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3. 요람.
로아델은 예쁜 도시였다.
중앙 광장의 커다란 원형 분수에서는 물이 퐁퐁 솟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광장에는 아이들과 흰 비둘기가 뒤섞여 돌아다녔고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줄리엣은 분수대와 상점가를 따라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걷다가 어느 가게 앞에서 무심코 발길을 멈춰 세웠다.
“어서 오쇼! 뭘 드릴까?"
심드렁한 주인이 물건을 진열하면서 줄리엣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줄리엣은 대답하지 않고 가판대 앞에 늘어선 다양한 과일들을 구경했다.
기후가 온난한 덕분인지, 제도에 비해서 과일의 종류가 다양했다. 그렇다고 값이 싼 것은 아니었지만, 줄리엣은 빨간 사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렌지를 고르려다 멈칫했다.
'이게 여기에도 있네.'
오렌지 바로 옆에서 훨씬 작은 과일을 발견하고는 감탄했다.
크기도 작은데 왜 가격은 두 배일까?
줄리엣은 과일 판매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고심하는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은화가 짤랑거렸다.
"이것도 주세요.”
그러자 내내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주인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녀가 가리킨 과일은 비싸서 좀처럼 팔리지 않는 애물단지였다.
"아이고, 그럼! 드려야지!"
잠시 후, 마을 상점가를 한 바퀴 빙 돌고 온 줄리엣은 숙소 근처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작은 오렌지처럼 생긴 것을 꼬집어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만다린'이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귤이잖아.'
심지어 맛도 북부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았다.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신문 한 부를 샀다.
보지 말아야지, 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결국 오늘도 사고 말았다.
줄리엣은 가볍게 심호흡한 다음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신문을 을빠르게 훑었다.
“.…없네.”
없다.
잠시 후, 줄리엣은 그녀가 찾던 종류의 소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신문을 펼쳤다.
나쁜 소식을 굳이 기대하고 찾아보는 건 조금 이상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걸지도 몰라.’
그렇게 기대하게 되는 게 비참했다.
신문에 굳이 소식이 실리지 않더라도 얼마든 달리아가 이미 나타났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첫 번째 삶에서 달리아는 이번 해의 첫날에 등장했었다. 등장하는 장소도 타이밍도 극적이라 난리가 났었다.
똑똑히 기억이 난다.
"들으셨어요, 전하? '예언의 소녀'래요.
그 얘기를 레녹스에게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전했던 것은 다름아닌 줄리엣이었다.
그때 레녹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줄리엣은 그저 언제나 그랬듯 그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아무 이야깃거리나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는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어디 보자.”
줄리엣은 길가의 테이블에 앉아 지도를 펼쳤다.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동부에서는 대귀족들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았다. 동부의 중앙엔 여러 수인종들이 살고 있는 숲이 있고 그리고…….
'루체른이 있지.’
루체른.
줄리엣은 지도 위에서 한 점을 찾아냈다.
신성 법국 루체른.
루체른은 특이하게도 왕이나 귀족들 대신에 법황이 다스리는 도시국가였다.
신전의 우두머리이자 모든 종교의 왕인 법황과 그런 법황을 보필하는 법황청과 사제들이 있는곳.
루체른 자체만으로는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전 대륙 곳곳에 뻗어 있었다.
'아마, 북부를 제외하고?'
칼라일 공작가와 신전의 험악한 관계는 유명하니까 말이다.
줄리엣이 동부로 도망치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동부는 대륙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유달리 신전과 법황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칼라일이 있는 북부와 다르게 여신을 믿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그녀가 동부로 도망치면 신전과 사이가 좋지 않은 레녹스가 굳이 그 이후의 행방을 묻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랬는데…….’
줄리엣의 입매가 굳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녹스가 대신전의 성유물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렇게 속을 긁어 놓았으니.
“화, 났겠지.”
줄리엣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조금 속상했다.
'이왕 헤어지는 거, 그냥 좋게 웃으며 떠나고 싶었었는데.'
평소에는 그보다 더한 일에도 잘 참았으면서 왜 유독 그에 관해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
“뭐, 어차피 들켰으니까…….”
줄리엣은 중얼거리면서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레녹스 칼라일의 손에 성유물이 있는 이상 그가 줄리엣이 이곳 로아델에 있다는 걸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가 열차를 타는 것을 확인했으니 최소한 동쪽으로 갔다는 정도는 알고 있겠지.
줄리엣이 중간에 계획을 바꿔로아델에서 내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의 원래 목적지로 향하기 전에 일단 이곳에서 추적을 무력 화시킨 다음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어디에, 왜 갔는지 레녹스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건 싫어.’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르고스의 눈'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아르고스의 눈이 마도구라면 비교적 간단했겠지만, 그건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물건이었다.
마력과 신성력은 서로 상반된 힘이고, 성유물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높은 단계의 신성력이 필요했다.
다른 곳에서라면 ‘무슨 수로?'라고 했겠지만 줄리엣은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생각해 둔게 있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줄리엣은 지도를 보고 활짝 웃었다.
* * *
줄리엣이 내린 로아델 역에서 목적지인 로벨 마을까지는 10분 정도 역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손님?"
역사 앞에는 활기차게 호객 행위를 하는 꼬마들이 많았다.
“혹시 숙소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저희 여관으로 오세요!"
자칫하면 역마차를 타러 가기도 전에 눈뜨고 가방을 빼앗기겠다.
싶어 줄리엣이 잠시 멈칫했다.
그때 불쑥 줄리엣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저리 비켜.”
어쩐지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몰려든 꼬마들의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밀어내고 휘적 휘적 걸었다.
밀쳐진 꼬마들이 뭐라고 사납게 욕설 섞인 항의를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덕분에 줄리엣은 남자가 터놓은 길을 따라 역마차 승강장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의 그 남자를 발견했다.
와.
줄리엣은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엄청난 빨간 머리..'
남자는 주변의 시선을 잔뜩 끌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힐끔거릴 만큼 인상적인 외모였다.
여행자일까?
줄리엣은 작은 호기심에 그를 힐끔거렸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손님?”
"아…… 로벨로 가려는데요.”
생각에 잠긴 줄리엣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역마차꾼이었다.
잠시 후, 줄리엣은 마차 상을 치르고 로벨 행 역마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소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예의 그 붉은 머리 남자가 줄리 엣이 탄 역마차 맞은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만 요란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줄리엣은 조금 후회했다.
‘차라리 옆자리에 앉을걸..'
마차에 막 탔을 때까지만 해도 다른 승객이 더 있을 줄 알았는 데, 역마차에 승객이라곤 달랑 둘뿐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로벨은 작은 마을이라 로벨까지 가는 승객은 하루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하다고 했다.
덜컹거리는 역마차는 줄리엣이 익숙한 마차들과는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도록 좌석이라곤 길게 세로로 나란히 놓인 널빤지 두 개가 전부였다. 당연히 등받이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마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남자가 잠을 청하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줄리엣은 맞은편의 남자를 마음 놓고 관찰할 수 있었다.
보통 적발이라고 하더라도 붉은 기가 도는 정도 였는데 남자의 머리카락은 핏빛에 가까울 정도로 진했다.
'나도 염색이나 할까.'
동부는 마도구가 흔하니까 어쩌면 머리색을 바꿔 주는 마도구를 썼을지도 몰랐다.
"크흠, 로벨은 어쩐 일로 가십니까?”
마침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던 마부가 줄리엣을 향해 물어 왔다. 침묵이 불편했던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굴 만나기로 해서요.”
줄리엣은 대충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퍽 심심했던지, 자신을 로벨 출신이라고 소개한 마부는 묻지도 않은 로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로벨만큼 안전한 곳이 또 없지요. 아무래도 왕님의 고향이니까요.”
“왕님이요?”
별 감흥 없이 듣던 줄리엣은 난 생처음 들어보는 근본 없는 극존칭이 재밌어서 되물었다.
"모르십니까? 리오넬 르바탄, 적왕 말입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