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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34화 (31/229)

34화.

"너도 언젠가 개화하면 알게 될 거다.”

그보다 한참이나 약해빠진 주제에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의 앞에서 우쭐대던 멍청이들이 떠올랐다.

"지아비가 되고, 왕위를 이을 자격이 생긴단 뜻이지.”

그래서 로이는 그 잘난 척하는 낯짝을 짓이겨 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로이는 덜떨어진 형제들과 그들의 반려를 떠올려 봤다. 다 제 주제에 꼭 맞는 짝을 골랐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 줄리엣이라고 했어."

이름을 가만가만 읊조리는 그의 입가에 볼우물이 했다.

그녀에게는 더없이 어울린다.

개화라니.

그 얼마나 근사한 단어인가.

웃을 때 꽃망울이 터지는 것처럼 웃는 여자에게 그보다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그런 로이를 어쩐지 염려스럽게 쳐다보던 키탄이 말했다.

“우선 남쪽 숲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거기 몸을 숨기고 계시면 제가 .."

그러나 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돌아가서 아버지를 뵈어야지.”

“예? 하지만……….”

키탄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가 스쳤다.

그는 로이의 어머니의 남동생이었다. 인간식으로 말하면 외숙부가 된다.

키탄은 장로들과 로드의 신임을 받는 훌륭한 숲의 일원이었다. 매번 로이가 일족과 마찰을 빚거나 형제들을 짓밟아 놓을 때마다 어떻게든 그를 변호하려 애썼던 것도 키탄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바로 위의 형을 반쯤 죽여 놓은 행동은 도가 지나쳐서 키탄도 어떻게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

본래 숲의 일족들의 회복력은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팔다리가 부러져도 한 시간이면 멀쩡해질만큼, 그런 괴물 같은 재생력을 가진 성체를, 그것도 로드의 직계 혈통을 죽기 직전의 숨만 붙은 시체로 만들어 놨다는 것은…….

키탄은 오싹 몸을 떨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형제의 몸체를 장난감 다루 듯하던 광경이란.

결국 로드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막내아들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다. 그것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로이의 행방을 추적하는 내내 키탄은 우두머리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로드의 화가 좀 누그러졌을 때 조카를 찾아낸 것이다.

"그러면…… 바로 함께 가시겠습니까?”

감정표현이 극히 드문 키탄이었지만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타 고난 조카였다.

개화도 못했을 만큼 아직 정신적으로 어리고 감정이 미숙해서 그렇지 제 짝을 만나고 철이 들면 그보다 더 왕에 어울리는 재목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키탄은 이번에야말로 사이 나쁜 부자를 화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응, 그게 좋겠어."

환하게 웃으며 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탄의 얼굴도 덩달아환해졌다.

“그럼 채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응.”

기대에 부푼 탓에, 키탄은 미처 제 조카가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키탄을 앞세워 복도를 떠나기 전에 로이는 마지막으로 힐끔 텅 빈 객실을 한 번 더 살폈다.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면 되잖아요.”

로이는 빙그레 웃었다.

늑대는 사냥감을 쫓을 때 결코 조바심 내지 않는 법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줄리 엣이 그의 영토 안에 있는 한, 서두르지 않아도 그들은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막 동이 터오를 무렵, 새벽빛이 침실 창으로 뿌옇게 비쳐들고 있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서류를 보다 말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물체를 잠시 확인했다. 영롱한 황금빛을 뿜어내는 동그란 상아판이었다.

마치 나침반처럼 생긴 물건이었지만 평범한 나침반과는 달리 바늘이 없었다. 대신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가 줄곧 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빛줄기가 조금 희미해졌다.

"주군.”

옆에서 그의 눈치를 살피던 하딘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칼라일 공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옆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채 아물지도 않은 제 왼 손바닥을 내리그었다.

서걱.

섬뜩한 소리에 이어 새빨간 핏줄기가 하얀 상아판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붉게 물들었어야 할 그물건은 피를 금방 흡수하고는 다시 밝은 빛줄기를 쏘아 냈다.

마치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들이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하딘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 렀다. 온갖 험한 일에 익숙한 하딘마저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질렸다.'

상아판은 레녹스 칼라일이 신전에 가서 반강제적으로 강탈해온 성유물이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아르고스의 눈동자는 저토록 무식한 물건이었다.

신성한 성유물이라더니, 무슨.

차라리 악신의 유물이 더 어울렸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사람의 위치를 알려 준다니, 꽤 놀랍긴 하지만 그 대가로 한 시간에 한번씩 사람의 피를 먹여야 했다.

사용법이 너무 야만스럽지 않은가. 게다가 효율성도 떨어진다.

정말 질리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빛줄기가 약해질 때마다 저 짓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칼라일 공작이었다.

“그래서, 알아낸 건 이게 전부인가?”

"예, 전하.”

레녹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하단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마물의 숲에 홀로 들어가서 몇 시간이고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주인의 모습이 더 나았다.

그들은 현재 제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빈 저택을 숙소 삼아 머물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하딘은 많이 알지 못했다.

공작의 심복이지만 그는 주인에게 질문하지 않고 명령만 따르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어제 황제를 알현하러 갔던 레녹스가 공작가의 가신들을 둘로 나눴다.

는 것뿐이었다.

레녹스는 초조해 보이지도, 비통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양 담담한 태도였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칼라일 공작은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신기하게도 누그러뜨리는 것이 그나마 줄리엣모나드였는데.’

하딘은 벌써부터 그 말수 적은 아가씨가 그리워졌다.

줄리엣 모나드가 공작저에서 도망친 것이 벌써 나흘 전이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칼라일 공작의 분노는 대단했다.

줄리엣이 붙잡히면 사달이 날 것 같아서 공작가 사람들은 마음을 졸였다.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닌가 내심 걱정했는데 역까지 봉쇄하고 여자를 뒤쫓아 갔던 레녹스 칼라일은 뜻밖에도 빈손으로 돌아왔다.

혼자 돌아온 칼라일 공작을 본 이들은 처음에는 줄리엣의 안위를 염려했다.

그러나 아르고스의 눈동자에 따르면 그녀는 무사히 수도를 빠져나가 도망친 것 같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던 것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하딘은 슬쩍 테이블 위를 곁눈질했다. 섬뜩한 성유물이 꾸준히 멀어지고 있는 줄리엣 모나드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나가 봐.”

“예.”

그러나 대답하고 나서도 하딘은 곧장 물러나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그를 힐끗 본 레녹스가기막히다는 투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너도 줄리엣에 대해 할말이 있나?"

"……아닙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덜컹. 하딘이 문을 닫고 나가자 레녹스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닫힌 문을 한 번 쏘아보았다.

언제부터 공작가의 가신들이 저렇게 그녀의 역성을 들게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심지어 하딘은 줄리엣과 직접 마주친 적도 몇 번 없지 않나?

인사를 나눈 적은 손에 꼽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레녹스가 줄리엣에게 몹쓸 짓이라도 할 것처럼 경계했다.

하딘의 걱정과는 달리 레녹스칼라일의 머리는 명쾌하기 그지 없었다.

레녹스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줄리엣이 자취를 감춘 이후, 지난 며칠간은 기묘한 시간이었다.

레녹스는 나날이 자신이 어디까지 저열해질 수 있는지 깨닫는 중이었다.

조금 전 하딘이 가져온 것은 그가 지시했던 줄리엣의 과거사였다.

줄리엣에 대해 알아 오라고 처음 지시했을 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7년간 피부를 맞대고 살았는데, 뭘 더 알아야 할 게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일말의 꺼림칙함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파라락.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리자 책상 위의 서류들이 어지러이 비산하며 흩어졌다.

대신전의 성유물은 그녀의 위치를 알려 줄 뿐 줄리엣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알려 주진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제게 말하지 않고 동쪽으로 떠나 버린 이유가 그녀의 과거 기록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누군가의 과거 행적을 캔다는 는것은 생경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줄리엣모나드는 평범한 백작 영애였다.

불운한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지만 않았어도, 가문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만일 운 나쁘게 그의 눈에 띄지만 않았더라면 그녀의 그녀의 삶은 그럭저럭 평탄했을 것이다.

평범하게 약혼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녀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동화 같은 마을에서 강아지랑 오순도순.

“남들처럼 조용히,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요.”

“....… 평범하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레녹스는 자신이 얼마나 더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인간인지 깨달았다.

“그러면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지.”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특별할 것 없는 줄리엣의 과거 기록 중 그가 오랫동안 미처 알아채지 못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지나치게 사소해서 의식할 필요조차 없던, 미미한 점이었다.

줄리엣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현재는 동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과거의 약혼자가.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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