼른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쓰러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풍채가 상당히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기사들에게 익숙한 줄리엣이 보기에도 감탄할 정도로 몸이 잘단련돼 있었다. 최소한 평범한 노인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는 이름깨나 날렸겠다 싶었다.

'적어도 저런 비실한 소매치기에 당할 것 같진 않아 보이는 데….’

잠시 의문을 품었던 줄리엣은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줄리엣의 부축을 받아 중심을 잡고 일어선 노인이 이내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미안하네만 젊은이, 그것 좀 주워 주겠나?”

아.

무심코 고개를 돌린 줄리엣은 그녀의 뒤쪽 바닥에 떨어진 검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 지팡이?'

줄리엣은 노인의 요청대로 지팡이를 주워 건네주었다.

평범해 보이는 검은 지팡이는 는생각보다 묵직했다. 줄리엣은 잠깐 그 무게감에 놀랐지만 표정을 숨겼다.

“고맙네.”

탁.

노인은 지팡이를 꺼내 바로 짚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아채기 어렵지만, 노인은 미세하게 왼쪽 다리를 땅에 끌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진 줄리엣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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